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25일 [(홍) 주님 수난 성지주일]
[수도회]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 입성하는 예루살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50,4-7
○ 제2독서 필리 2,6-11
† 복음 마르 14,1-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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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성주간
2018년 나해 3월25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5,47
전에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임신을 했는데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조울증을 앓고 있어서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임신을 위해 약을 끊었고 얼마 뒤에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분을 조절하게 하는 약은 태아에 잘못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절대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를 먹지 않으면 산모는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매님께서는 결국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약을 끊었습니다.
왜냐하면 뱃속에 있는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위해서,
아이를 위한 사랑의 마음이 약을 끊을 수 있는 결단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사랑의 힘이란 모든 것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큰 사랑의 힘을 성주간이 시작하는 오늘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라는 외침으로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호하지요. ‘호산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어떠할까요? 승진이
아닌 좌천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주의 주님께서
인간 세상의 임금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주들이 하듯이 늠름한 말을 타고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빌린 마귀를 타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래도 우리 인간들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한 것은 하느님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욕을 당하는 죽음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문득 얼마 전,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식당 안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왜 밥 안 줘!”라고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서 고개를 돌리니,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상당히 많이 화가
나셨나 봅니다. 번호표를 들고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 번호가 표시되지
않고 다른 번호만 표시된다는 것이지요. 너무 화가 나서 “왜 밥 안 줘?”
라고 소리치셨던 것입니다. 담당자가 얼른 할아버지 곁에 가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할아버지, 이 번호는요 이곳이 아니라 저쪽 한식 코너에요. 여기는
양식 코너라서 주문하신 음식이 여기에서 안 나와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할아버지께서 잘못하신 것이라고 무안을 주고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말씀하시면서
할아버지에게 무안함을 주지 않았고, 또 할아버지를 정성껏 모시고
가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존경스러워 보일까요? 큰소리를 자신의 불만을 외친 할아버지일까요?
아니면 조용히 할아버지를 상대한 직원일까요?
내게 화를 낸 사람에게 똑같이 화를 내게 되면 어떻습니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분명히 서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꼭 화를 내야만 문제가 해결될까요? 문제의 해결은 더욱 더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힘은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누르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폭력에 폭력을 맞서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으로 폭력에 맞섰고, 그래서 십자가를 짊어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약한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큰 힘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큰 힘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성주간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크신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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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못하며 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못하다. 그리고
아는 것은 행동하는 것보다 못하다.(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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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람(오세민)
사제품을 받고 첫 부임지로 떠나는 날, 어머니는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풀어 보라며, 안에는 편지와 한두 살 무렵
입던 작은 옷가지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신부님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잡지책에서 보게 된 글입니다. 자녀 중에 네 명을 신부로 만드신
어머니의 가르침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는데, 왜 큰 사람인 것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막내 신부님께 하신 이 말씀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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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 입성하는 예루살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25일 주님수난 성지주일, 마르 14,1-15,47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르 15,34)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 입성하는 예루살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나뭇가지를 들고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마태 21,9 참조)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군중들처럼, 그분을 반기어 찬미하면서도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한없이 비우고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심으로써, 참 구세주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체포되기 전 겟세마니 동산에서 번민 중에도,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을 하시라고 자신을 맡겨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쓰라린 고통과 더불어, 동족들과 추종자들에게
‘버림 당하는' 고통을 당하십니다. 나아가 성부로부터 철저히 버려짐을
체험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런 고통 중에 홀로 다음과 같이
절규하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이 절규는 고통과 사랑의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절규는 억울함의 토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사랑으로” 이어주시려는 갈망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들 예수가 저주받는 것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절규는 죽음을 생명으로
되돌리시려는 하느님의 절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배신, 유다인들의 적대감과 배척과
모욕과 핍박이 밀려올 때마다 절규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절규는
고통과 불의가 펼쳐지는 그 현실에 주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가장
확실한 선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통 중에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리신다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순간 내가 그분을
외면한 것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고통을 견디어내는 가장 확실하고도 강한 힘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고통과 슬픔과 번민을 온전히 헤아려주시며, 내 삶에
개입하시여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어떤 처지에서든 내
십자가를 함께 지고 절규하시며, 끝까지 나를 사랑해주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구세주 예수님처럼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어야겠습니다.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생명의 주인을 모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배반하여, 주님을 슬프게 해드려선 안되겠지요.
로마병사들처럼 주님께 대한 찬미 대신 모욕과 조롱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백인대장처럼 예수님을 참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됩니다. 사랑으로 서로 짐을 져주고
용서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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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마르 14, 1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2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마르 14, 18)
성스러운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삶이 더욱 중요합니다.
가장 기쁘고 아름다운 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됩니다.
떠나보내고 나서야 깨닫게되는 우리의 모순된 삶입니다.
성스러운 삶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는 댓가를 지불합니다.
성지 가지 사이로 수시로 변하는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환호와 갈채뒤에는 저주와 분노가 있습니다.
하느님마저도 부정하고 모독하는 무서운 교만이 있습니다.
우리의 폭력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외롭게 이 길을 걸어 가십니다.
이 성지주일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
마음을 새롭게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주간의 시작과 끝은 분명 십자가입니다.
주님 십자가는 우리 영혼을 비추며 우리 영혼을 정화시킬 것입니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푸른 성지가지가 인색한 우리 신앙을
흔들어 깨우는 아픈 구원의 길이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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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수난 성지주일
2018년 나해 3월25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마르 14,1―15,47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외로웠고, 힘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은 무서워서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도록
결정했던 권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의 말을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내가 예수님을 알면 천벌이라도 달게 받겠소.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은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한다고 강론을 하면서, 본인의 십자가를 남에게 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 가톨릭교회는 매년 가장 긴 시간을 정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의 배반을 고백하는 것일까요? 군중들의
무관심을 들추어내는 것일까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위선과 탐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 십자가, 죽음은 2000년 전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 진형형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배역만 바뀌었을 뿐, 예수님의 수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직자들의 타락과 위선을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남에게는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손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을
묻히지 않으려 합니다. 신학을 이야기하지만 신앙은 없는 건조한
성직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재물에는 눈이 밝아지면서 오랜
교회의 전통인 영성에는 메마른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외면하기도 합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늘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현장에는 무서워
도망을 간 제자들처럼 종교의 지도자들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위로와 희망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시몬,
부산의 시몬, 제주의 시몬이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이런 시몬들이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고,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마리아, 데레사, 루시아가 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외로운 이들의 손을 잡아 주는 분들이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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