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2월28일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수도회] 목숨 바쳐 섬기는 제자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18,18-20
† 복음 마태 20,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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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우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018년 나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어서 그를 치자.>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8,18-20
복음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7-28
아프리카 원주민의 생활을 연구하던 인류학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원주민 아이들에게 놀이를 제안했습니다. 사탕 바구니를 나무에
매달아놓고 제일 먼저 도착한 아이에게 전부 주겠다고 말했지요.
아이들은 좋아하면서 모두가 출발선에 서서는 나무에 매달아놓은
사탕 바구니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인류학자는 출발 신호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힘차게 뛰었을까요?
힘차게 뛸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이들은 사탕 바구니가 걸려있는
나무를 향해 가기는 하지만 전력질주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탕
바구니가 걸려있는 나무가 가까워지면서는 오히려 손을 잡고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결국 모두 동시에 도착했고, 모두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행복하게 사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인류학자는 물었습니다.
혼자 1등을 차지하면 더 많은 사탕을 먹을 수 있었는데 왜 함께
갔느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한 아이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아이들이 슬퍼하는데 어떻게 혼자 행복할 수 있어요?”
저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에
성황리에 끝난 평창 동계 올림픽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선수들이
이기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응원하지요. 승리를 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다른 선수에 대한 관심은 거의 갖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다른 이들의 슬픔을 외면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좀 더 나아가면 나와 연관된 사람의
행복까지를 생각하지요. 남들의 슬픔과 아픔은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평가하고 또 당연한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지요.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
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미리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자기들 역시 그 자리에 앉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제자들의 이런 속마음을 모두 알아채신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해줍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높은 자리, 영광의 자리를 혼자 누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함께 그 자리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보다 윗자리에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종이
된다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이 될 때, 그 영광의 자리를 함께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혼자만의 영광,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영광, 함께 하는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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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사람에게로 돌아간다(나폴레옹 보니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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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행기는?
예전에 페루 나스카 라인(Nazca Lines)이란 곳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이곳의 ‘나스카 문양’은 반드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림인데 화가의 제작연도는 기원전 200~500년 사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규모가 커서 그림 전체를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없지요.
비행기를 타고서 까마득한 상공에 올라가야 사막에 엄청난 크기로
그려진 꽃, 나무, 새, 원숭이, 고래, 우주인등의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양은 언제 발견되었을까요? 비행기가 생긴 20세기
이후에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고서는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거의 2,000년이 훨씬 지나서야 그림의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하느님을 느낄 수도 또 볼 수도 없다면서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발견하고 또 느낄 수가 있을까요? 비행기가 발명되어야 이
문양들이 발견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굳은 믿음과
노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점을 묵상하다보니, 하느님을 알아보고 또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의 비행기는 무엇일까 싶습니다. 기도, 묵상,
성경이나 영적 독서 읽기, 희생과 봉사... 참 많은데 이를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닐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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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목숨 바쳐 섬기는 제자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수, 마태 20,17-28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목숨 바쳐 섬기는 제자의 삶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십자가 여정을 자발적으로 걷기 시작하신 것이지요.
그분께서는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져 조롱 당하고 채찍질 당한 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임을 열두 제자에게
이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딴데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옆자리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수난을 겪어낸 뒤에야 주어질 수 있는
영광의 자리를 맨입으로 차지하려 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그들은
출세하여 명예를 누리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눈이 멀고 귀가 막혀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0,22) 하고 물으십니다. 그분께서 마시려는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따라서 그 잔을 마신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조롱과
모욕과 온갖 고통을 받아들임을 뜻이지요. 그러자 그들은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셔야 할 잔이 무엇인지
모르고, 마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그렇게 답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20,26-27) 사실
예수님 당대의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은 비민주적 전제와
폭정을 일삼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슬러 섬김이
제자의 본분이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삶의 본질은 사랑이요,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또다른 측면을
말씀하십니다. 곧, 진정한 섬김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는"(20,28) 것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섬김으로써 몸값을
치르라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일시적이며 단순한 섬김이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대속적 사랑의 섬김을 보여주시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길을 따르며, 그분의 운명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참 제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그분이
걸으셨던 수난과 죽음의 길에 기꺼이 동참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출세나 권력 행사가 아니라 섬김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더
작아지고 더 낮추어 서로를 섬길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내놓을 줄
알아야겠지요. 자신 전부를 그것도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사랑 없인 불가능할 것입니다.
사실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며 섬기는 제자의 길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의를 고발하고 파멸을 선포한 자신을
죽이려던, 못나고 죄 많은 백성을 끝까지 섬긴 예레미야처럼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겠습니다. 목숨을 바친 사랑의 저항과 죄악의 결정적
폭로를 통해,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길에 동참해야겠습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를 유혹하며 붙드는 저 높은 데서 내려와, 서로를 목숨바쳐
섬기고, 함께 손잡고 불의에 맞섬으로써 다시 일어서는 복된 수난과
부활의 여정이길 소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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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무엇을 원하느냐?"(마태 20,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무엇을 원하느냐?"(마태 20, 21)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결코
만족을 모르는 우리의 부끄럽고 죄스러운 욕심입니다.
사랑할 예수님이 앞에 계셔도 다른
마음을 품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 없는 오른쪽 왼쪽 앞과 뒤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도 작아지고 낮아지려 하지 않기에
예수님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십니다.
섬긴다는 것은 정성들여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섬기시는 예수님께 다시금 묻게됩니다.
가고자 하는 그 길이찾고자 하는 그분이
누군지를 아는 것이 사순시기의 핵심입니다.
교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시간은 섬김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는 고운 마음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모순의 껍질을 벗게하는 가장 아름다운 길은
우리가 서로를 섬기는 길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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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2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2월2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마태 20,17-28
어제는 선교사 파견미사가 있었습니다. 선교사로서의 삶에는 많은
어려움과 도전이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낮선
문화와 만나야 합니다. 몸이 아파도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외로움을 견뎌야 합니다. 저는 작년에 남미의
페루, 과테말라,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습니다. 현지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과 선교 체험을 하는 신학생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잘 지내고 있는 신부님들을 보면서 자랑스러웠습니다.
신학생들도 선교사의 꿈을 키우면서 잘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때로는 격려도 하시고, 걱정도
하셨습니다. 마치 이리 때 가운데 보내는 것 같은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 하나면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선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해 주신 사명입니다. 선교사로 사목을 시작하는
신부님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에덴’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낙원입니다. 사람은
그 낙원에서 살 수 있었는데 교만함과 욕심 때문에 ‘에덴’에서 더
이상은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은 어느 장소가 아닙니다. 에덴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탐욕과 욕망 때문에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못
살게 하는 사람들은 늘 ‘에덴의 동쪽’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며, 양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은 각박하고 힘들어도 늘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이야기 했었습니다. “나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을 하십니다. 아이라는
말을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 주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에덴’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오늘의 복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왕국을 이루시면 한 아들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한 아들은
예수님의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합니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어머니의 생각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식의 성공과 행복을 바라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입니다.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 명예와 권력, 부와 건강에 있다면 그것은 절반의
행복과 성공입니다.
진정한 행복과 성공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희생과
봉사, 겸손과 사랑이 바로 진정한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에덴’에서 살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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