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4월4일 [(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수원]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사도 3,1-10
† 복음 루카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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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목표을 세워야
2018년 나해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예전에 운전 할 때에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교통지도였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게 되면 지도를 먼저
살펴보고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먼저 살펴보고서 운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그 길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워놓고서 지도를 보고서 원하는 목적지까지 가곤 했습니다. 따라서
초보운전자에게 운전은 너무나 힘든 것이었지요. 운전하는 것도
힘든데 지도까지 머릿속에 넣어놓고 운전을 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에는 초보운전자도 쉽게 운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출발 전에 목적지를 설정하고서 운전을 하면
알아서 목적지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줍니다. 제가 다른 길로 가게 되면
왜 다른 길로 갔느냐고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다시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줍니다.
이 편한 내비게이션 때문에 한 번은 고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충실하면서 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하겠습니다.”라는 말과 달리
제가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출발 전에
목적지 설정을 잘못 했던 것입니다.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다른
곳을 선택했던 것이지요.
목적지를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면 원하는 곳에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목표가 없거나 잘못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시동을 켜고 움직이긴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성과를 내기가
힘듭니다. 어쩌면 내게 다가오는 하나의 재앙과 같습니다.
어떤 책에서 ‘디제스터(disaster, 재앙)’라는 영어 단어를 풀이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사라지다’라는 뜻의
‘dis’와 ‘별’이라는 뜻의 ‘aster’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별이
사라지는 것이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나침반이 없었던 시절에는
항해할 때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잡았지요. 그런데 이 북극성이
구름이나 폭풍우로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목표가
없음은 곧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왜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까? 바로 그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침통한 표정을 가지고
고향인 엠마오로 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절망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함께 걸어가도 또 함께 대화를 나누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순간 희망의 주님도 알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님을 알아본 순간은
언제입니까? 바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였습니다. 빵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희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순간은 희망이 담긴 목표를 가졌을 때였음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목표를 다시금 분명히 세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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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별과 같아서 늘 그 자리에 있다. 역경은 구름과 같아서 잠시
머물다 곧 흘러간다(에이브러햄 매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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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눈
사람에게는 생체 시계가 있습니다. 이는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사춘기 때에는 밤 11시쯤부터 분비되기
시작해서 아침 9시가 지나도록 남아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나이가
들수록 분비 시간이 빨라지고 이른 아침이면 분비가 끝납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뭐가 힘드냐면서 이렇게 게으르면
어떻게 하냐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약 아침에 잘
일어나는 청소년이라면 생체리듬에 이상이 있는 것일 수 있으므로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합니다.
어른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결론 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아닌 이상 분명히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넓은
마음,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바라보십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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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루카 24,13-35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사도행전 8장에는 재밌고 유익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이 갑자기
필립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길로 가라고 일러주십니다. 필립보는 사람도 다니지 않는 그 길을
왜 가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령님께서 원하시니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러다보니 마차를 하나 보게 됩니다.
성령님은 그에게 그 마차에 다가가라고 일러주십니다. 필립보는
그대로 합니다. 그 마차에 가서 가만히 들어보았더니 그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굴욕만
당하였다. 지상에서 그의 생애가 끝났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즉, 그가 읽고 있었던 것은 이사야서 53장 야훼의 종 마지막
노래입니다. 즉, 야훼의 종이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필립보는 그 내용을 이해 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사람은 에티오피아 재정관리 내시였습니다.
그는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이 내용에 나오는 내용이 예언자가 자신을 두고 한 말인지
다른 누군가를 두고 한 말인지를 묻습니다.
필립보는 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수난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는 내용임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합니다. 그 내시는 바로 가마에서 내려 세례를 받기를 청합니다.
필립보는 그에게 바로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를 다른
어느 곳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 내시는 필립보가 갑자기 사라져
놀라긴 하였지만 기쁨에 넘쳐 자신의 고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위의 내용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누구 하나 설명해 주지 않고 설명해 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성경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었지만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눈이 먼
다음 예수님은 아나니야에게 나타나 그에게 안수를 해 주라고 그를
보냅니다. 아나니야는 그에게 안수를 해 줍니다.
그때서야 그의 눈에 있는 비늘이 떨어지면서 성경을 바로 보게 됩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 그냥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바로 세례의 상징임을, 광야에서 그들이 마셨던
물이 바로 성령님임을, 또 그 물이 흘러나왔던 바위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1코린 10,1-4 참조)
만약 아나니야가 아니었다면 그 진리들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진리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 진리를 깨닫게 되도록 스승을 보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스승의 모습으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여자들로부터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확실한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슬쩍 다가서서 무슨 일로 그렇게 이야기들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예언서를 들어 당신께서 왜 돌아가셔야
하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지 그들의 가슴이 뜨겁도록
설명해 주십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났더니 그 분이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려 그 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 전에는 그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진리를 깨닫도록 보내 주시는 스승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시어 대신 진리를 깨닫도록
이끌고 계심을 말입니다. 혼자 만나려 하면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원하는 누구에게나 인도자를 보내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성경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바오로처럼 그 도움을 청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길잡이들을
자신의 교만으로 놓치지 말도록 합시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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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2018년 나해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루카 24,13-35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들이 지천으로 피고 있습니다. 계절의 봄도
오고, 남과 북도 만나고, 주님의 부활의 기쁨이 남과 북에도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무덤에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락방’에서 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할 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빈 무덤’은 무엇일까요? 내가 주님을 보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메마른 것은 아닐까요? 내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요? 빈 무덤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빈 무덤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주님께로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에서 깨어나는 병아리의 모습에서도,
봄에 피어나는 새싹에서도, 어린아이의 맑은 얼굴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혼부부가 매일 다투었다고 합니다. 정말 둘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싸우고, 부수고, 큰 소리가 이웃집에까지
들리는 말 그대로 힘든 결혼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엄마와 어떻게 만났어요?
아빠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하늘에서 왔어! 아이가
말을 합니다. 그럼 엄마는 천사! 그러니까 아빠가 말을 합니다. 아니
천벌! 물론 우스운 이야기지만 부부가 서로 등을 지면 힘들겠다는
생각입니다.
신혼부부의 앞집에는 결혼한 지 30년이 넘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언제나 웃음이 가득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어느 날,
신혼부부는 그 앞집에 찾아가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싸우는데, 두 분은 어떻게 이렇게 화목하게 웃으면서 지낼 수
있습니까? 그 부부가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우리는 무슨 잘못된
일이 있으면 항상 ‘내 탓이요.’라고 한답니다. 그러면 싸울 일이
없지요. 방 안에 물그릇이 있어서 실수로 밟으면 말을 합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실수로 그릇을 밟았소. 그러면 아내는 말을 합니다.
여보, 미안해 내가 부주의해서 그릇을 방안에 놓았어요. 그렇게 말을
하면 싸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미사 중에, 늘 고백의 기도를 하며,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제 탓이요.’라고 하는 사람은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제 탓이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행동했습니다.
‘주님 날도 저물었으니 오늘은 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그들은
행동하였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실천 없는 사랑은 관념에 머물
뿐입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 다락방에만 머물렀다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락방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나왔습니다. 이제 그들의 발은 주님의 발이
되었고, 그들의 손은 주님의 손이 되었고, 그들의 말은 복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엠마오는 더 이상 의미도 가치도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예수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언제 어디서이든지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로 있어도, 학교 교수 신부로 있어도, 병원의 원목으로
있어도, 교포사목을 해도, 저같이 교구청에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엠마오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바로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도 어쩌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산다면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그분의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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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립스틱 효과/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립스틱 효과
오늘은 “립스틱효과”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시편 107편 9절 말씀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고 말씀하십니다.
‘립스틱 효과’란 불경기 때 전체적인 소비가 감소함에도 립스틱은 잘
팔린다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왜 그럴까요? 미적 욕구를 채우고 싶은
여성들에게 립스틱은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고 립스틱만 발라도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1석 2조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욕구는 불경기도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본능적 욕구는 일시적으로는 만족할지 모르나
곧 다시 만족을 찾아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다 소유한다고 영원한 만족이 있을까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만족은 물질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그런 만족은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모함으로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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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그분이 먼저 알려주어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4월4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루카24,13-35)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성경
풀이를 듣고 마음이 타올랐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마음을 재빨리
움직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믿는 마음’,
‘듣는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1열왕3,9)을 청한 이유를 함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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