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23일 [(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수도회] 공동선을 책임있게 실행하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20,10-13
† 복음 요한 10,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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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이제는 내 마음을 활짝 열고
2018년 나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어렸을 때, 버스를 타려고 하면 거의 전쟁 같았지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필사적으로 타려고 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많은 승객들을 모두 태우기에는
버스가 터무니없이 작아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 타게 됩니다. 바로 버스 안내원의 힘
때문입니다. 작은 체구인데도 무슨 힘이 그렇게 좋은지 어떻게든
승객들을 모두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 버스 승무원은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없다면 버스에 온전히 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승무원은 많은 부분에서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버스기사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에 1989년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변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변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산을 배워야 사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주산을 배우는
사람을 찾기는 정말로 힘듭니다. 성냥은 어떠합니까? 아마 집에 커다란
성냥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라이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 사람, 문화, 생각
등등 온통 변하는 것투성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지요.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바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코 이 모습을
지혜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합니다.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와 보다 더 가깝게 해준 것을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하고, 사랑의 실천이 율법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여준 것을
율법을 어기는 아주 못된 사람 취급을 해버립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과거에만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악한 행동도 아니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과 행동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너무
심했던 당시의 유다인들의 모습을 묵상해봅시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요? 도무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래서 그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집 센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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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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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가족들이 여행을 가서 하루 24시간 내내 집에 혼자 있다는 상황입니다.
이때에 이런 감정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1) 난 무섭다. 왜냐하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2) 난 평화롭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난 지루하다. 왜냐하면 난 재미있고 즐겁게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4) 난 외롭다. 왜냐하면 누군가 같이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5) 난 즐겁다. 왜냐하면 혼자서 원하는 방식으로 즐겁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 정도의 감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각
감정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다 옳습니다. 즉,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정까지도 옳고
그름의 잣대로 나누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모든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어떠할까요? 다양성 안에서 일치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양함을 서로가 인정하는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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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공동선을 책임있게 실행하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금, 요한 10,31-42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요한 10,38)
공동선을 책임있게 실행하는 삶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께 심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특권을 주셨다 하십니다(5,19-30). 또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6,34-51), 생명수요 세상의 빛이라 하십니다(7,37-38; 8,12).
나아가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참 메시아라 하십니다
(10,1-18). 오늘 복음에서는 한술 더 뜨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분의 일을 하며,
아버지와 하나라고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분께서 하신 좋은 일은 인정하면서도(10,33),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고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분의 행동으로 기득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11,48-57 참조), 그분을 제거하려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반발과 적대적 태도에 맞서 자신의 신원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곧 당신은 세상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아들로
파견되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선한 일이 바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준다는 것입니다(10,38). 당신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선(善)이시고 으뜸 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하십니다(성 프란치스코).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지요. 하느님의 선은 사람들과 피조물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善)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선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좋은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일이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줍니다.
참 신앙은 좋은 일을 하시는 예수님과 하나되어,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유익과 사회정의와 공동선이 증진되도록 힘씁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선을 모든 것 안에서 실현해나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읽어내며, 주님께 선을 돌려드리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좋은 일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좋음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굳어진 생각의 틀에 갇혀 진리와 선을 거슬러 어둠
속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이런 그런 유다인들의 가면을 쓰곤
합니다. 선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곤 합니다.
선을 행하기보다는 선을 외면하기도 하지요.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냉정하고 폭력적인 말, 험담과 비난은
선이신 하느님을 슬프게 할 뿐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왜곡된 해석,
분노와 적대감을 버리고, 서로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안고 하느님의
좋음을 발생시키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지만 선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좋음’은 늘 세상적 가치들과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안보논리나 경제논리로 앞세워, 하느님의 선을
실현하기보다 사익이나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간존엄과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보다는 정치보복 프레임을 내세우며
적폐를 덮으려 하는 병적인 이들이 추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오늘의 유다인들입니다.
"공동선의 요구는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온전히 발전시키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공동선을 달성하여야 할 책임은 개개인뿐 아니라,
국가에게도 있다. 공동선은 정치권력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165. 168항)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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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약한 모습 그대로/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약한 모습 그대로 오늘은 “약한 모습 그대로”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3절 말씀에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만났습니다. 손이 마비되어
고통 가운데 있는 이 사람을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일으켜
세우신 후에 그에게 “네 손을 내밀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당황한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장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손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 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고통,
우리의 부끄러움을 예수님께 창피해하지 말고 내밀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감출수록 그리고 숨길수록, 그리고 덮을수록 문제가
해결됩니까? 문제가 있다면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내밀고 드러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무슨 체면을 차립니까? 의사 앞에서도 병든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왜 예수님 앞에서는 주저하십니까?
약한 모습 그대로 손들고 나올 때 주님은
기뻐하시고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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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2코린 11, 23-27) 꽃이 피기 위해서는 땅 속에서 양분을 찾아야 하는
뿌리가 있어야 하듯이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땀과
눈물이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고통과 시련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도 힘든 때가
있었나요?” 돌아보니 저에게도 힘든 때가 있었습니다. 운동신경이
부족해서 체육시간이 힘들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치아가 부러지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도 경험했고, 골절도 경험했고,
통풍도 경험했습니다. 한 본당에서 3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신 적도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의 말씀에 따라서 방을 3번 옮기기도 했습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실망을 준적도 있었습니다. 정확한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남을 판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고난과 시련을 따라 갈 수는 없습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꽃들이 흔들리면서 피듯이 우리는 살면서 아픔과
고통의 강을 건너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에
태어나셨고 184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사제서품은 1845년에 받으셨고
1846년에 순교하셨습니다. 26살에 순교하셨고, 사제생활은 1년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아주 젊은 나이에 순교를 하셨고,
사제생활도 아주 짧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으며, 한국의 수선탁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짧은
생이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하느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절망 중에 있는 사람, 슬픔과 분노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도 해야 하며,
조롱과 멸시를 당할 각오도 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와 같은 일을 하다가 조롱과
멸시를 당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따르는 일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편하기도
하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거름이 되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양분을 찾아 올리는 뿌리가 되기보다는 화려한 꽃이 되기를 더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꼴찌가 되라는 말, 회당에 앉을 때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 밀알 한 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 그분이 하신 말씀들은 현실의 삶에서는 실천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 돌을
던지려 했던 것입니다.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명동의 거리는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합니다. 명동의 거리가 깨끗할 수 있었던 것은 새벽어둠에 나와
거리를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길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상을 아름답게
지켜나가는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자선, 희생, 선행은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는
나눔, 사랑, 봉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 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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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내 방식이 최고는 아닙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내 방식이 최고는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 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내 방식으로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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