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9일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수도회] 우리가 연주해야 할 사랑의 이중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호세 14,2-10
† 복음 마르 12,28ㄴ-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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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이제는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2018년 나해 3월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ㄴ-34
요즘에는 사진을 찍는 것이 하나의 일상이 된 것 같습니다. 휴대전화를
통해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사진 실력을 뽐내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역시 사진기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피가 큰 사진기를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이용해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주도에 갔다가 표선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흔한 화랑 중의 하나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김영갑 작가의 삶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85년 제주도에 들어온 뒤에 가난함과 고독을 살면서 제주도의
자연풍경을 소재로 한 수많은 사진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에 걸린 것입니다. 근육이 점점
경직되는 상황에서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으면서 표선에 자신의
전시장인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직접 꾸며 운영하다가 2005년에
삶을 마쳤습니다.
전에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병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이 분을 통해서 잘 알게 되었지요. 온 몸의 근육이
굳어버리는 병, 최후에는 심장을 감싸고 있는 근육까지 굳어버려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죽음의 직전까지 얼마나
괴로움에 시달리는지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김영갑 작가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이 그냥 일상
안에서 휴대전화로 찍는 사진과 다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자기 인생을 사진에 모두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참
많은 것들에 신경을 씁니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고
하면서 절대로 어디 하나에 집중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김영갑
작가는 오로지 사진에만 집중하고 있었지요.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김영갑 작가의 삶과 사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도 상위권에 주님이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모든 것들에 다 신경 쓰면서 주님은 제일 뒤에 집중해야 할
분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대답하시지요. 결국은 주님을 첫째 자리에 놓으면서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율법학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얼마나 가까이에 있을까요? 이것저것에 신경
쓰면서 주님께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점점 더
멀리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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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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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자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것처럼 느껴지고 무엇 하나 우리의 예상과 맞는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확실성은 언제나 커다란 변화를 암시하는 전조라고 합니다. 변화에는
늘 혼란과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사랑을 품고 있는
인간의 능력을 믿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을 불신하고,
거부하고, 비난하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많은 이들은 제대로 된 안내자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안내자가 없음을 한탄하고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을
던집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그러한 안내자가 된다면 어떨까요?
가족 안에서, 직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밖에 나의 삶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는 안내자가 스스로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안내자가 많아질수록 세상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남에게 책임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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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우리가 연주해야 할 사랑의 이중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9일 사순 제3주간 금, 마르 12,28ㄴ-34
“주 너의 하느님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31)
우리가 연주해야 할 사랑의 이중주
오늘 복음은 유다 제사의식과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고민하던, 1세기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답변입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를 인용하시며 답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0-3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똑같이 중요하며, 서로 다른
현실이 아님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뿐입니다. 하나인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하여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두지 않고 그분에게서 비롯하지 않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웃사랑으로 실행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런 사랑은 자기만족적인 것에 머물 뿐입니다.
한편 이웃사랑은 다시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그분 사랑의 샘물을 마시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방향, 곧 하느님께 향하지 않는 사랑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멈춰버리면, 사랑이 아닌 관념의
유희에 그쳐 버립니다. 또한 우리에게서 멈춰버리면 거룩한 친교나
성사적 만남이 아닌 에로스적 사랑으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강물이 하느님과 이웃과 피조물을 향하여
영원토록 흐르게 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십니다(12,30). 오직
사랑에 집중하여, 자신의 모두를 쏟아부어 주님을 사랑하라
이르십니다. 한마디로 내 존재 자체를 있게 하신 분께 자신 전부를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우상에서 눈을 떼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곧 자신을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듯 '극진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듯이 이웃을 관심 밖으로 내몰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자신만은 늘 생생하게 의식하듯이, 관심을 갖고 이웃을 바라보고
의식하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어떤
순간에도 함께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타자중심의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도 잘
압니다.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희생과 항구한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다는 율법학자를 칭찬하시며, 하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십니다. 참 행복의 문은 제사의식이 아니라 항구한
희생과 정의와 평화를 향한 사랑의 투신으로만 열린다는 뜻이겠지요.
우리 모두 사랑의 으뜸 계명을 살아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에 하느님의 선과 의로움과 평화를 실현함으로써,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랑의 이중주를 연주해야겠습니다. 오늘 다시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그 어떤 기도나
행동도 거짓임을 자각했으면 합니다.
주님, 아버지의 사랑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 사이에서도 울려퍼지게
해주소서. 참 사랑의 이중주가 이 땅에 영원히 울려퍼지도록,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불평등과 불의 앞에 '아니오'를 말하는 행동하는
신앙으로, 당신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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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12,28-34: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 이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계명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라고 대답해 주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고 하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의 주님께서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 선행을 실천한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자비를 가로막는 판단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아야 한다. 자비는 모든 번제물괴 희생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말씀을,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간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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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3월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지난 평창 올림픽이 시작되면서 북한에서 특사가 내려왔습니다. 남과
북은 단일팀을 구성했고, 공동으로 입장을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예술단이 왔고, 응원단이 왔습니다. 외신은 평창 올림픽이
성공적이었다고 하였고, 남과 북이 함께 입장하는 것이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도 체육행사에는 남과 북이 함께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남한에서 북한으로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봄이
오면 얼음이 녹듯이 특사의 파견으로 막혔던 대화의 통로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강합니다.’
공간은 유한하지만 시간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간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담을 만들고, 서로 싸우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결국 짧은 시간 공간을 차지하고 떠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 집착하기 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분쟁과 대립보다는 대화와 협력이 더 많은 결실을 맺기
마련입이다.’ 교황님께서는 다른 종교인들을 만나셨고, 그리고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함께 논의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는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놓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기러기 엄마, 아빠가 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기도 합니다.
좋은 일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건강도, 사랑스러운 자녀들도 온전히 나를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나를
온전히 채우는 것은 나를 만드신 분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나를 만드신
분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힘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시리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부, 권력, 명예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양다리를 걸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나의 희생과 나의 봉사는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보다는 행복해지기를 먼저
원하곤 합니다.
‘이제 나는 아시리아(돈, 명예, 권력)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온 마음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전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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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3월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마르12,28-34)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일은 예수님시대 전후에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교에는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 참조 : 신명6,4-5)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참조: 레위19,18).는
사랑의 이중계명은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에 대하여 슬기롭게 말하고 동의한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천상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실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요, 알고만 있다면 멀리 있지 않은 밖이라는
사실입니다. 운동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번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나무에
오른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언하셨고
율법학자에게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감히 예수님을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변화된 행동을 보였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요한4,1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2,17). 그러므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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