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8일 평화, 축복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4-08 07:14:12    조회 : 381회    댓글: 0

☆ 2018년 나해 4월8일 [(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제1독서 사도 4,32-35
○ 제2독서 1요한 5,1-6
† 복음 요한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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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한 마음 한 뜻으로

2018년 나해 4월8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5

제2독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6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잘 아는 신부가 전화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가 너무나 이상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통화라서 귀담아 듣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전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고,
이 여성과 10분 넘게 통화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글쎄 “그래, 나도 사랑해.”라고 말했거든요. 순간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일까? 혹시 사제직을 그만두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젊은 여성과 10분 이상을 통화하고, 여기에 사랑한다고 말하니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한참을 망설인 저는 어렵게
이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너 혹시 고민 있니?”

그러자 “아니 없는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혹시 여자 생겼니?”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무슨 말이야?
그런 소문이 있어? 영광인데? 이 얼굴에도 무슨 스캔들이 났나봐?”
라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저는 심각한 모습을 지으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방금 네 전화 통화를 들었거든. 그런데 어떤
젊은 여성과 오랫동안 통화하고 있더라. 그런데 전화를 마치면서
‘사랑해.’라고도 했잖아.” 이 말을 들은 신부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동생이야. 그런데 동생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면 안 돼?”

솔직히 저도 그렇지만, 제 주위에서 보면 가족끼리 사랑을 자주 말하고
전화 통화도 이렇게 오래하는 경우를 보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의 전화 받는 모습이 생소했고 이로 인해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사실 좋아하는 이성을 대하듯이 가족에게 다정다감한 말과
사랑의 표현을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못이지요?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
앞에 부활하시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였습니다. 세상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도 부족한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지금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라면서 화를 내셔야 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큰 사랑으로 오히려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더군다나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위해서는 당신의 손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믿으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요한 20,27 참조).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사랑과 자비로 제자들은 진심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초대교회의 모습을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진정한 변화는 바로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사랑과 자비를 특별한 경우에만
행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가까운 내 가족,
내 이웃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힘이 되어주는 행동 하나 없이 그저
‘내 사랑을 알겠지.’하면서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을 어색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사랑하고, 당연히 이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당연히
주님을 향해 내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1요한 5,4 참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나로부터 시작하면서 점차 세상 밖으로 펼쳐나가야 합니다. 그때
한마음 한뜻으로 사랑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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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많은 질문이 필요하지 않아. 사랑은 묻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는 거야.(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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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빅스(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구덩이 속같이 어둡다
어떤 신에게도 정복되지 않는 영혼을 내게 주심에 나는 감사하리라

가혹한 상황의 손아귀에서도 나는 움츠러들거나 소리 내어 울지 않으리
운명의 막대기가 날 내려쳐 내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도 나는 굽히지
않으리

분노와 비탄 너머에 어둠의 공포만이 거대하고 절박한 세월이
흘러가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으리

지나가야 할 문이 얼마나 좁은지 얼마나 가혹한 벌이 기다릴지는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는 열일곱 살의 나이에 골관절 결핵으로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커다란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가 그를 진정한 운명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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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부활 제2주일

2018년 나해 4월8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자비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은 자신의 모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릇에 따라서
모양을 바꾸어 줍니다. 물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줍니다.
갈증이 날 때 마시는 한 모금의 물, 가뭄에 내리는 비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지구가 생명이 풍성한 푸른 별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매일 아침 차 한 잔을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공기 없이는 5분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시입니다.
공기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햇빛이 있습니다. 햇빛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가리지 않고 모두를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비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고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 공기, 햇빛’을 통해서 자비로운 삶을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가는 지구별입니다. 우리는 성공, 출세, 재물, 권력, 명예라는 신기루를
찾아서 끊임없이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어 놓으면 볼 수 있고,
멈추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태풍 곤파스가 서울을 강타했습니다. 성당의
나무들도 부러졌고, 신자 분들의 집에도 피해가 있었습니다.
성당에서는 빈첸시오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서 피해를 입은 분들을
도와 드렸습니다. 도배를 해 드리기도 했고,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해
드리기도 했고, 장판을 새로 깔기도 했습니다. 저는 하 글로리아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본당에서는 할머니에게 약간의 성금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저에게 본당에서 드린 성금과 할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돈을 더해서 주셨습니다. 할머니보다 더 피해가 큰
분들에게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태풍은 커다란 피해를 입혔지만 태풍은 우리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따뜻한 마음을 적성 성당에 있을 때도 보았습니다. 어느 날
성당으로 한 형제님이 오셨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군 생활을 했었고,
그때는 공소였던 적성 성당에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제대를 한
후에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은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컴퓨터를 기증해 주셨습니다. 남자들은
군 생활을 한 곳은 찾아가지 않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군 생활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은 찾아왔고, 도움을 주고
가셨습니다. 이름도 묻지 못했지만 그 형제님의 선한 눈빛은 지금도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비로워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자비는 ‘참된 행복’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삶의 구체적인 모습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욕심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자비의
승리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말씀하십니다. 동료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던 토마에게도
나타나셔서 “평화를 빈다.”고 말씀하시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를 만났고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 그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을 모두 벗어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참다운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제 1독서는 평화를 회복한 제자들의 삶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그 세상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뛰놀고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소풍을 가고 독사들이 춤을 추는 그 기쁨의 날”이 온 것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형제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고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고
전해줍니다.  

우리가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고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제 2독서는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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