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3일 거룩한 치열함으로 살아내는 사랑실천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2-23 18:37:10    조회 : 404회    댓글: 0

☆ 2018년 나해 2월23일 [(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수도회] 거룩한 치열함으로 살아내는 사랑실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제 18,21-28
† 복음 마태 5,20ㄴ-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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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모독하는 일까지
금지하십니다. 분노와 모욕이 모든 분쟁의 발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음 안에 깃든 모든 악한 요소들을 뿌리 뽑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이어 형제와 불화 중인 사람은 그와
먼저 화해한 다음에 하느님 대전에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더욱이 용서를 청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계속하여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과연 그를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행한 것이 아직도 자신에게
아픔으로 남아 있어 스스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고는 그 아픔을 느낄수록 용서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용서한다고 해서 아픔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픔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아픔은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미움과
같은 가시를 빼내고 진정 내 안에 평화가 넘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나아가 불의한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도록 오히려 그들을 위해
우리가 선한 일을 해야 하지요. 예수님께서도 죄인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온갖
상처투성이인 인간관계, 병든 사회 구조를 치유해 나갈 수 있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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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내 자신 안에 있는 가치들을 통해서 보상을

2018년 나해 2월2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21-28

복음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보상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핍이나 고통을 겪고 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이지요. 단적인 예로 군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후임병 때 겪은 어려움들을 기억하고는, 자신이
선임병이 되었을 때 후임병들에게 잘 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
괴롭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늘 “내가 쫄병 때는 말야~~”라고
말합니다. 후임병 때의 어려움을 선임병이 되고 나서 어떤 보상으로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보상심리를 공격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라고
합니다. 그는 작은 신장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수없이 전쟁을
치르고 결국 황제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이렇게 보상심리는 역사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보상심리의 결과는
늘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말년에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지요. 그리고 이러한 나쁜 보상심리로 인해 상처받는 누군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보상심리의 한계는 자기 내부의 치유 능력을 상실하고, 상처의
진통제를 자기 바깥에서만 찾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허약한 모래성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이 우리의 삶 안에서 너무나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성을 내거나 모독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내부를 바라보지 않고 외부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이들의 잘잘못이 너무나 많이
보입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고 불의한 것이기에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내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 것뿐이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게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너무한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성 내지 않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말만
하지 않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음 안에 깃들고
있는 모든 악한 요소들을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원인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좋은 가치들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 믿음, 희망, 기쁨, 평화 등의 좋은 가치들을
내 마음 밖으로 내어 놓지 못하고, 부정적인 가치만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을 통해서 보상을 받으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내
자신 안에 있는 가치들을 통해서 스스로에게 보상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말씀 하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 ~~~~~ ~~~~~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의 사랑도 깊어진다
(안네 소피 스웨친).
    
~~~~~ ~~~~~ ~~~~~
미루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번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고민 끝에 지인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지인은 그의 고백을 듣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자네는 삶에서 미루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세 가지를 계속해서
미루는 것 같네.”

그는 궁금해서 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지인은 세 가지 미루지 말아야 할 것을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빚을 갚는 일이네. 누군가로부터 받은 미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도움을 갚는 일 같은 것 말이야. 그런 빚은 갚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네.”

“둘째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네. 자신의 잘못으로 어떤 사람과 관계가
소원해졌다면 상대방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기를 바라지만 말고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하네. 생각해 보게나, 그러지 않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바로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지. 잘 표현한 음악은 청중에게
진한 감동을 주지만 표현하지 않고 담아두기만 하는 마음은 안타까움만
줄 뿐이지.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의 사랑은 상대방의 심장에 북소리
같은 강한 울림을 남긴다네.”

미루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지금 당장 미루지 말아야 할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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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거룩한 치열함으로 살아내는 사랑실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2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에제 18,21-28; 마태 5,20ㄴ-26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마태 5,24)

거룩한 치열함으로 살아내는 사랑실천

제 1차 바빌론 유배 전후로 유다는 혼란과 위기를 맞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론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기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런 방심과 무사
안일함 속에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과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만 말고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에제키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생명을 얻으려면
자비로우신 주님께 돌아가야 함을 간곡히 권고한 것이지요. 그러나
백성들은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립니다. 그 결과 587년에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맙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와 어둠에 머물려는 사람은 건널 수 없는 죽음의
계곡과 패망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신의 삶과 사랑에
책임을 짓지 않고 회피하거나 남의 탓만 하는 사람은 영이 헷갈려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나를 부르는 사랑 찾아 참 회개의
여정을 떠날 때임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곧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삶을 살라는
것이지요. 안일함의 잠을 깨워 간절함과 열정과 헌신의 자세로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겠습니다.

남에게 해코지를 않고 남보기에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 결코 좋은
제자라 할 수 없겠지요. 십계명과 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참 신앙인은 소극적으로
피해 안 주고, 하라는 것만 하는 유아적 자세에서 벗어버려야 합니다.
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일치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함께하며,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해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함으로써 평화를 깨뜨리며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라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관계 안에서
바라보시고,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생명의 단초까지도 존중하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늘 '한 걸음 더' 그리고 ‘보다 더’의
자세로 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요구에 성실히 응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잠든 영적 감수성을 일으켜세워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늘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둠으로써 주님의 영을 호흡해야겠지요.
그란 끊임없는 수련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더 갈망하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타오르게 되는 사랑과 선과 의로움의 불꽃은 결국
거룩한 치열함을 낳습니다. 이 거룩한 치열함 안은 무관심과 무감각의
잠을 깨울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 있는 사람은 분노, 폭언, 멸시와
증오, 관계 단절과 같은 평온과 일치를 깨뜨리는 행동을 그만 두고,
능동적으로 이웃에게 달려갑니다.

오늘도 무딘 영적 감각을 깨워, '한 걸음 더', '보다 더',
‘아직도 더’의 자세로 주님과 이웃에게 다가가 사랑을 실천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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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의로운 사람이란?|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2월2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오 5,20ㄴ-26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의로운 사람이란?

한 구도자가 위대한 스승의 집을 찾는 것을 본 사탄은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돌아서도록 힘껏 온갖 수단을 다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엾은 구도자에게 재산, 욕정, 명성, 권력, 위신 등 있을 수
있는 온갖 유혹을 다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도자는 영적인
일에 제법 경험이 있었기에 그 유혹들을 쉽게 싸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그가 위대한 스승의 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스승 앞에 갔을 때, 그는
스승이 융단 의자에 앉아있고 제자들은 그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좀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성인들의 으뜸가는 덕인 겸손이 모자라는군.’

그러고는 그 스승에 대하여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다른 점들도
살폈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세상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찾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의 눈길도 주지 않는군.’

그리고는 혼잣말로,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아첨을 안 하니까 그럴
테지”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도, 뭔가 잘난 척하는
말투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이 모든 점들로 미루어보아 그는 자기가
잘못 찾아왔으며 어디 다른 데를 계속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구도자가 방을 나서자, 방 한구석에 앉아있던 사탄을 본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탄아. 그는
애초부터 네 차지였다.”
[개구리의 기도 1, 6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의로움’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인데,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의로움’의 의미를 명확히 새기고
살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로운 사람일까요?

루카복음 18장 9절에서 14절에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바리사이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우선 바리사이는 불의나 죄를 짓지도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단식을 통한 절제생활과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십일조도 철저히 내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는 행동으로는
이 세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신실한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의롭게 되었다.’라는 말은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완전한 삶을 산 바리사이가
아니라, 온갖 죄를 저지르는 세리만이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았을까요? 그는 뒤에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
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의로움’이란 결코 ‘행위’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을 낮추어 누구도
평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청하지만,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겨 세리를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의 자리가 심판자가 아니라
용서를 구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면서 어떻게 동시에 심판자처럼 남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자리를 아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합니다. 즉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심판한다면 하느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움이고 정의입니다.
따라서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이 ‘의로움’이지, 사람들이 보기에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의로운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형제를 심판하여,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거나, ‘성’을 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르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살인자가 어떻게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는 사람을 살인자와 같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가끔은 ‘내가 이렇게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왜 아무 것도 안 하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봉사하면서 남을 판단하게 된다면, 내 구원을 위해서라도 봉사를
잠시 접는 것이 낫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도 위대한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찌 될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이고 나의 의로움도 하느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바랐던 세리의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지닐 때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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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바보, 멍청이!|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2월2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마태5,20-26)

바보, 멍청이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
(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이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좋은 글이 있어 함께 나눕니다

침묵의 소중함 -토마스 머튼-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 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을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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