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8일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는 거룩한 삶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3-18 07:05:51    조회 : 373회    댓글: 0

☆ 2018년 나해 3월18일 [(자) 사순 제5주일]

[수도회]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는 거룩한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례 31,31-34
○ 제2독서 히브 5,7-9
† 복음 요한 12,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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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우리 모두의 평화

2018년 나해 3월18일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나는 새 계약을 맺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31,31-34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7-9

복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0-33

4세기 박해시기가 끝나자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잘 본받는 길은 십자가
위의 죽음을 따르는 순교라고 여겼는데, 이제 순교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교회는 세속화에 빠집니다. 돈을 주고서 성직을 사고파는 성직매매까지
이루어지면서 주님께서 경고하셨던 부와 명예만 추구하는 장사하는
집이 된 것입니다. 교회의 부패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많은
이들은 교회가 사라질 수 있는 커다란 위기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극복했기에 지금 현재까지 교회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힘이었습니다. 당시의 교부들은
실제 피를 흘리는 순교도 중요하지만, 평생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의지의 순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수도자들의 헌신이 생겼습니다. 수도자들은 척박한 땅으로
들어가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따르기 위해 자신과 싸웠습니다.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극기와 보속을 실천하면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의 집인 교회가 은총을 파는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커다란 위기가 다가왔을 때에 이렇게 늘 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교회가 유지될 수
있는 커다란 힘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교회의 큰 위기가 왔다고 말합니다. 아니 교회를 뛰어넘어
이 세상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면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누구는 몇몇의 잘못으로 인해서 교회나 세상이 혼란과 위기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몇의 영웅으로 인해서 교회나 세상이
다시 변화되어 성장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을 수 있었습니까? 제2독서의 히브리어
저자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지만 직접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보여주셨고 이로 인해 하느님의 뜻인 구원이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히브 5,8-9 참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한 새계약이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재를 뿌린 재의 수요일로 시작한 사순 시기가 벌써 5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에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 함께하고 있었을까요? 아직도 내 자신만을 사랑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밀알 하나를 소중하게 간직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뜻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래서 이
세상 안에 힘들어하는 줄어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인생의 목적이 자기만의 편안과 유익을 위한다면 길을 잃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산다면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를 얻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편안함이 좋은 것 같지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맑은 날만 있으면 세상은 사막이 된다고 하지요. 우리의
인생 역시 좋은 날만 있으면 영혼이 메마르면서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고, 이 안에서 죄의 굴레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 혼자만의 편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평화입니다. 내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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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박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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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받고 싶거든 먼저 믿어라

평범한 한 남자가 어느 시골 여관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계산하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관 주인에게 말했다.

"돈을 놔두고 나왔습니다. 한 시간 안에 돈을 가져와 지불해도 될까요?"

늙은 여관 주인은 펄쩍 뛰었다. 돈을 당장 지불하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외쳤다. 계속되는 실랑이..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여관의
웨이터는 주인에게 말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지갑을 깜박하고 외출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제가 대신 내겠습니다. 이분은 정직해 보입니다."

얼마 후 그 남자가 여관에 돌아와 주인에게 말했다.
"이 여관을 얼마 주고 샀소?" "3만 프랑이오."

그는 그 자리에서 3만 프랑을 내어주며 여관을 사겠다고 했다. 그는
여관 문서를 받아서 웨이터에게 주었다.

"당신이 나를 믿어 준 건 3만 프랑보다 더 값진 일입니다."

그는 평복 차림으로 나왔던 나폴레옹이었다. 믿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지만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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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는 거룩한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18일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는 거룩한 삶

축제 때에 유다교로 개종한 그리스 사람 몇이,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던 그들은 필립보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청합니다. 그들은 그저 그분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신비를 알려는 갈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갈망을 채워주시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12,23)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광에 이를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발적인 십자가 죽음으로 이르게 되는
영광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4-2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남김없이 봉헌하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요약하여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참 생명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성생활의 목표는
거룩하신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문제나 이웃의 아픔을 외면한 채 내적 고요와 평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내적 일치와 더불어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유보하는 거룩한 삶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듯이’(히브 5,8) ‘겪어냄’과 ‘내어놓음’,
곧 인내와 희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시간이나 재물 일부를
떼어 다른 이를 위해 내놓는 것만으로는 결코 '예수님의 영광의 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기꺼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모두를 내놓음으로써 남을 살리는 사람을 존중해주시며, 그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12,25.26).

이런 삶은 사랑 때문에 내가 죽어 없어짐으로써 남을 살리는 삶이기에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길은 가까운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스스로 이기심을 버리고, 고집부리지 않으며,
내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는 나를 넘어 하느님과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나를 떠나 모든 사람과 피조물과 세상사를 좋음과 애정을 마음에 품고
바라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
좋고 아무 일 없으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는 결코 함께 행복해질 수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먼저 고통을 견뎌내고 힘든 일을
감당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의와 차별, 그릇된 사회제도와
편견에 저항하며 사랑을 실천하셨던 예수님을 따르는, 참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 다가온다
하여도, 묵묵히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제 한 목숨만
귀하게 여기지 말고, 모든 이에게 항구히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모두를
행복의 나라로 이끌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억압과 차별을 받는 이들, 외롭고
고통받는 이들을 '먼저', '더' 사랑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한 톨의
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을 땅에 떨어뜨리는 겸손, 묻히는 의탁,
썩는 자기비움과 자아이탈이야말로 생명과 기쁨의 씨앗임을
기억하면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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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18일 사순 제5주일.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 24)

자연의 이치는 변화의 이치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진정한 밀알의 여정입니다.
말씀이라는 밀알은 열매를 맺으려합니다.
죽어야 할 것은 말씀이 아닌 우리의 욕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못난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서 말씀과 생명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공간이 말씀의 공간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자신이 이제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열매를 맺습니다.
진정한 생명은 악습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말씀의 결심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하느님 자녀의 본분이 무언지를 깨닫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밀알 하나의 본분은 생명의 열매를 맺기위한
십자가의 죽음임을 믿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다시금 죽는 밀알의 열매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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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남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18일 사순 제5주일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남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의 전례는 파스카에 대한
고통스러우면서도 기쁨에 찬 묵상을 요구하는 사순절의 근본적인
주제들이 들어있다. ‘낮춤’의 신비보다 ‘고양’의 신비로 제시되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것, 자아 포기와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권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 앞에 취하여야 할 우리의 자세에
따라 나타나는 구원, 혹은 단죄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사랑의 결정적인 선물로서 '새로운 계약' 등이다.

복음: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성대하게 메시아 입성을 했던 예루살렘에 와 계시다.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그리스인들이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21절)
하고 필립보에게 청한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사물의 외적 형태를 넘어 그 내적인 의미를
파악한다는 말로, 예수님 안에 간직된 비밀, 즉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그 비밀을 알고자 하는 원의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과 아버지를 향한 독백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그분의 신비스러운 점을 드러내셔서
그리스인들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바로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알처럼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의 신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원을 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헌신에의 초대를 말하는
것이지 죽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풍요한 결실 능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밀알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때, 그리스도께는 최대의
영광이 돌아온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우선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보다 더 큰 사랑을 표명하는 것이며,
또 이러한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고 이끌어줄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3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뵙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은 구원에로 이끌려
들어오는 이방인의 세계를 나타내는 첫 번째 표현이다. 십자가는 이미
그리스도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주일의 복음의
‘높이 들리다’라는 말을 만난다. 이 말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얻어진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이 되기 전에 이미
‘높이 들리심’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높이 들림’이라는 사실이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 예수님의
공포와 거부감을 조금도 경감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그 무서운 상황
앞에 두려움과 마음의 동요를 표현하시고 계시다. 그래서 성부께
기도하신다. 그러면서 당신이 느끼시는 괴로운 긴장감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마음의 분열을 극복하고 이 세상의 역사를 위한
그 결정적 순간의 주인공이 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며, 당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바라신다.”(H. Van Den Bussche, Jean, Desclée de Brouwer 1967,
p. 362).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28절). 이
아버지의 계시는 예수님의 전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스러운 봉인이다. 즉 예수님의 지나온 생애, 죽음을 감수해야할
생애, 부활을 통해 더욱 빛나게 될 생애를 말한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이미 빛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음에로 몰아가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내려지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신다. 그분을 죽이는 것은 빛을 거스르는 결정적인 죄였다. 

이렇게 빛을 거부하고 단죄를 받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을 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단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자신을 충실히 내 맡기고
그분의 사랑의 선물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여야 한다. 사탄에 대한
승리는 결정적으로 여기서 이루어질 것이다.

제2독서: 히브 5,7-9: 예수님은 복종을 통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항상 자유롭게 순명할 수 있는 내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것처럼 육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함으로써만이
성취될 수 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십자가의
고통 앞에 큰 소리와 눈물로써 기도하고 간구하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구해주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에게 십자가를 지워야 했던 당신의 뜻을 성취시킬 능력을
주심으로써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약을
깨뜨리지 않으시고 무한한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은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 됨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심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랑의 결과로 세상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들과
영원히 결합되셨기에 인간은 그분께 결정적인 사랑의 응답을 드려야
한다. 이 결합에 사랑이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분께 결합할
수 없을 것이다. 

사순절의 여정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만남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
가능하고, 부활을 지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매순간 그분에게 사랑의
응답을 드리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자기를 끊는 아픔을 이겨내도록
주님께 우리도 기도하며 나아가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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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5주일

2018년 나해 3월18일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전주의 치명자 산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성지를 담당하는 신부님께서는
참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종철 요한과 이순이 누갈다
동정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발행하였고, 부부의 글을 담아서
십자가의 길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순례자들이 함께 미사에 참례할
장막성전을 만들었습니다. 시와 협의를 해서 순례자를 위한 피정
센터와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 센터를 만들기로 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성지 순례를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순교자들의 영성과 삶을
기억하는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매월 첫 월요일에는 피정을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저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신부님의
헌신과 노력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생각합니다.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면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나환자들의 일그러진 발에 맞추어 신발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아이들을 위해서 악기를
준비해주었고, 학생들로 구성된 연주단을 만들었습니다. 신부님의
헌신과 사랑은 공동체에 희망과 꿈을 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열매를
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신부님의 꿈과 사랑은
영상으로 만들어졌고,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성소의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았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신부님의 삶은 많은 신학생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것처럼 사제들의 말과 행동이 공동체에 큰
실망을 주기도 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삶을 살지
않고, 섬김을 받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라고 말을
하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바쳐서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하늘에서 보시면 참으로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조선팔도를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하늘에서 보시면 눈물을 흘리실 것 같습니다.  

올해로 10주기를 맞이하는 선우경식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인 요셉의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선생님의 뜻을 따르는 많은 의사들이
요셉의원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요셉의원은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생님의 사랑은 외국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교회가 2000년 동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은 웅장한 건축물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잘
조직된 교계제도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꺼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가는 참된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운전을 하다보면 운전을 능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말을 잘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수천 번 수만 번 되풀이하기
때문에 아이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님을 따르는 삶,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태산이 높다고 해서 오르지 않고 산만 탓한다면 그것 또한 현명한
태도가 아닙니다. 누구나 이태석 신부님처럼 타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가 오웅진 신부님처럼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면서 ‘꽃동네’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한걸음입니다. 지금 내가 내딛는 한 걸음이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도 하늘의 성인과 성녀들처럼 그렇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될 것입니다. 봄이 오면 대지가 살아나듯이, 꽃이
피어나듯이, 우리들의 마음에 새로운 법을 심어 얼마 남지 않은
사순시기에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도록 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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