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0일 구원의 조건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3-30 06:53:29    조회 : 407회    댓글: 0

☆ 2018년 나해 3월30일 [(홍) 주님 수난 성금요일]

[수도회] 사랑으로 견디며 저항하는 십자가의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52,13―53,12
○ 제2독서 히브 4,14-16; 5,7-9
† 복음 요한 18,1-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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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다 이루어졌다.

2018년 나해 3월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제1독서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13―53,12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4-16; 5,7-9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19,42

학창시절에 제일 자신 있는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남들은 어렵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수학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오히려 어려운 문제
푸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봤는데 끔찍할 정도로 망친
것입니다. 시간 조절을 잘못해서 큰 배점이 달려있는 문제 몇 개를
아예 풀지 못한 것이지요. 시험을 마치고 나서 세상이 완전히 끝난
기분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자신 있는 과목인데 망쳐버렸으니
말이지요.

그렇다면 당시에 느꼈던 삶이 완전히 끝난 것 같은 기분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기분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먼 옛날의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패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이나 상처가 먼 미래에서도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지금 자랑스럽게
말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가 더 많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픔이나
상처 자체가 무조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극복했느냐에 따라서 이야기가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픔이나 상처를 피하기만 하면 어떨까요? 나중에 입으로 꺼내고
싶지도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면으로 맞서서 노력했다면
훗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금을 힘차게 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특별히 말씀의 전례와 십자가 경배를 통해서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으심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우리를
향한 사랑을 묵상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십자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아픔과 상처였습니다. 이를 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피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못
박은 이들과 반대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질투, 두려움, 배신, 권력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하시고 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다 이루어졌다.”

피하고만 싶은 아픔과 상처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순간순간 다가오는 아픔과 상처의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피하려고만 하고,
불평불만만을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이겨나갈 때, 그 십자가는 내 안에서 또 하나의 소중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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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 하나가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 말은
바로 사랑이다(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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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와 노력

지금 개를 3마리 키웁니다. 아주 어렸을 때, 도둑으로부터 우리 집을
보호하기 위해 키웠던 개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부가 된 후에 넓은 마당이 있는 갑곶성지에 와서는 계속 키우게
됩니다. 사실 한 마리는 태어난 지 두 달 지나서 바로 왔지만, 다른 두
마리는 이미 다 성장한 상태에서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강아지 때부터
키운 개는 항상 제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지만, 다른 두 마리는
제 곁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어 하는 것만 같습니다. 아마 전 주인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렇겠지요. 그래서 더 관심을 갖고 대하려 했고,
특히 간식을 자주 주면서 친밀감을 높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도망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 안에서는 더 복잡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첨가해야 합니다.
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내 애정을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배려와 고민 없이
무작정 공세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 되고 맙니다. 실제로
사회에 문제가 되는 스토킹이 무엇입니까? 본인은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받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쌍방의 소통입니다.
일방으로 사랑으로 진행된다면 엄연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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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사랑으로 견디며 저항하는 십자가의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30일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요한 18,1-19,42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요한 19,17)

사랑으로 견디며 저항하는 십자가의 길

오늘의 전례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으로 우리의 모든 병고와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이사 53,4).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시려고 적대자들의 손에 기꺼이
당신 자신을 넘겨주십니다. 하느님을 자신들의 고정된 틀 안에 가두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빌라도와 결탁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유다 지도자들, 그에 동조한 무기력한 빌라도, 세상 가치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요한 19,15)고 외치는 유다인들,
모두가 어둠의 길을 달려갑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대신, 기존의 통치 방법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권력을 추구하는 폭력의 상징인 바라빠를
놓아주기로 합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어, 그분을 거짓 왕으로 꾸미고 조롱합니다(19,2).
그분 가까이에서 모든 것을 보고 배운 베드로마저, 세 번씩이나
그분을 부인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연민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측은히 여기시는 사랑
앞에, 증오와 폭력, 거짓과 탐욕, 이기심과 헛된 야망, 배신에 이르는
나약함은 힘을 잃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당신 왕권을 행사하시는 사랑의 옥좌가 되었고,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는 예수님이 바로
인류와 맺으시는 사랑의 성사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우리가 이어집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여 살아내야겠습니다. 오직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난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매일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져야겠지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작정
참아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 곧 곧 선과 사랑과
정의 때문에 겪는 고통은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과 불의, 차별과 불평등, 불의와 구조악, 비인간화하는
온갖 것들이 만들어내는 고통에는 과감히 저항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수동적 견딤을 상징하는 바보같은 묵인과 침묵과 견뎌냄의
표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어도 죽일 수 없는 생명의 주님께 대한
확신 속에, 적극적으로 불의와 폭력을 폭로하는 저항의 표지입니다.
연민으로 일상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불의와 악에 저항하는 복된
오늘이길 바랍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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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사야 52,13―53,12 히브리 4,14-16; 5,7-9 요한 18,1―19,42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떤 분들은 남들에게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죄책감도 못 느끼고
그들에게 당하는 사람들보다 더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남들에게 많은 해악을 주고도 남보란 듯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가서 충전기를 연결하고 잔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핸드폰을
알람으로 사용하는데 그 다음날은 알람이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늦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배터리가 완전히 나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충전기가 전원 코드에서 빠져있는
것을 모르고 그냥 꽂고 잤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론 아무 이상이 없게 보일지라도 악인들은
하느님과 실제적으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느님과의 단절이 곧 지옥입니다. 지옥은 하느님은
못 보는 고통이고 천국은 하느님을 직접 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악인은 그래서,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의인들이 누리는 단 한 시간의 평화도 평생 누려볼 수 없습니다.

목요일 밤부터 부활 전까지 예수님은 아버지와 단절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때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시고 실제로 죽음 이후에 지옥에
내려가셔서 부활을 기다리셨습니다.

성 바실리오 성인에 의하면 이 때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아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이들의 세계에 계시고 두 분을 이어주어야 할 사랑의
성령님은 두 분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눈물
흘리고 계시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사랑이 되는 분들이신데
아버지는 아들을 죄인처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쓴 이상 사랑할 대상이 아닌 벌을 주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대신 아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선사합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사랑 자체이신 분이 사랑이 깨어져 서로 멀리 떨어지는 고통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상상해볼 뿐입니다. 이별의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겟세마니에서 온 땀구멍으로 피가 역류하여 흘러야
했는지 우리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지옥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공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시고
우리의 죗값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잃은 지옥의
고통까지 맛보아야 참으로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의 죄를 완전하게
보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모든 고통이 끝난 것처럼 생각 할 수
있겠으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이별하여 있는
고통을 계속 겪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으려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니 당신을 잡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그 때까지도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해 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압니다. 사랑하면 함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혼인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배신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홀로 남은 사람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을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은 죄 자체보다도 그 죄로 인하여 사랑하는
인간이 당신을 등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온전한 사랑을 잘
모르기에 덜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잃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고통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사랑하는
분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한 번 이상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 고통을 당신
아들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만
괴로웠을까요? 아버지도 아들과 이별함으로써 같은 고통을 당하십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하느님께 드렸는지 인간이 좀
느끼고 죄로부터 돌아와 다시 당신을 사랑해 줄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 낮엔 미사가 거행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로 인한 하느님과의 단절, 즉 지옥의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느님이 없는 침묵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새로운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삼일을 조금이나마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감사하며, 또한 그 죄의 실상을
체험하고 다시 겸손한 모습으로 부활 할 것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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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수난 성 금요일

봄은 오는데 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미세먼지가 봄보다 먼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미세먼지가 생긴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람을 타고
중국으로부터 넘어온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풍요와 편리함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환경과 자연을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챙기려하는 우리의 욕심과 욕망이 드러난 것일 수
있습니다. 미세먼지는 숲이 있고 강이 흘러야 할 곳보다는 빌딩이
가득하고, 자동차가 달리는 곳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개발과
발전의 패러다임에서 환경과 자연을 보호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미세먼지는 먼지처럼 사라질 것 같습니다.  

30일 피정의 3주간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구할 은총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 받으시는 주님
앞에 슬픔과 동정과 부끄러움을 청하라고 합니다. 아픔으로 가득 차신
그리스도와 함께 아파하고 근심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근심하고, 나
때문에 받으신 그렇게 많은 고난에 대해 눈물과 슬픔을 간구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이 나를 위한 것임을 묵상할 때 그
수난과 고통이 더욱 깊이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먼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라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은 그저
남의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의 직무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의 직무는 봉사직입니다.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을 위해, 우리들을
위해 봉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합니다. 건물 꼭대기에
달려있는 피뢰침이 온 몸으로 하늘의 번개를 받아들이듯이, 사제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온 몸으로 받아 안아야 합니다. 어제 주님
만찬미사에서 ‘세족례’를 하였듯이, 사제들의 삶은 이웃을 위해 희생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의 삶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사제의 직무는 ‘예언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사제의
직무입니다. 강론을 잘 준비하고, 강론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제의
모습이 진정한 예언직의 선포입니다. 강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강론은 기도 중에 준비해야 하고, 강론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강론은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 또한
하느님 말씀의 선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제의 직무는 ‘제사직’입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7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는 것이 사제의 직무입니다. 미사를 성실하게 준비하고,
고백성사를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 지역의 아픈 사람을 찾아가는
병자성사를 자주해 드리고, 하느님 앞에 혼인의 계약을 맺는
혼인성사의 충실한 증인이 되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열심히 가르치고,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신앙의 기쁨과 진리를 알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사제의 직무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교회의 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학교에는 신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길가에 ‘평신도가 원하는
사제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제상입니다.   

1.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사제
2. 기도하는 사제
3. 힘없고 약한 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4. 검소하며, 물질에 신경을 안 쓰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5.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6.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7. 웃어른에게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예의 차릴 줄 아는 사제
8. 본당 내 각종 단체를 만들고, 사리에 맞지 않는 독선을 피우지
   않으며, 평신도와 함께 본당을 이끌어 나가는 사제
9. 교구장 및 장상에게 순명하며, 동료 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10. 신도들에게 알맞은 강론을 성실히 하는 사제
11. 고해성사나 성사집행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12. 고해성사를 성심껏 주는 사제
13. 친한 교우에게만 매여 그 사람들의 말만 듣고 움직이지 않는 사제
14. 후배 사제 양성에 마음 쓰며 생활하는 사제
15.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  

오늘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생각하며, 또 다시 주님께
모욕을 드리고, 조롱을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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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구원의 조건/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3월30일 주님 수난 성 금요일

구원의 조건

오늘은 “구원의 조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 말씀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옛날 영국에서 천막 전도 집회를 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막 집회가
끝났는데 한 청년이 “목사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젊은이! 너무 늦었네”라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구원은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내셨습니다. 자네가 할 일은 없다는 말일세. 다만 자네는 그 예수님의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즉시로 자네도
구원을 받게 된다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내가 아직도 구원받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길은 예수님이 만드시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은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온전히 믿음으로 여러분 모두 구원 받은
성도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 인천교구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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