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일 하느님의 어린양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1-03 07:47:44    조회 : 458회    댓글: 1

☆ 2018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수도회] 의롭고 순결하며 희생하는 제자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요한 2,29-3,6
† 복음 요한 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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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요한
사도의 고백은 놀랍습니다. 율법과 계약에 묶인 유다인들의 종교관을
넘어 의로우신 하느님을 깨닫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다는
확신은 그리스도인이 지닌 특권이자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을 품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는 본디 현재에 얽매여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헛된 희망의
굴레에 갇혀 불만과 불평, 이기심과 탐욕에 빠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희망하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이나 슬픔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현실의 축복이나 영광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희생하고 나눌 줄 알며, 소유와 경쟁을 위하여 타인을
이기적 욕망의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기다렸던 메시아를 만났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시는 순결하신 분이시며,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온전히 바치실 어린양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밝혀진 하느님의 사랑에 있음을 세례자 요한은 깨닫고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에 살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한순간도 우리의 욕망을 잠들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보속의 삶, 자비와 사랑의 삶에 맛들일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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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하느님 아버지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2018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9-3,6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인터넷에 화제가 된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글쎄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완전히 박살 나 있는 상태인데, 운전수로 보이는 사람이 풀밭에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교통사고가
나면 대부분이 망연자실합니다. 만약 상대가 있다면 삿대질이나
실랑이를 벌이게 되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별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나 봅니다.

이렇게 낙천적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행복한 것 같고,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주위에 있는
가족이나 동료들은 그 모습에 답답해하면서 속이 터진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반대로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은 어떨까요? 그 주변 사람들은 조금 편할 수 있습니다.
알아서 그 모든 것을 하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너무나 세심하고
꼼꼼해서 피곤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어떤 모습이 필요한 것일까요? 적당하게 낙천적이고, 적당하게 꼼꼼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적당한 것은 과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이 아닌 다음에야 그 적당함을 정확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조금 더 쉽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인상 깊은 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께서
횡단보도를 건너가십니다. 빠르게 걷지 못하자, 한 아주머니께서
“할아버지, 제가 도와드릴게요.”라고 하면서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십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한 아가씨가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걷습니다.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서 그냥 걸어갈 뿐입니다.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넌
할아버지는 이 아가씨를 향해 진심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고마워요.”
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이 아가씨가 한 것은 그냥 걸었을 뿐이지만, 할아버지는 함께
걸어가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감사함을 느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면서 살아가면 어떨까요? 그런데 주님께
대해서는 어떤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올림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도 섰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주님을 드러내고 증언을 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 기쁨과 행복의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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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사이사이 기쁨의 순간들이 있었다. 하나의 기쁨이 있어 아홉쯤의
슬픔을 견딜 수 있었다(정연복). 

~~~~~ ~~~~~ ~~~~~

‘엿’이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통적인 우리나라 국민의 간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아주 어렸을 때, 고물을 팔아서 엿으로
바꿔먹던 기억이 나기도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엿’이 욕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소위 ‘엿 먹어라!’라는 표현으로, 이 말을
듣고서 환하게 웃으면서 “우와 맛있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이 욕의 의미로 변한 것은 1964년 12월 7일에 있었던 서울
중학교 입시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과목 18번
문제가 “엿을 만들기 위해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을 고르라.”
라는 것이었고, 1) 디아스타제, 2) 꿀, 3) 녹말, 4) 무즙 이 보기로
제시되었습니다. 출제 측에서 요구했던 정답은 1번 디아스타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합격한 학생의 부모들이 실제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서 문교부와 시교육청을 찾아가 던지면서 이렇게 말하면서
항의했다고 하지요.

“엿 먹어보라!!”

분명히 좋고 맛있는 음식인데, 이렇게 나쁜 감정이 실리게 되면 ‘욕’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것들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실려서 나쁜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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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의롭고 순결하며 희생하는 제자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요한 1,29-34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

의롭고 순결하며 희생하는 제자의 삶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1,31).
그러나 그는 계시를 통해 구세주를 알아보고(1,34), 구세주 오심의 그
깊은 뜻을 미리 알려줍니다. 그는 구세주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도록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1,31),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외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 죄로 인하여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결과를 없애려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해방되고, 죄 없는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죄를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기에 그분
안에 머무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1요한 3,5-6).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은 악을 없애려는 일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죄의 뿌리를 완전하게 없애고 갈라진 틈을 온전히 회복하여
창조의 상태가 되도록 하는 새로운 변화의 계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는 "의로운 일을 실천하고"(1요한 2,29) 그분을 뵙게 되리라는
희망 속에 자신을 순결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3,2-3).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새로움으로 돌아가려면 애착과 욕망을
내려놓고 순수본질을 회복해야 힐 덧입니다. 자신에게서 어둠과 속박과
죄를 거두어주시는 예수님을 온 인격으로 만나지 못한다면 온전한
인간이라 할 수 없겠지요. 무엇을 하든 영이요 생명이며 사랑이신
그분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자신도 그렇게 변형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을 보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양'은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려고 희생될 신약의 ‘해방절
양’을 상징합니다(19,36; 탈출 12,11) 이는 메시아로서 당할 수난을
뜻하는 '야훼의 고통받는 종'(이사 52,13-53,12)을 표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호칭은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거룩한 십자가상 사건의 의미를
상기시켜줍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를
가져다주시려고 희생되신 어린양이십니다. 그분은 희생양이실 뿐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양’, 곧 하느님의 권한으로 직접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오심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희생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신 분이 사랑에서 멀어져 순수함을 잃고
어둠속을 헤매는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되신 것입니다. 우리네 삶 어느
것도 하느님 사랑의 결과 아닌 것이 없고, 다른 이들의 희생과 도움
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지요.

우리도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주님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의를 행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희생으로 오늘의 어린양이 되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내도록
해야겠습니다. 죽음을 거슬러 생명을 일으켜 세우고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것은 ‘조건 없는 내어줌’과 십자가의 희생 뿐이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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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히
 
2018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요한 1,29-34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히

저희 수도자들은 회헌회칙의 규정에 따라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저희 남자 수도자들은 대체로 한 달에 한번 성사를
보는데 비해, 수녀님들은 보름에 한번 꼴로 성사를 보기도 합니다. 그
누군가에게 내 내면의 수치스런 부분, 어둠과 상처를 열어보인다는
것,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자주 하다보면 고해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은혜로운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틈만 나면 고해성사를 보면서 아주 작은 부분도
가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틈만 나면 죄를 짓는 사람들, 삶 자체가
거짓이요 죄투성이인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다.’고
외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죄의식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죄의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의 ‘영혼의 일기’를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신학생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에
걸쳐 매주 한번 씩 꼭꼭 고해성사를 보셨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고백하나이다. 저는 제 일생동안 매주 고해성사에
충실해 왔습니다. 잘 준비된 고해성사는 언제나 성화의 길에 있어서는
확고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현재
정기적으로 바티칸 대성당 내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보고 계십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참으로 묘한 존재입니다. 어제 천국을 살았지만, 오늘
지옥에 떨어져 있습니다. 어제 천사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 사탄의
얼굴로 돌변해 있습니다. 어제 하느님 의 충만한 사랑과 배려 속에
살았는데, 오늘 낙원에서 쫒겨난 아담과 하와의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한없이 나약한 인간 존재로써, 어쩔 수
없이 달고 살아가는 죄(罪)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때로 주님안에 딱 붙어있기도 하지만, 언제든 그분으로부터 멀어질
가능성도 함께 지닌 존재입니다.

죄앞에서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한 좌절감과 중압감, 우울함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털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죽음의 상태에서 재빠르게 주님 자비로 인한 은총과 기쁨의
상태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그 옛날 바오로 사도도 한때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대 죄인, 그리스도
신자들을 체포하고 고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낙마체험 이후, 재빠르게
죄에서 벗어나 주님의 은총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신앙 여정에
있어서 중요한 측면은 처절하고도 진지한 회심, 그리고 신속한
회심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한 문장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 은총도 풍성히 내립니다.” 그렇다고
주님 은총을 많이 받기 위해 틈만 나면 죄를 지으라는 가르침이 절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서 우리가 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를 능가한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신속히 죄에서 벗어나 주님 은총 속으로 들어오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구원력은 힘차기 때문에 그 상처 안에 머무는 이는
안전합니다. 세상이 으르렁대고 육신이 나를 압박하여 마귀가 올가미를
놓는다 해도 나는 단단한 바위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내가 큰 죄를 범하여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해도 주님의
상처를 생각하면 실망에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해줄 수 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그런 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도
강력하고 효과적인 치료제를 생각한다면 질병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나를 떨게 할 그런 질병은 없습니다.”(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풍부히 내린다고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해드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주님의 머리 위해 또 다른 가시관을 얹어드리는 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주님의 고귀한 몸에 또 다른 채찍 자국을 더해드리는 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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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3일 주님 공현전 수요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기위해서는 점점 우리가 작아져야합니다.
작아져야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따를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맑을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쉴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작아지는 일이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맞이하는 일입니다.
작아지는 일이 구원의 절절한 첫시작이 됩니다.
작아져야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되는 기쁨을 맛보라고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봅니다.
어린양이 되지않고서는 생명의 길을 밝힐 수 없습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한 해를 우리에게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을 전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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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3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29절), 희생적인 구원자이시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32절)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절)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구체적으로 더
깊게 주님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께 대한 이 증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늘 독서인 1요한 3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하느님의 영을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시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세례로 사람들에게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한다면,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1요한 3,5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반복 불가능한 구원의 업적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5a), 죄 없으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고(5b), 그분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6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전 인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개념이다.

초기 교회에서는 대속(代贖)의 개념을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의
노래에 연결시켰고(이사 52,13-53,12), 이 노래의 메시아적 주석이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여기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의 기원으로 추구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종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입을 열지 않는 어린양(이사 53,7)에 비유하면서,
하느님의 종이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는” 것으로 말한다. 

이 ‘지고 가시다’(phérein, LXX)는 요한 1,29와 1요한 3,5의 죄를
‘없애다’(aírein)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없애다’라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자신에게 지우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르 8,34의 십자가 참조). 즉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종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어린양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증언한다. 이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면서 29절 이하의 말씀에
대해 그의 그리스도론적인 고백을 확대하고 있다. 즉 거룩하시고 먼저
계셨던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탁월하게 구원의 선물 즉
성령을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 예수께 대한
증언을 수렴하고 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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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사용하고,
생각을 하고, 죽음 이후를 성찰하고, 제도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문화와 문명을 만들고, 예술을 통하여 삶을 표현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들과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욕망,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이기심, 나태, 폭력, 전쟁, 정복, 살인
등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감정과 욕망은 공들게 쌓은 탑을
무너트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한없는 비참함으로
끌어내리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가진 나약함입니다.  

인류의 성인들은 이런 인간의 비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정진하였습니다. 인간 비참함의
원인은 ‘집착’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 비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걸어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비참함은 하느님이 모상을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교만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벗어나고, 교만함이 만들어낸 결과가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구원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나서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는 죄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지난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이룩한 업적과 조직이 사라질 수도 있지만
진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했던 모든 일들을 정리해야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에게 옆집의 물건들이 더
좋다고 안내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진실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가졌던
모든 권위와 존경을 스스로 내려놓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 보다는
하느님의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침묵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나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기보다,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자신이
행한 강론을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또한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전해 주어야 하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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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하느님의 어린양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3일 주님공현 전 수요일 (요한1,29-34)

하느님의 어린 양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다양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도 그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하며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질 희생양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뽑아 세운 종이며 하느님의 영을 받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종이며…공정을 세우도록 선택된
사람이며 ….민족들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42장).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을 주님의 종입니다. 학대 받고 천대받았지만 입 한 번 열지도 않고
참으며 온갖 굴욕을 받을 종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할 주님의 종입니다(이사53장).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 양’은 고통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뭇 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을 꺾고 승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록7장17은 이렇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어린 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
(묵시17,14).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나 큰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건드리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가 미사 때 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할 때 좀 더 진중하고 감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우리
이웃에게 어린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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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작성자: 안나님     작성일시:

주님께서 보시는 우리는 어떨까요?
주님의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지요?
늘 주님의 은총안에서 안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