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 하느님처럼 자비, 사랑, 정의롭게 되는 것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3-11 06:03:19    조회 : 406회    댓글: 0

☆ 2018년 나해 3월11일 [(자) 사순 제4주일]

[수도회] 사랑을 바라보며 빛을 밝히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역대 36,14-16.19-23
○ 제2독서 에페 2,4-10
† 복음 요한 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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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희망의 빛은 반드시 있고 또 이 빛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2018년 나해 3월11일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와 해방으로 주님의 분노와 자비가 드러난다.>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36,14-16.19-23

제2독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4-10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4-21

제가 있는 갑곶순교성지에는 꽃나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봄이라
말하는 3~4월에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을 볼 수 있습니다. 매화를
시작으로 목련,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영산홍, 벚나무, 그 밖에도
많은 야생화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제가 제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벚꽃입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로 제가 처음 성지에 와서 처음으로 땀 흘려서 심은
것이 바로 벚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심고 키운 나무 중에서 제대로 자라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제 손만 타면 시들면서 죽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 벚나무만큼은 갑곶에 와서 처음 심는 것이었기에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더 정성을 쏟고 관심을 가졌던 이유였지요. 그런데 저의
염려와 달리 무럭무럭 잘 자랐고, 4월이 되자 드디어 꽃을 피웠습니다.
다른 꽃들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리고 벚꽃이 질 때에는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직접 심고 키운 것이기에, 더군다나 특별한 정성과 사랑이
들어갔기 때문에 특별한 정이 생긴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당신이 직접 만들고 키우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보실 것 같습니까? 왜 그렇게 큰 사랑을 주시는지, 그래서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우리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에페 2,10).

이렇게 귀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독사에게
물렸을 때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뱀을 봐야 살아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가 용서되는
치유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가져다주는 죄를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요한 3,19 참조).

이렇게 당신 곁을 떠나는 사람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실까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모습에 “제발 나를 좀 봐 다오.”라고 안타까운 탄성을
지르시는 것만 같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칙령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장면을 봅니다. 유배의 고통에서 해방되던 날,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달았습니다. 이 해방의 기쁨을 지금
우리들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죄로부터의 해방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큰
표징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이제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악행이 아닌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에페 2,10 참조).

‘바라봄’에는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아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자신이 있는
곳이 어두운 감옥 철창 같이 캄캄한 곳이라도 희망의 빛은 반드시
있고 또 이 빛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빛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시기도 벌써 4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남은 사순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여전히 빛이 아닌 어둠만을 바라보고 또 이 어둠을
향해 의미 없이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슬픈 눈이
떠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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꿋꿋이 내 길을 계속 나아갔을 때, 나는 내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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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여섯 가지입니다.

1. 내가 진실로 원하고 또 하고 싶은 것인가?
2.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가?
3. 결과 및 평가를 직면할 용기가 있는가?
4. 그 결과에 대해 슬퍼할 수 있는가?
5. 배움으로써 성장시킬 지혜가 있는가?
6. 포기할 것들에 대해 열려 있는가?

어떻습니까? 그래도 결정을 해야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닐까요? 무조건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짖어대는 개가
생각납니다. 겉으로는 시끄럽게 짖어대면서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 꼬리를 내리고 도망갑니다.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위의 여섯 가지를 따져보십시오. 분명히 바른 결정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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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사랑을 바라보며 빛을 밝히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11일 사순 제4주일
2역대 36,14-16.19-23; 에페 2,4-10; 요한 3,14-21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사랑을 바라보며 빛을 밝히는 삶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지도 사제와 백성들은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하여 타올라 그들은 처참한 꼴을 당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그들을 유배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자비로 그들을 다시 품어주시어, 또다시 사랑의 길을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 2,4)

예수님의 십자가는 광야의 구리뱀처럼(민수 21,4-9) 구원의
징표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과 헌신의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목숨바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것은,
상처를 입고 타락의 밑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과 생명의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랑을 회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살려나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사랑과 정의 때문에 죽어가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물러 사랑을 실천하는 이는 빛 가운데 머뭅니다. 그런데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자기가 한 일을 감추려고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고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빛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악을 저지르며 어둠 안에 머무는
사람은 심판을 자초할 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교회의 목자들과
봉사직무를 맡은 이들의 위선과 삐뚤어진 권위행사, 고귀한 성을
상품화하고 유희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폭력과 파렴치함, 기업인들의
끝없는 탐욕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런 것들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을 이룬 사랑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삶의 중심에 허망한 우상과 인간을 피폐케 하는 독버섯을 키우는데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짓을 덮으려고 더 큰 어둠의
동굴을 파고 또 파는 어리석음과 죄악을 되풀이하는 까닭입니다.
민족의 평화와 국민들이 더 인간답게 살 길을 고민하기보다 유치한
어깃장 놀음에 팔린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어둠의 터널을 파며 악취나는 시체가 되어갑니다.

우리 모두 어둠보다 빛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생명을 빛으로 받아들이며, 그 빛 안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이 사순절은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사랑의 진리를
배워 실천함으로써,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진리를 감춰버리는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사랑과 정의의 실천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빛을 내 안에 환히 밝히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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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11일 사순 제4주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생명은 아픈 것입니다.
사랑도 아픈 것입니다.
아프니 예수님을 찾게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프다 말씀하십니다.
모든 존재는 아픔을 통해 십자가를 알게됩니다.

피할 수 없는 십자가가 우리의 어둠까지 밝힙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들어 올려지는 여정까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구원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했던
어리석음을 이제야 십자가를 통해 내려놓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아픔을 겪는 것도 사랑이며 은총입니다.
십자가로 사랑의 영역이 확장됩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우리 삶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고통으로 어둠은 비로소
빛이 되고 사람은 비로소 영원한 생명이 될 것입니다.

구원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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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4주일

2018년 나해 3월11일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사순특강을 다니고 있습니다. 부족한 제게 강의를
부탁하시는 본당신부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도 주어진 일이기에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교우 분들께서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고,
신부님들께서도 저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몸은 조금 힘이
들지만 제가 필요한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웃이 나에게
잘못을 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작지 않았습니다. 채찍을
맞으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가시관을 쓰셨고,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하셨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했고,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목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회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쁨이 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성직자들이 거룩함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대화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아픈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네 번째는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봄누에는 죽기까지 실뽑기를 멈추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야만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작심삼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에 하지 머’
라고 미루던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정들었던 땅을 떠나야했고,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다섯 번째는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요셉 성인께서도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했던 마음을
바꾸었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여섯 번째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십자가 위에 있던 죄인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의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지난날의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유다는 똑 같이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절망하였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주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일곱 번째는 “어머니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당시의
어머니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에게 제자들을
부탁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모님을 부탁하였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도 발현하셔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모님께 공경과 사랑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하느님처럼 사랑하며, 하느님처럼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나약함과 우리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은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께서도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과 베로니카 성
녀입니다. 시몬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갔습니다. 주변을 보면 자신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이웃의
십자가를 말없이 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로니카 성녀가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렸듯이 주변을 보면 이웃의
고통에 함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봄이 오면 예쁜 꽃들이 피듯이
주변을 보면 사랑의 꽃을, 희망의 꽃을 피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주님께서도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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