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6월17일 [(녹)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낮은 나무는 높이리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7,22-24
제2독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6-10
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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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1주일
2018년 나해 6월17일 연중 제11주일
1784년 이 땅에는 작은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습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명은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234년이 지났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씨앗을 이 땅에 뿌리내렸고,
박해와 순교의 피를 통해서 자라났으며,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는 103위의 성인을 공경하고 있으며, 124위의 복자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삶으로 실천했던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저는 어르신들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입니다. 다른 하나는
천주교라는 신앙입니다. 어린 시절 생활의 중심은 신앙이었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 연도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몇 시간씩 걸려도 주일미사에 참례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제 손을 잡고 언덕을 넘어 성당으로
가셨습니다. 친지 중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은 것도 모두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였던 어르신들의 기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송이 꽃이
아름답게 필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날아왔던 작은 씨앗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씨앗이 썩어가는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줄기로 비와 바람을 맞아들이고, 뜨거운 태양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꽃은, 꽃이
져야만 또 다른 씨앗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나무를 심는 사람’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제게는 큰
감동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무를 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이었습니다. 새들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시냇물도 말라버렸습니다. 혼자서 외롭지만 매년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지금 그곳은 새들이 머무는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시냇물이 흐르고, 꽃들이 만발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묵묵히 나무를 심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의 씨앗을 이야기하십니다. 길가에 버려질 수도
있고, 가시밭에 떨어질 수도 있고, 자갈밭에 떨어질 수도 있는
씨앗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그 씨앗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근심과 걱정이
있었지만, 교회는 성장하고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씨앗은
1784년 한국 땅에도 심어진 것입니다. 한국 땅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도 100년이 넘는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교황님께서 3번이나
방문하셨을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근심의
씨앗이 뿌려지면 근심은 걱정과 불안을 자라게 합니다. 근심은
불평과 불만, 원망과 분노를 열매 맺게 됩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마음에 근심의 씨앗이 뿌려지면 그렇게 커다란
파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근심의 바다에 침몰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면 감사와 기쁨이
자라게 됩니다. 용기와 위로, 용서와 나눔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우리 마음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힘차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과 희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선택하면
근심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설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특정한 시간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비록 겨자씨와 같이 작을지라도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소통의 나라, 흐름의
나라입니다.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함께 있든지, 떠나 있던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어머니의 뜻이
이루어지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일방적인 나라입니까?
기도와 대화가 함께 있는 가정입니까? 함께 살지만, 하숙집과 같은
가정입니까?
오늘 영성체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모든 날, 주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주님의 집은 넓은 평수의 집이 아닙니다. 주님의 집은 화려한 주택이
아닙니다. 주님의 집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집입니다.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집입니다. 기도와 나눔이 함께 하는
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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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비유를 못 찾으면 진리를 모르는 것이다
2018년 나해 6월17일 연중 제11주일
<비유를 못 찾으면 진리를 모르는 것이다>
복음: 마르코 4,26-34
사제가 되니 신자들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각자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다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각자 나름대로의 사랑의 정의를 내려놓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랑의 단어만 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부모님의
사랑을, 어떤 사람은 연인의 사랑을,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각자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사랑을 ‘구체적으로’
정의해보라고 할 때 “사랑은 그냥 사랑이죠, 뭐.”라고 대답하면 저는
‘아,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입니다. 인간이 천상의 것을 인식하는
방법은 지상의 것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인 그리스도를 통해서인 것과 같습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도 난폭하고 거칠어서 어떤 선생님도 버티어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설리반 선생님만이 헬렌 켈러를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설리반 선생님이 헬렌 켈러에게 물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선생님이 나를 꼭 안아주는 거.”
만약 헬렌 켈러가 사랑이 무엇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려한다든가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고 했다면 헬렌 켈러는 아직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가까워질수록 그 진리를 이 세상 것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의미를 모른다면 비유할 것을
찾아낼 수도 없습니다.
비유를 찾아낼 수 없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영혼도 있지만
육체도 있기에, 육체에 관계된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영혼에
전달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성체도 밀떡 모양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벌들이 사라져 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일입니다. 한
천재 과학자가 꿀에 대한 수만 페이지의 논문을 썼습니다. 그것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꿀의 맛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우연히 들에서 꿀을 먹어보고 그 과학자의 강의에
참석하였습니다. 천재 과학자의 말이 다 맞는 것은 같아도 또 매우
모호하게만 들립니다. 이에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을 했습니다.
화가 난 천재 과학자는 그럼 꿀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계속 설탕과 같이 달기도 하고
엄마의 달콤함과 같기도 하며 사랑의 부드러움도 들어있다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교수와 학생들은 그를
비웃었지만 정작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비유’를 찾아낼 줄 알았던 그 아이였던 것입니다.
정작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비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꿀의
맛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하늘의 진리를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라고 하시며 겨자씨와 같고, 밭에
묻힌 보물과 같고, 물고기를 잡는 사람과 같다는 식의 비유로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가 가장 구체적인 표현법입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비유로만 말씀하셨다는 뜻은 진리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막연하게 이 세상에서
거룩한 행위를 하면 거룩해지는 줄 압니다. 그러면 저는 “천사들은
거룩한가요?”라고 물어봅니다.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하느님을 “거룩하시다”고 찬송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까지
거룩하다면 그 말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하느님만 거룩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것에서 거룩한 것을 찾아야합니다. 무엇이
거룩할까요? 성체를 거룩하다고 합니다. 성체 안에 하느님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 성체를 영한 사람들도 거룩합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뜻은 이렇듯 세상 것에서
그 비유를 찾을 때 더 명확해집니다.
‘생명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생명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나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생명나무를 이 세상 것에서 찾으면
뜻이 명확해집니다. 바로 성탄트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태어나신 성탄절 날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면 그리고 그 진리를 선포하려한다면
비유를 찾아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알고 있는 뜻도
명확해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진리를 명확히 알려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한다면
자신도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말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비유를 찾아낼 줄 알아야합니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고,
비유를 찾지 못하면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도 시험지를 제출할
때 그림을 그려내라고 합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그림으로 그려
자신의 것으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면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여자 아이는 사람을 잘
그리고 남자 아이는 자동차를 잘 그립니다. 알면 잘 그리게 돼
있습니다. 잘 그릴 수 있다면 아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를 잘 들 수 있다면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책 한
권을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수 있지만 예화 하나로 모든 것을
깨닫게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유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다는 말은 하늘의 진리를 명확히 깨닫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비유를 찾아내는 노력을 하셨다는 말은 그만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랑의 수고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때 내가 아는 것에 대한
비유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이 세상 것들에게서 찾아내야합니다.
비유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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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작은 것이 사실 작은 것이 아닙니다!
2018년 나해 6월17일 연중 제11주일
작은 것이 사실 작은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것을 적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찌 그런 걸 다 조사했는지, 참 이해가 안됩니다. 거기에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아버지 소유냐? 전세냐? 월세냐?’를
표기해야했습니다. 집에 ‘냉장고가 있는지? TV가 있는지? 전축이
있는지?’도 표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이 가장
난감해하던 질문, 아버지 직업란이 있었습니다.
잘 나가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당당히 아버지 직업을 적을 수
있었지만, 적기가 참 ‘거시기’한 직종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장통 ‘뻥튀기 아저씨’가 아버지인 아이였습니다. 아버지 직업란에
‘뻥튀기 아저씨’라고 적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친구에게, 저희는 아주 그럴듯한 직종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곡물팽창업!’^^
예수님께서 한번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겨자씨의 확장성, 팽창성을 예로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희망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겨자씨는 지금은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큰 성장과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상징으로서
소개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이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복음 4장 26~34절)
생선회를 먹을 때 초장, 간장과 더불어 사용되는 양념, 혹은 향신료가
있는데, 바로 겨자입니다. 톡 쏘면서 코가 뻥 뚤리는듯한 특별한
느낌에 중독성이 강합니다.
겨자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인 1년생 식물로 분류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약간 과장법을 쓰셔서, “큰 가지들이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복음 4장 32절)라고
설명하시는데, 사실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1년생 풀과에 속하는
채소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덩치가 크지는 않습니다. 보통 많이
자라면 사람 키 정도만큼 자라납니다.
간혹 크게 웃자란 겨자들은 2~3미터까지 자라나기도 합니다.
그래봤자 독수리나 매같은 새들은 깃들수가 없고, 겨우 참새나 박새
정도의 작은 새들이 깃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겨자가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말은 겨자풀이 잘 자라나 작은 나무처럼 튼실하게
자라났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특징인 확장성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겠습니다.
내 안에,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악의 영역은 축소시키고,
하느님 나라의 영역, 선의 영역을 확장시켜나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시작한 아주 작은 선행 하나, 아주 작은 나눔 하나,
아주 작은 사랑의 실천 하나가, 사실은 한알의 겨자씨입니다. 확장
능력이 탁월하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뿌린 그 작은 씨앗을 언젠가
30배, 60배, 100배로 확장시켜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뿌린 작은 씨앗 하나, 오늘 우리가 심은 손가락 굵기만한
작은 묘목 하나가 언젠가 큰 나무로 성장할 것입니다. 세파에 지친
수많은 영혼들이 시원하게 쉴 그늘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우리 손에 쥐고 있는 작은 것들이 결코 작은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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