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저에게 멸시와 고통을 주십시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2-25 06:27:22    조회 : 418회    댓글: 0

☆ 2018년 나해 2월25일 [(자) 사순 제2주일]

[수도회] 믿음으로 기쁘게 지고가는 십자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22,1-2.9ㄱ.10-13.15-18
○ 제2독서 로마 8,31ㄴ-34
† 복음 마르 9,2-10

**********
◈ [인천] 거룩함은 평범한 것을 행함을 뜻합니다.
 
2018년 나해 2월25일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2,1-2.9ㄱ.10-13.15-18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4

복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너무 외로워서 힘들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늘
외톨이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보았습니다.

“혹시 화장실에서 힘주고 계실 때에도 외롭습니까?”

분명히 화장실 안에서도 혼자일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도
않고 또 함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주고 있을 때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외로워서 힘들 때는 집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 내 옆에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을까요? 옆에 누군가가 있다 해도 그에 대해 집중하지 않으면
혼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나를 늘 외면하시는 주님인 것 같다면서 외롭고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역시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기도나 묵상 생활을 하지 않고, 성경이나 영적독서를 통해
주님의 말씀도 듣지 않으며, 미사나 피정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유럽 성지순례를 다니다보면 중세 때의 수도원을 순례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대부분 도시에서 벗어나서 홀로 고립되어
있습니다. 외롭고 힘든 삶이 가득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수도자들은 이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습니다. 장소와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면서 푹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제자들은 이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하게 되지요. 더군다나 그 자리에는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아마 천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베드로는 이 자리에
눌러 살자는 의미로 초막을 지어서 이곳에서 지내자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긴 이전까지 바쁜 전교여행을 통해 얼마나 힘들고
피곤했을까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활동보다는 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단지 자신의 욕심이 드러난 말일 뿐이었습니다. 이에
하늘에서는 이런 말이 울려 퍼집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한 제자들을 향한 하늘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외침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것에만 푹 빠져 있는 우리를 향해,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불평불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 제발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기를 요청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 집중하면서 푹 빠져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까지도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물로 봉헌하려고 했던 것은 그만큼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푹 빠져 있는 굳은 믿음을
보여준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에까지 이어지는 복을 내려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로마 8,32)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질 수 있도록 스스로 할 수 있는 노
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노력은 일상의 삶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거룩함은 특별한 것을 행함을 뜻하지 않고, 사랑과 신앙으로 평범한
것을 행함을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을 가지고 평범한 것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점점 더
주님께 푹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푹 빠지는 생활 안에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고,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함께라면 우리는 멋진 일을 할 수 있다
(마더 데레사).

~~~~~~~~~~
함께 한다는 것(요조,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중에서)

‘내가 이거 해, 저거 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
아침마다 청소기 돌리고 빨래통 채워지면 세탁기 돌리는 게 다인 줄
아는 것 같다. 세탁기에 낀 물때를, 수염 깎고 나면 세면대에 떨어진
수염 가루들을, 설거지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배수관 안에 시커멓게
곰팡이가 끼는 것까지 볼 줄 알았으면 한다. 한 번씩 마트에 가서
음식을 대용량으로 사면 오래 먹을 수 있게 소분해 놓으라고 말해도
제주에 내려와 보면 덩그러니 그대로 냉장고 안에 들어가 있고.

오늘도 토스트로 아침 먹고 샤워하면서 세탁기 돌리고 냉장고 비워서
남은 채소랑 김치 찌꺼기 몰아넣고 된장찌개 한 솥을 끓여 한 끼니씩
나누 담아 냉동실에 넣어놓고 젓갈 다 먹은 통을 버리지도 않고
방치해놔서 곰팡이 슬어 있는 거 싹 다 정리하고 온갖 곳에 묻어 있는
고양이털과 먼지 닦아내고...

그러다 내가 써야 할 원고와 내가 읽어야 할 책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팍 솟았다. 왜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건지, 왜 내 눈에는 보이는
건지, 왜 이거 치워라, 저거 치워라 잔소리를 하게 만드는지....

솔직히 이러한 이야기를 부부들로부터 많이 듣습니다. 그만큼 함께
사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께서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 나라 갈 때 다른
보속이 필요 없어. 베드로 사도가 그 문 앞에서 ‘같이 사는 걸로
얼마나 힘들었겠니?’라고 말씀하면서 통과시켜준대.”

그렇게 어려운 것이 하나의 보속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따르는 또 하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 [수도회] 믿음으로 기쁘게 지고가는 십자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25일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마르 9,7)

믿음으로 기쁘게 지고가는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여정을 함께 걸어야 할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9,2). 곧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이렇듯 제자됨의 길은, 자신을
떠나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순례라 할 수
있겠지요.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그분의 옷이 새하얗게 빛납니다
(9,2-3).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정의의 태양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변모사건은 그 자체로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심을 보여준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난의 여정을 사랑으로 걸을 때, 사랑이신 주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음을 알아차려야겠지요.

제자들은 새하얗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다고 하며,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9,5)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에 머물도록 해드리겠다는
것은 얼핏보면,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표시로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처신은 성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가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의 종들이기에 예수님과 똑같은 초막에
머무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으로,
영적 지혜를 받을 준비가 된 땅에 있는 모든 이에 앞서, 하늘로
불림받은 모세와 엘리야를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세
제자들은 영광스런 변모를 보여주신 그분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실 주님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그 영광 안에 그저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9,10). 우리
각자도 교회와 사회도 십자가 없는 영광, 고통과 희생 없는 부활의
기쁨을 좇을 때가 많지요. 현실 안주, 무감각, 편의주의에 젖어
살아간다면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불의와 불공평과
부조리로 얼룩질 때가 많지요. 이런 삶의 질곡은 때때로 상상을
초월하는 댓가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또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희생과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창세 22,2)는 주님의 요구를
확고한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아브라함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삶의 역설과 모순이 가져다주는 당혹스러움과
혼란, 분노, 부조리를 신앙의 눈으로 읽어낼 수 있어야겠습니다. 또한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희생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고난을
받아들이고 겪어냄으로써 참 기쁨에 이르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영광과 기쁨에 빠져들지 않도록 각성해야겠지요.

오늘도 현실 안주와 편의 추구, 그리고 현실 회피와 무감각의 잠에서
깨어나, 복된 십자가의 길을 기쁘게 걸어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 [수도회] 산 밑으로 내려가십시오!
 
2018년 나해 2월25일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산 밑으로 내려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핵심 제자단, 아이들 표현대로 넘버
원(베드로)과 넘버 투(요한), 그리고 남버 쓰리(야고보)만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는데, 거기서 제자들은 기상천외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갑자기 예수님 옷의 빛깔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에 따르면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빛났습니다. 과거에는 마전장이라는 직업이 있었던가 봅니다.
옷을 빨고 또 빨고, 두드리고 또 두드려, 완전 하얗게 탈색해주는 그런
일을 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변모된 예수님 앞으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겁에 질린 제자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그 순간에 또 베드로 사도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조용히
지켜보면 좋았을텐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스승님, 초막 셋을 지을테니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그 순간이 두렵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황홀했던가봅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의복은 해처럼 빛나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였던 모세와 엘리야까지 나타났지, 잠시 천국을
체험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산밑 복잡한 인간 세상 보다는 거룩하고
깨끗한 이 곳, 타볼산 정상, 천국 같은 곳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가
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청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거룩함을 맛보았으니, 그 거룩함을 지니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라고 요청하십니다.

“베드로, 그대는 산 위에서 머물기를 갈망하지만 내려가십시오.
내려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꿋꿋하십시오. 인내와 온갖 가르침으로 꾸짖고 권고하고
격려하십시오. 일하고 열심히 수고하며 고통과 형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착한 행실의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주님의 빛나는 옷이 상징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타볼산에서의 행복은 죽은 다음에나 그대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고생하고, 섬기고, 멸시받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시오.’”

“주님의 변모에 대한 놀라운 체험 말미에, 제자들은 주님과의 만남으로
변모된 눈과 마음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 또한 완수할 수
있는 여정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산에서
내려오도록 촉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분 말씀의 열정으로 변모된 우리는 모든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 특히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고독 속에 지내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병자들을 위해, 세상 각지에서 불의와 횡포와 폭력에
유린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의 생생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지가 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

타볼산 위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음성을 기억합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세상의 유혹, 세상의 논리, 세상의 가치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일 우리에게 던지시는 말씀을 경청하도록
노력합시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 [수원] 고통의 생명성|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2월25일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고통의 생명성

신학생 때 여름 방학은 이태리 한 본당에 가서 있으면서 여름
산간학교에 따라 갔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험한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였습니다. 개울도 건너고 경사진 곳도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특별히 한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비탈을
무서워서 못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는 일도 없고 해서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그 아이를 번쩍 집어서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함께 갔던 주일학교 교사들이 저를 안 좋은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선생님들이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 안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가 홀로 해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가 빼앗은
것입니다. 저처럼 안쓰러워서 도와준다면 아이는 점점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면 스스로 해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의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겉에서 보기엔 아주 얇은 막이지만 그 안에
있는 병아리가 나오기 위해서는 발악을 해야 합니다.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안에 있는 병아리만이 알 것입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가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엄마보다는 말 못하는 아기가 더 고통스럽게 태어나는 것이고 엄마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아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제왕절개를 해서 더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면 모르겠지만 사실은
정상적으로 고통을 느끼며 태어난 아기가 더 건강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기를 위해서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태어날 때부터 그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누에고치라면 나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태어남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남의 고통은 누구도 대신 겪어줄 수 없고 이것을 예수님은
‘세례’라고 표현하십니다. 죽음과 새로 태어나기 위한 고통을 겪어야
그런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진리를 오늘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느리고 힘들어보여서 저는
나비만 빼서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나비는 마치 누에모양으로
쭈글쭈글해져 있었고 날개도 누에모양으로 오그라져있어 좀체
펴지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나비의 노고를 줄여주기 위해 살짝 입김을 불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하게 날개가 빨리 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것에
재미가 들려 바람을 불어주었습니다. 물론 마음 안에는 이렇게 하면
나비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실험삼아 계속 해 보았습니다.

나비는 드디어 조그만 공간 안에 움츠리고 있던 날개를 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날지를 못했습니다. 날개에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 기억으론 결국 그 나비는 날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고 스스로 날개를 펴지 못한 나비는 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새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도 겪어줄 수 없는
고통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왜 구약의 많은 위대한 성조들 가운데 오직 이 둘만이 예수님께
나타났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새로 태어남이 이 둘의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과 예수님은 겉은 영광스러운 모습이지만 사실 ‘출애굽’,
즉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시나이산 부근에서 40년을
숨어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타는 덤불로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모세는 기가 막혀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모세가 야훼께 "주여, 죄송합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고 당신께서 종에게 말씀하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
하고... 모세가 다시 "주여, 죄송합니다.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십시오." 하고 사양하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크게 화를 내시며...”

모세는 좀처럼 백성들을 구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도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당해야하는 수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모세가 처음에 거부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하시며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죽음의 골자기로 내려가십니다.

모세가 이집트 땅에 내려가 거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온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어 지옥에 내려가 당신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훨씬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엘리야 역시 처음엔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으로부터 구해내기를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다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엘리야만을 남겨놓으십니다.
이스라엘엔 심한 가뭄이 들게 하고 엘리야는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머물게 하십니다.

3년 반이 지나고 아합과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 간의 운명의 결전이
갈멜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송아지를 잡아놓고 그 위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편이 참 하느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야가
이겼고 그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였습니다.

우상이 사라지자 이스라엘에는 비로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불과 비는 성령님을 나타내고 엘리야는 성모님을 나타내고 희생제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어쨌든 자신들이 믿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말에 이세벨은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엘리야는 우상숭배를 없애 은총이 땅에 내려오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참을 도망 다니다가 너무 힘들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는 죽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우상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것과 같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셋의 사명이 서로 공통되고 그 공통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고통 없이는
무엇도 새로 태어날 수 없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을 깨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살리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기에 자신이 받아야합니다.

고통의 생산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고통 없이 자신은 물론 어떤 누구에게도 생명을
선사할 수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의 영광은 그래서 수난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순을 지내고 있는 지금 우리, 우리가 겪어야하는 고통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고통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알을 깨는 고통들입니다. 이것을 이겨낼 때엔 타볼산의
예수님처럼 더 영광스러운 나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을 지향하는 성인들은 항상 ‘저에게 멸시와 고통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우리도 ‘고통 안에 숨어있는 생명성’을
묵상하며 사순 2주간을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