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7일 율법의 완성자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3-07 06:20:35    조회 : 401회    댓글: 0

☆ 2018년 나해 3월7일 [(자)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수도회] 평등과 상호존중을 통한 율법의 완성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신명 4,1. 5-9
† 복음 마태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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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글이나 말로만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2018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너희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1. 5-9

복음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어떤 부모로부터 자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너무 못해서
이번에 꼴찌를 했다는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아이에게 말했더니 아이가 뜻밖의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공부 못하기는 하지만, 꼴찌가 그렇게 부끄러운 거야?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아들 둔 것이 더 나은 것 아냐?”

생각해보니 꼴찌했다는 사실만 부끄러워했지, 아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반성을 할 수 있었답니다. 하긴 어떤 부모는 사고로
일찍 자녀를 잃고 나서 “꼴찌라도 하는 아이가 있었으면 한이
없겠네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공부
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일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강은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
공부도 잘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요. 노력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요. 그러나 공부만 잘 하는 아이보다 공부만 못 하는 아이가
더 훌륭한 아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모범을
줄 수도 있고, 또 나쁜 모범을 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으로 좋은 모범을 보인다면, 자녀 역시 책임감을 가지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집니다. 그리고
중요한 가치를 쫓아서 사는 부모의 모범이 자녀 역시 중요한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는 좋은 모범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좋은 모범보다는 내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다보니 세상은 더욱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것을 폐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자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나
예언사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인 사랑이 세상 밖으로 실천되는 것이 더 중요했고 이로써
율법이나 예언서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글이나 말로만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바로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행동이 담긴 모범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 완성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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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 같지 않은 지금.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것은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되었다. 산다는 게 내 맘처럼 되지만은 않는 것. 그렇다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일 테니까(강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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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병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맑고 화창한 날에
병원으로 향할 때는 괜히 마음이 더 슬퍼지기도 합니다. 병원에 가면
죄다 아픈 사람뿐이거든요. 많은 사람이 병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또 많은 이는 아주 긴 시간을 병과 싸우면서 병실에
누워있기도 합니다.

이 모습들을 보면 절대로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저 역시 아프다는 표시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괜히 우울한 마음이 생긴 것일까요?

그런데 이렇게 병중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밝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오래 살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또한 모범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도 많이 아프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일반적인
생각들을 깨뜨리는 모습으로 좋은 모범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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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평등과 상호존중을 통한 율법의 완성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7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마태 5,17-19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평등과 상호존중을 통한 율법의 완성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모든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작은 계명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5,17-19)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사십년 동안 광야를 떠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고 가르치시며 지켜주십니다. 십계명과 율법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표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삶의 법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하느님 앞에 의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키기 쉬운 율법들을 강조하고,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상관없는 세부규율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껍데기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예수 시대에는 율법이 기득권을
옹호하고 정당화하여, 백성들을 옭아매고 신분 차별을 조장하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이 그 근본정신을 상실한 채 틀과 형식에 쏠려버린
것이었지요. 문자에 갇혀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망각해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이끄는 길이었던 율법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삶으로
율법의 정신을 되살리고 완성하려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 여정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어떻게 율법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22,37.39). 율법의 최종목적도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헌신과 섬김의 정신으로 율법을 살아낼 때 율법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 본래의 정신인 의로움과 사랑이 회복될 때 율법은
완성됩니다.

평등과 상호존중과 정의가 무시된 채 사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요즈음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미투운동은 사랑의 완성과는
무관한 왜곡되고 오염된 사랑의 질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들은
아랫사람 특히 여성을 자신의 성적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를 악용하여 성을 권력의 도구로 삼아 저항할 수
없는 약자를 유린했습니다.

성은 결코 누군가의 도구일 수 없는 고귀한 인격의 표현입니다. 성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치와 인격적인 통합을 지향합니다. 사랑으로
일치함으로써 신의를 지키며 서로에게 헌신하게 되지요. 이렇듯 서로의
성을 사랑으로 존중해줌으로써 인간적 품위와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비롯된 그릇된 의식과 생활양식을
평등의 문화로 바꿔가야겠지요.

사랑이 빠진 교회나 각종 법규, 제도는 제정신을 잃고 비틀거리는
주정뱅이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평등과 공정과
상호존중이 생략된 언행은 율법을 파괴할 뿐입니다. 성추행과 성폭력이
일상화 되어버린 슬픈 현실을 직시하며, 사랑의 완성을 위한 회개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돈도 지식도 사회적 지위도 서로를 섬기는 도구일
뿐임을 기억하며, 평등의 터 위에서 고귀한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해나가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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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소죄?|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7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신명기 4,1. 5-9, 마태오 5,17-19

소죄?

제가 유학 처음 나와서 윤리 시험을 볼 때였습니다.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죄가 되려면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아야하고 또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어야하며 그 죄를 짓는 대상이
무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할 때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쉽게 질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훔쳤어, 그게 대죄야 소죄야?”
저는 그 때도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어떤 사람이 100원을 훔쳤다면 그건 대죄야,
소죄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놀라서 아주 작은 것을 훔쳤는데 어떻게
대죄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돌하게, “만약 교수님께서 100원을 훔쳤다면 대죄에요,
소죄에요?”라고 물었더니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하시며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죄는 지으면 안 되지만 소죄는
지어도 괜찮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것일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일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슨 큰일을 해 드려야
그 분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들을 더 좋아하십니다.

소화 데레사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어떤 큰일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지 않는다든지, 기침하는 수녀님의 옆에 앉아
그것을 참아낸다든지, 빨래할 때 물이 튀는 것을 피하지 않고
맞는다든지 하는 작은 희생들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희생들이
하느님께는 성당을 몇 개 짓는 것보다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거나 어기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난 당하실 때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혀보라고 놀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얼굴에 오물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 분께 하느님의 아들이면
내려와보라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과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만 소리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괴롭히는 이들보다 많은 은혜를 받고도
예수님을 배신한 군중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어떤 때는 작은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잘못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큰
잘못보다 자신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영성지도를 받다보니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엄격하시고 또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자상하신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사실 극단적은 것은
다 좋지 않습니다. 특히 자상한 모습으로 “그런 것들은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더 조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작은 것까지도
다 지키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신자분들이 많은 선물을 주시지만 받는
사람은 그 물질적 가치로 받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할머니의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보기엔 크지만 속은 비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을 크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느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의
작은 일들을 작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에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소화 데레사처럼 작은 것을
크게 볼 줄 아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오늘 하루도 일상의 작은 봉헌을
주님께 드리도록 합시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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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3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3월7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마태 5,17-19

꼭 읽어야 하는데 읽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약을 사면 설명서가
있습니다. 저는 거의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자동차를 사면 설명서가
있습니다. 역시 거의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전자제품을 사면 대부분
설명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들도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 문제가 되면 잘 아는 분들에게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고, 설명서에 있는 대로 해보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음식점에서 뛰어 다녀도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기차 안에서
떠들어도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에게 아이는 귀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기가 죽을까봐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웃들도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면서 참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지켜야할
규범과 예의를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어려서부터 참는 것을 배운다면,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면 아이는 자라서 남을 도울 수 있고, 힘들 때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 권위가 있는 사람, 전문가들이 잘못을 해도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쌓아온 업적, 인맥, 권력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권위와 능력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도, 예술인도, 문학인도, 학자도 예외가 없습니다. 외적인 능력과
권위를 담아낼 내적인 성찰과 영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서 주보를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마당의 쓰레기를
치우고,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고, 봉고차를 운전하고, 장례가 나면
연도를 가는 사제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제들에게 ‘신부님은
그런 거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제들에게 ‘잘 하셨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하고,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고, 고백성사를 힘들어하고, 미사 시간에 늦는
사제들에게는 ‘신부님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제를 사랑하고, 사제를 위하는 것입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설계도를 따라서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도 도면에 따라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약을
만드는 사람도 약을 만드는 공정에 따라서 약을 만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법’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설계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 이 계명들 중에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면서 부부싸움을 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교통신호를
무시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산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자녀들을
소유물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승차권을 사지도 않고 버스에
타려고 하는 무임승차입니다. 율법과 계명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실행하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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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율법의 완성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3월7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마태5,17-19)

율법의 완성자

시골 본당 신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성당으로
가고 있는데 앞에 트럭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왕복 1차선 길에서
얼마나 천천히 가던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추월해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속도를 내어 추월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경찰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면허증을 주면서 “죄송합니다.”하였더니 그분이
“신부님이시네요! 바쁘신가 보죠?” 하였습니다. 속이 상해서 “제가
잘못하였으니 딱지나 끊으시지요!” 말했더니 “그냥 가십시오.
다음부터는 천천히 다니십시오.” 하며 친절하게 보내주었습니다. 

다음날이었습니다. 지역 관할 경찰간부 소양교육에 제가 강사로 초빙된
날입니다.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7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전날의 일을 서두로 꺼냈습니다. “제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보내주셔서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정말 좋은 말을 하기는
쉽지만 말 한대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가
잘못을 범하거든 앞으로는 꼭 벌점을 주십시오!” 한바탕 웃고 나서야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대로 행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지킨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챙기는 모범을 보여야겠습니다. 어떤 모임을 가보면 과속을
한 것이나 음주운전을 한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과연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시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규정에 담긴 정신과 의미, 가르침은 세월의 흐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여러분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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