◎ 2018년 나해 6월20일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제1독서
<갑자기 불 병거가 나타나더니,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1.6-14
복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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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를 읽었습니다. 글이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흥남부두에서 피난민들을 태웠던 선장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선장님은 만사천 명의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영하 20도의 혹한이었다고 합니다. 배에는 화장실도, 방도 없었다고
합니다. 화물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장님은 배에 오르려는 피난민의
눈을 보았고, 사다리를 내려서 피난민을 태우기로 하였습니다.
거제도까지 가는 길은 3일 걸렸다고 합니다. 거제도로 가는 길에 한
아이가 태어났고, 4명의 아이가 더 태어날 준비를 하였다고 합니다.
전쟁과 죽음의 상황에서 사랑과 생명은 어둠 속에서 빛을
드러냈습니다. 선장님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평생 수도원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던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굳이 다른 곳을 향해서 여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멀고 깊은 우주의 신비를 본 사람이 복잡한 유흥지를
돌아다닐 필요가 없듯이, 명화의 깊이를 알아버린 사람이 이발소의
그림을 더 보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고, 홍해바다를 건넜으며,
구름기둥을 따라 다녔지만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몸으로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득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사제생활 27년을 했는데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면서도 늘 무엇인가를 찾으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잘은 모릅니다. 함께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기도하리라
생각합니다.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 버리는 꽃처럼 기도하지 않으면
사제생활이 메마르기 때문입니다. 메마르지 않고 27년을 사제로
지내는 것을 보면 다들 나름대로 영적인 에너지를 보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께서 하시는 동안거, 하안거를 하지는 못하지만
매일 새벽 주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부족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갈망이 있어야 하고,
기도는 여유가 있어야 하고, 기도는 시간을 정해놓고 해야 하고,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하고, 기도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항상
먼저여야 한다고 강의를 했지만 제가 늘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식, 허영, 위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교만함에서 나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베풀 때, 기도를 할 때, 단식을 할
때’에도 드러나지 않게 겸손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싶어 하고,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성공을 위한 경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이 알아주는 명예와 업적 때문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나 성급하게 열매를 맺으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도, 희생, 사랑, 나눔’이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뿌리 깊은 신앙은 유혹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수들은 형식과 규칙들을 넘어서곤 합니다.
고수들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굳이 의식하지 않기도 합니다. 저
자신은 아직은 고수가 아니기 때문에 제도라는 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강물이 깨끗하면 갓을 씻고, 강물이 더러우면 신발을 씻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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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들어 올려 질 때만 줄 수 있는 것
2018년 나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들어 올려 질 때만 줄 수 있는 것>
복음: 마태오 6,1-6. 16-18
20여 년 전 이태리 어느 시골에 마리오와 안셀모라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마리오는 위대한 설교가가 될 꿈을 안고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될 준비를 하였습니다. 안셀모도 같은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사제가 되기를 원치 않고 평수사로 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마리오는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마리오가 첫 강론을
하게 된 전날 밤, 설레는 가슴으로 복도를 거닐고 있을 때 안셀모가
와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마리오,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어.”
다음 날 마리오가 제단에 올라갔을 때 안셀모는 한 구석에 앉아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강론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마리오는 그의 꿈대로 차차 설교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럴수록 마리오와 안셀모의 거리는 차차 멀어졌습니다. 드디어
마리오에게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도 강론을 할 기회가
왔습니다. 평생에 한 번일지도 모르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제단에 올라갈
때마다 조용히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해주던 안셀모가
떠올랐습니다.
마리오는 빨리 수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안셀모는 바로 그날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마리오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방을 열어보고 가난한
살림을 보았을 때 그의 가슴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마리오는 안셀모의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수도원 원장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예, 저도 안셀모 같은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강의를 많이 하다보면 마음이 공허해짐을 느낍니다. 채울 시간에
비해 내어주어야 하는 시간이 너무 많고 그러면서 받는 인간적인
영광이 공허함의 옷을 입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면 나중엔
껍데기밖에 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조금 자제하기로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복음에 옷 입혀지는 성령의 뜨거움입니다. 좋은 말은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뜨거움이 들어있지 않으면
영혼구원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는 이는 점점 더 뜨거워지는 사람이어야지 내어주고 식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 스승이 가진 성령의 두
몫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자신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면 주겠다고 합니다. 당장 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로 갈 때 자신도 입어야하는 성령의 옷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마차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엘리야는 바람에 들어 올려
그 마차를 타고 하늘로 승천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야에게 던집니다. 바람과 불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을 받아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영을 내려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늘로 가면서 주는 것은 자신의 겉옷입니다. 겉옷은
세상에 살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산입니다. 입는 것뿐만 아니라
이불로도 사용되었던 것이 겉옷입니다. 그러니 하늘로 올라가며 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었던 전부를 주는 것입니다. 천상에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이 필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은 이
지상 것에 어떠한 애착도 가지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취한 사람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데 그 안에
그 사람의 영이 들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조그마한
애정이라도 가진다면 그 사람이 주는 것 안에는 성령이 깃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듣는 사람이
자신의 겉옷을 찢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을 받은
엘리사는 자신의 겉옷을 둘로 찢어버립니다. 그도 또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영을 내어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안셀모는 이 세상에 어떠한 애착도 없었지만 마리오는 위대한
설교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오는 자신의 설교에
어떤 뜨거움도 넣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모는 이미 십자가에 박혀 들리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명예에 대한 애착도 세상에 대한
애착도 없는 가난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어
올리어져 당신의 핏방울 하나까지 내어주시는 모습이 곧 승천하시며
성령을 주시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이 세상에
많으면 많을수록 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고, 성령의 힘으로 점점
들어 올리어져 세상 것과 무관해지면 질수록 그 사람은 세상 구원을
위해 줄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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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에펠탑 효과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6월20일 수요일
에펠탑 효과
오늘은 “에펠탑 효과”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 말씀에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은 128년 동안 3억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입니다. 하지만 에펠탑은 처음에는 흉물 취급을 받았지요.
수많은 반대 속에 세워진 에펠탑은 수십 년이 지나면서
명물이 되었고 프랑스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좋아 보이지 않아도 자주 보면 좋아지는
현상을 바로 에펠탑 효과라고 합니다. 원래 자주 보면 정들고,
정들면 좋아지게 마련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좋게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커피와 차를 대접해도 시큰둥합니다. 축복의 말을 건네도
퉁명스럽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웃어주고 밝은
얼굴로 대해주면 좋은 인상이 그들에게 남게 됩니다. 저절로 바로
생활 속의 전도, 삶속의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미소를 담고 복음이 필요한 곳, 사랑이 필요한
곳에 에펠탑 효과를 전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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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내것이 사실 내것이 아닙니다!
2018년 나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내것이 사실 내것이 아닙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제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임무-
자선•기도•단식-의 바람직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명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강조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예의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랜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6장 2~4절)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종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富)는 모두 내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자선을 우리의 지난 죄를 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보속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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