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2일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수도회] 소유에서 사랑의 연대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37,3-4.12-13ㄷ.17ㄹ-28
† 복음 마태 21,33-43.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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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사랑으로 다가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18년 나해 3월2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어떤 강사가 강의를 듣는 청중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매 맞거나 비난이나 욕을 들어야 내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시죠? 솔직히 없지 않습니까? 내 자신이 매를
맞거나 또는 비난이나 욕을 듣게 되면 아무리 내 자신이 틀렸다고 해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나 말을 한 사람을
향해서 적의를 표현하게 되지요. 이 강사는 이렇게 매를 맞거나
비난이나 욕을 들어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고 행동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동의를 했지요.
그러자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누군가는 좀 맞고 비난을 들어야 그
행동을 고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자녀들을 향해서 하는 부모의 행동들이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이웃을 향한 나의 따끔한 말과 행동이 변화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 있게 말하곤 합니다. 스스로는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은 과연 바뀌어 질까요?
이렇게 자신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남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겠다고 하는 모든 폭력성은
무조건 비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지극히 관대한 우리들이기에 이러한 비합리적인 모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못된 소작인들을 보면 우리들은 ‘어떻게 저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연히 자신들이 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폭력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포도밭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모든 폭력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합리화시키고
있었을까요?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내 이웃과 주님께
드리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언제나 다가오십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처럼 모든 것들을 다 내어주는 사랑을 주셨고,
변화를 위해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영원히 이 세상의
삶이 계속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요? 죄에 대해 합리화시키면서
주님의 뜻에서 멀어져만 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주님처럼 우리 역시 사랑으로 다가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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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은 토론 대신 폭력을 사용하고 남들을 설득할 수 없을 때는
침묵을 강요하며 자신의 주장을 칼로 전파한다(주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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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아픔을 못 보는 우리...
2017년, 공관병 갑질 논란으로 사회가 크게 시끄러웠지요. 이 문제를
보면서 제가 군대에 있을 때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 당시에도 언론에
나온 상황과 별 다를 바가 없었거든요. 공관병들은 몸으로 뛰는
육체적인 일은 하지 않았지만, 관사에서 자녀들 과외 그리고 청소나
요리 등의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당시에는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군 복무 중의 중요한
일이고,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으니 훨씬 더 편하게 군 복무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인권의 차원에서 분명히 큰 문제인데도 문제성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러려니’라는 안일한 마음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공관병 제도는 이 문제로 인해 60년 만에
폐지되었지만, 스스로도 많은 반성을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요?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픔만을 바라보니 남의 아픔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이밖에도 많은 아픔들이 세상에서 보입니다. 그
아픔들을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아픔보다 남들이 받아들이는 아픔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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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소유에서 사랑의 연대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2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창세 37,3-28; 마태 21,33-43.45-46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마태 21,38)
소유에서 사랑의 연대로
제1독서에서 야곱은 늘그막에 얻은 요셉을 다른 열명의 그 어느
아들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러자 형들은 요셉을 미워해 죽여버리려고
구덩이에 던져버립니다. 그런데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가 요셉을
구덩이에서 꺼내자, 형들은 요셉을 은전 스무닢에 팔아넘깁니다.
요셉을 향한 형들의 질투심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의 질투심은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소유욕에서 비롯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 명의 형제들이
품었던 소유욕의 개울이 모여 질투의 강을 이루고, 질투의 강물이 한데
모아져 미움과 죽음의 바다를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안에
살아숨쉬던 주님의 자비는 그 모든 것을 녹여 형제들 사이에 사랑의
연대와 화해를 이루게 합니다(창세 45,5.15).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을 믿고 포도 경작을
그들에게 맡깁니다. 수확 철이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매질하고 돌로 쳐죽여버립니다. 끝내는 상속재산을 차지하려고,
주인의 상속자인 죄없는 아들마저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박해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것을
소유하려고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 상속자인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소유는 교만을 부르고, 시기
질투와 미움과 폭력과 살인의 독버섯을 자라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독버섯들을 모두 삼키셨지요. 목숨바쳐 사랑의 연대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곧 가정과 일터, 사회와 자연이 바로
주님의 포도밭입니다. 일상이 바로 주님을 섬기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사랑을 키워가야 하는 포도밭인 셈입니다. 혹시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우리네 포도밭에 시기와 질투, 분노와 증오, 탐욕과 거짓의
독버섯을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유욕은 교만을 불러 하느님과의 단절을 부추깁니다. 그 결과 우리는
물질과 돈의 감옥에 갇히게 되지요. 소유는 우리를 욕망과 비교의 늪에
빠뜨립니다. 소유는 질투와 미움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생명을 없애려
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온 존재를 하느님께 되돌림과
동시에, 사랑으로 반생명적인 악행에 맞서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단절이
아닌 일치를, 죽음이 아닌 생명의 연대를 이루어나가야겠습니다.
우리가 자기것을 챙기면 챙길수록 하느님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형제들처럼 사랑을 소유하려고 질투해서는 안됩니다.
또 소작인들처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들을 내것으로 소유하려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도 '소유없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포도밭인
이 사회와 가정, 공동체에, 모든 것을 되돌리고 나눔으로써, 사랑의
연대를 이루어나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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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마태 21,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2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 21, 38)
봄의 새순이 움트듯 새순과 새순
사이에는 생명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하느님의 땅에서 버젓이 살인이 자행됩니다.
우리의 욕심은 하느님까지도 겨낭하며 이 모든 것을
뒤집어놓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매순간 가장 좋은 것을 빼앗고 죽이는 우리들 욕심입니다.
사순시기는 비뚤어지고 병든 우리 마음을 바로잡는 시간입니다.
존중없는 관계는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경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참다운 기쁨입니다.
가장 먼저 부패되어가는 우리의 마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욕망의 꺼풀을 벗겨내는 길은 생명의 질서가
되시는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생명의 힘을 얻는지를 다시
깨닫는 생명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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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언제나 당당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3월2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마태21,33-43.45-46)
언제나 당당하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그
열매를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하느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할 일을 했으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일꾼은
일꾼입니다. 주인이 되는 꿈을 가질 지언정 주인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 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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