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4월15일 [(백)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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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공동체의 힘|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4월15일 부활 제3주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루카 24,35-48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공동체의 힘
오스카 와일드가 쓴 ‘별아기’라는 동화입니다. 두 나무꾼이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숲에서 금별 무늬가 있는 자루에 쌓여있는 한
아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둘 다 가난하기는 하였지만 한 나무꾼이 그
아이를 가엽게 여겨 집으로 데리고 가서 키웁니다. 그 아이는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 형제들을 압도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세상에서 자신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믿으며 거만하기 짝
이 없습니다. 병자와 노인,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고 돌을 던지며
놀리기도 합니다.
그를 따르는 다른 형제들도 모두 그와 같은 행동을 하며 그를
닮아갑니다. 그는 형제들의 대장이 되고 그 형제들은 마을에서 악한
아이들로 소문이 날 정도가 됩니다. 어느 날 가난한 노파가 구걸을
하며 그 집을 방문하였는데 역시 별아기는 그 노파에게도 돌을 던지며
놀립니다. 그 노파는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이 엄마라고 합니다.
금별 무늬가 있는 자루에 싸서 산을 넘다 그만 도적떼에게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별아기는 처음엔 믿으려고 하지 않다가, 나중엔 그 말이 설사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거지꼴을 한 사람이 엄마라면 자신은 엄마 없이 사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합니다. 노파는 슬픈 표정으로 갈 길을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별아기의 몸이 꼽추처럼 굽고 얼굴도
두꺼비처럼 돼 버렸습니다. 이젠 자신이 놀림당하는 꼴이 되었고
형제들도 더 이상 그와 놀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후회를 하고 다시 엄마를 쫓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따듯이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엄마를 찾아 큰 도시까지 오게 되었는데 성문경비병들이 그런 불구자는
이 성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막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법사가 그를
돈을 주고 사서 그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산에 가서 금화를 발견하거든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금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까지 할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별아기는 산으로 가서 아무리 금화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혼날 것을 두려워하며 돌아오는 길에 덫에 걸린 토끼를
발견하고는 불쌍하여 구해줍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금화 하나를 찾게
해 주었습니다. 기뻐서 돌아오는 길에 구걸하는 거지를 만납니다.
거지는 며칠을 굶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금화
하나밖에 없지만 별아기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빼앗길 것을 각오하고 금화를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성문으로
돌아왔을 때 경비병들이 별아기에게 인사하였습니다. 온 성의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반가운 얼굴로 노파와 아까 그
거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비병들이 들고 있는 방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노파는 왕비로 거지는 임금으로 변했고 그는
그들의 왕자였던 것입니다.
세바시 462회 ‘위기는 나를 키워준 어머니였다’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안승준 한빛맹학교 교사는 마치 이 동화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그는 전교 1등을 넘어 세계 수학 경시대회에서
우승까지 하고 바이올린과 모든 면에서 뒤짐이 없는 세상에 자기밖에
없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6학년 때 수술 중 시력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특수 학교에 다니며 자신이 놀리던 장애인들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듯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다 누군가, 혹은 어떤 사건을 만나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추함을 깨닫고 이타적인 새로운 삶으로 바뀌어가는 인간 삶의 변화를
이렇게 동화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변화가 곧 공동체의 변화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도둑질이 싫어졌는데 계속 도둑질하는 무리에 속해있을 수 없고
게임이 싫어졌는데 계속 게임방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치푸리아누스 성인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천주교 신자들도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분명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이들의 공동체’라는 의미의
‘에클레시아’란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교회는 그 본질상 같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함께 모인 곳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심’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만약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면 비록 교회라는 구체적인
테두리를 찾지 못했더라도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신과 같이 행동하는 이들의 집단을 만나게 되면 그 안에
소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다르면 자신이 아무리 원해도 그
무리에 머무르는 것이 힘이 듭니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 키워져서
자기만 아는 격리원숭이를 원숭이 집단에 데려다 놓으면 적응을 하지
못하고 외톨이가 됩니다.
공동체는 받았으면 주어야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훈련을 받은
이들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의 털을 손질해주었다면
자신도 또 다른 누군가의 털을 손질해주어야 합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이기적인 모습만을 계속 유지한다면 공동체에서는
기생충이나 모기와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가 결국 사도단에서 퇴출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한 공동체에 오래 머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공동체가
지향하는 행위를 하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가족이 원하는 것을 살기를 원치 않으면 가출을 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공동체는 그 공동체만의 행동양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냉담하는
분들을 ‘쉬는 교우’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교우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반면 교회에
나오지는 않더라도 그 부르심대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은 교우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러나면 공동체의 힘에서 벗어나려 하는 사람과
공동체의 힘 안으로 들어오려는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힘이 공동체 구성원들 개인들에게 힘을 줍니다. 개개인들이
가진 힘이 모인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개인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 있다면 그 시스템대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행동양식이 있을까요?
바로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교회에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 뿔뿔이 흩어졌고 부활하셨을 때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이들이 모두 교회에 모여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오늘 복음도 바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자신들이 본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이나 다른 여인들의 증언,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증언 들은 사도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부활 자체도 믿기 어려웠지만 만약 부활하였다면 자신들에게 먼저
나타나야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토마스도 교회 안으로 복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 안에 머무는 것 자체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는지를 증명해줍니다. 마치 별아기가 엄마를 만나고
만나지 않고의 차이가 명확하듯,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범주에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행위 자체가 세상 사람들의 행위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매우 추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이가 교회로 모였고 또 예수님이 교회에서
나타나시며 당신을 증언하는 소명을 주셨는데도(루카 24,48 참조)
교회에 모이는 것이 힘겹다면 그런 사람은 교회에 나와도 교회 밖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가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한 공동체에 속해 있고 그러고 싶다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누가 교회에 속해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강도를 당하여 쓰러져있는데도 그냥 지나가는 사제나 레위인들은
겉으로는 교회 안에 있지만 실제로는 교회 밖에 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명으로 뭉친
집단입니다. 겉으로는 교회에 나오지 않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이 실제로 교회에 속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속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됩니다.
해적선에 타고 있었다면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해적질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행위보다 더 강력한 힘이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할 때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이웃을 돕지 않을 수 없어서 가난해지고
있다면 그 사람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기에 구원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모임 자체로 그렇게 해야만 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 부활을 증언하고 있지 못하다면 미사에 나와도 교회
밖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인데 어떻게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사랑을 세상에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해지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만이
교회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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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
2018년 나해 4월15일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
팔뚝만한 물고기를 막 잡아올렸을 때, 싱싱한 상태에서 즉석 회를
떠먹는 것도 맛있지만, 소금 간을 해서 구워먹는 맛도 일품입니다.
재수가 좋던 날, 바닷가에서 젊은 수사님들에게 구워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방법도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내장을 제거하고, 비늘을 쳐낸 다음,
몸통 부위에다 비스듬하게 칼집을 냅니다. 칼집 사이에 굵은 소금을
뿌린 다음, 숯불에 천천히 구우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른 양념이
하나도 필요없습니다. 노릇노릇하게 익힌 다음 접시에 담으면,
임금님 수라상 올라가던 요리 저리가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 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우럭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
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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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4월15일 부활 제3주일.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 39)
떨리는 부활의 순간은 믿음의 더운 체온으로 다시 구체화됩니다.
생명을 만드시는 분도 생명을 떠받쳐주시는
분도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다시 만나게되는 뜨거운 주님의 생명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체온으로 다시 구체화됩니다.
예수님의 생기와 온기로 척박한 우리 마음이 다시 풍요롭게됩니다.
부활은 정녕 거짓말이 아니라 가슴 뛰는 우리의 현실이며 사실입니다.
어떠한 힘도 그분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부활은 되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뵈옵는 우리의 삶입니다.
부활의 삶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절망과 아픔을 당신의
체온으로 치유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체온또한 부활을 전하는 따뜻한 표징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따뜻한 마음 더운 체온에서 생명은 더더욱
부활의 구체적인 순간이 됩니다.
온기와 생기 사랑과 눈물을 나눕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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