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4월1일 [(백)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수도회] 죽음과 절망을 넘어 생명과 희망으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0,34ㄱ.37ㄴ-43
○ 제2독서 콜로 3,1-4
† 복음 요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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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평화가 너희와 함께
2018년 나해 4월1일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제1독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ㄱ.37ㄴ-43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4
복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
우리나라에서 집안의 기둥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자녀를 집안의 기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래는 자녀가 아니라
옛날부터 집안의 기둥을 ‘아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태양’이라는 뜻인 ‘안해’를 써서 ‘아내’라고 부른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 현재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집안의 기둥으로 아내가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통해 스스로의 자존감이 없어지니 집안의 태양 같은 모습으로
아내가 살 수 없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우리나라에 빌게이츠 같은 사람 5명만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왜 없을까요?
‘아내’를 ‘안해’로 섬기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지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마음, 조금의 실수도
인정하지 못하는 완고함, 무시하고 부정하는 마음 등이 우리 곁에
훌륭한 사람, 큰 변화를 가져올 소중한 사람의 숫자를 계속해서 줄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주며, 이를 통해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떠올려보십시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태양과 같은 분이신 데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했고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인해서 저렇게 약한 사람이 무슨
하느님이냐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의 완고함과 이기심, 부정적인 마음과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욕심들을 모두 부수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요한 20,2)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을 달려가지요. 그리고 빈무덤을 보고서야 믿습니다
(요한 20,8 참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루신 영광스러운 부활임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열정적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됩니다. 베드로는 힘주어 말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사도 10,43)
주님의 부활을 하나의 단순한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라고 말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세상에 알리는 증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증인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극단적인 개신교 사람들처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삶으로 기쁨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전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군중들 앞에 나와서 이렇게
당당하게 연설했다고 하지요.
“나는 여러분들의 실패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하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부활 하신 뒤에 절망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1)였던 것입니다. 즉, 다시 일어나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다시 일어나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증언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큰 기쁨이 결코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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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그 어떤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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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을 즐기십시오.
놀면 공부에 방해가 될까요? 경기도 시흥초등학교 4, 6학년을 대상으로
우선 실험집단은 매주 1시간씩 놀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통제집단은 정상 수업을 하도록 했지요. 실험 전후에
설문조사, 집중면접, 그림검사, 뇌파검사 등을 통해 변화를
추적했습니다.
실험집단 아이들의 학습태도가 좋아졌고 주의집중이나 불안 등 심리적
문제들이 개선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졌고, 협동과 자아통제력은 상승한 반면 공격성은 현저하게
낮아졌습니다. 여기에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고차원적 사고를 담당하는
기능이 향상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수업을 했던 통제집단은
변화가 전혀 없었습니다.
노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기쁨을 즐기십시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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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죽음과 절망을 넘어 생명과 희망으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4월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죽음과 절망을 넘어 생명과 희망으로
예수께서 돌아가시자 허탈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던 사람들 중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 곧 부활을 믿지 않고 눈앞의
현실과 자신에게 다가온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던 돌이 치워지고 시신은
없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가 먼저 다다릅니다(20,4). 사랑을 많이
받은만큼 사랑하는 님께 더 빨리 다다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빈무덤과
시신을 싸맸던 아마포와 개켜진 수건만을 확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음을 믿었으나(20,8),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을 깨닫지는 못합니다(20,9).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그들은 그분의 지상 여정에 함께
했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권능을 지니셨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수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도 여러 번 들었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그분이 돌아가시자 그분의
육신에만 집착하여, 모든 희망과 의미를 상실하고 당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생명과 진리는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결코 죽지 않음을 우주적으로 선언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고통과
절망과 죄라는 무덤의 바위를 굴려내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희망을
선포하는 기쁜소식입니다. 그러나 무덤을 막는 돌과 빈무덤은 우리의
믿음을 뒤흔듭니다. 따라서 죽음의 경계를 넘으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기는 쉽지 않지요.
부활신앙은 제자들의 힘으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자,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분이 죽지 않고
여기에 살아계시어 함께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결과 도망가
버렸던 사도들과 여인들이 모여와 예수님의 죽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발견한 때문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며, 실패가 아닌 승리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우리는 어떻게 부활신앙을 재현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거짓과 탐욕, 분노와 무관심을 ‘빈무덤’에
묻어버려야겠습니다. 또한 차별과 배척, 불평등과 관계단절에서
벗어나도록,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무덤 입구의 돌’을
치워버려야겠습니다. 물질과 감각을 뛰어넘는 사랑이야말로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줘야겠습니다. 죽여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께 희망을 두면서...
아울러 70주년을 맞는 4.3사건을 기억하며, 무참히 죽어간 희생자들을
추모해야겠습니다. 1945년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에서 해방되었지요.
그러나 남북분단을 우려하며 5.10 단독 선거를 반대한 제주도민들은
이념갈등의 포로가 되어 냉전체제의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가혹한 무력진압으로 3만여 명의 도민이 목숨을 잃고
섬 전체가 폐허로 변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사는 우리 모두, 그 진실을 규명하여 해결하고
제주도민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연대해야겠습니다. 어두운 매듭을
풀어내고 상처를 치유하여 화해와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폭력과 죽음을 넘어 부활의 생명과 희망을 되찾아야겠습니다.
4.3사건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요 십자가인 까닭입니다. 이런
실천 없는 부활신앙은 거짓일 뿐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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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부활 대축일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어제 우리는 부활성야 미사에서
9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은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시고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부활은 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믿음의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죽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엄하게 질책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기운을 넣어 주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었고, 말씀을 통해서 구원이 다가왔으며, 주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이야기를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셨던 곳입니다. 많은 이적과 표징을 보여주셨던 곳입니다.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가파르나움,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절름발이, 소경, 세리,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갈릴래아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내가 만나는 이들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 절망, 아쉬움, 불평, 불만을
던져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편안하십니까?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 이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다시금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거짓과 탐욕은 남아 있었습니다.
위선과 폭력도 남아 있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고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하지만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여인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거짓과 탐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위선과 폭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시기에 읽으면 좋은 글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열어 보지 않은 선물”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 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하나 그것을 열어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눈과 귀와 손끝이, 발걸음이 그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이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루하루 그것은 당신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사랑과 기쁨의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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