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10일 수요일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수도회] 치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사랑의 손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3,1-10.19-20
† 복음 마르 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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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병은 몸이 제 역할을 못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 몸의 기능들을
방해하는 것은 몸에 있는 병균들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마음의 상처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병이 하느님의 생명과 대항하는 악한 영,
곧 마귀의 힘 때문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병자들을 치유할 때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내쫓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열병은 일종의 ‘화병’이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 악한
영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곧 치유의 과정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치유를 청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신체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십니다. 그들이 병으로 겪고 있는
소외감과 상처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관계의
상실에서 얻은 정신병과도 같은 것입니다.
현대인은 마음이 혼란하면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침잠하는 피정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의 욕구를 즐깁니다. 참된
쉼은 실컷 먹고, 마시고, 영상물이나 오락에 빠져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외딴 곳에서’ 하느님과 만나 기도하며 참된 나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칭송보다는, 하느님과
누리는 자유를 찾으셨습니다. 마귀를 내쫓을 수 있는 힘도 바로 이
침묵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사람들의 목소리와 우리 양심을 통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세 번째 듣고 자신을
‘당신의 종’으로 지칭하고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도대체 주님의 부르심을 몇 번이나 외면한 뒤 진짜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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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함께
2018년 나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3,1-10.19-20
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9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고작 1.5%만 다르고, 개, 돼지, 고양이 같은
동물 역시 인간과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 유일한 차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인간은 자기 삶을 스스로
변화시키고 자신의 공간을 가꾸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또한 내 주변을 가꾸어 나가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종종 변화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모습입니다. 내 주변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것 역시
인간의 삶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성과 감정을
주셨는지를 떠올려보십시오. 따라서 스스로가 끊임없이 변화를 위해
노력할 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꼬마 아이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교황님! 성체조배를 하면 저는
언제나 잡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 교황님께서는 “괜찮다.
그래도 그분은 여전히 너를 바라보고 계시니까.”라고 답변하셨다고
합니다.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께서는 “주님은 졸고 있는 사람도
사랑하신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원하시고 이들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열병은
‘화병’이라고도 하지요. 이는 육체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고
고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몬의
장모는 열병이 사라지자 곧바로 일어나 예수님과 그 일행을 위해 시중을
드는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육체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치유해주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기도하려는 마음입니다. 주님 스스로가 그
모범을 직접 보여주시지요. 그래서 전교여행으로 피곤한 상태에서도 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사탄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이 기도를 통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변화를 통해 참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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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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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언어는?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 ‘언어’라는 것을 사용할 때는 딱 두 경우라고
합니다. 그 하나는 창조할 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빛이 생겨라.”
하니까 빛이 생기지요. 이런 식으로 창조할 때에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치유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일어나 걸어가라.”, “눈을 떠라.”라는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언어란 바로 창조와 치유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는 어떠했을까요? 남을 비방하고 상처주고
또 공격하는데 언어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언어는
새로운 힘을 주는 창조의 역할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치유의 역할이
제 역할임을 기억해 보았으면 합니다.
제대로 된 언어의 사용, 이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진정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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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치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사랑의 손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수, 마르 1,29-39
“예수님께서는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4)
치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사랑의 손길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마르 1,30). 그분께서는 치유행위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신 것입니다. 치유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요 지속적인 재창조 행위입니다. 그분의 치유로
해방의 기쁨을 맛보고, 부서지고 상처 난 모든 사람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해방시켜주는 것이 율법이나
관습보다 중요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생명을
소중히 여기시어 치유해주심으로써 자유를 선사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하느님께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것들을
치워주십니다.
시몬의 장모가 치유의 기쁨 속에 주님께 시중드는(1,31) 모습을 본
사람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 희망의 태양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해가
저물어 안식일이 끝나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옵니다.”(1,32) 치유와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이 온전한
해방의 길로 인도하시는 해방의 샘을 찾아온 것입니다.
무엇이 시몬의 장모와 그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 것일까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든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늦은 밤에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데려온’ 많은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1,34). 그 극진한 사랑에 그들을
묶고 있던 모든 것들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가로막고 있던 온갖 장벽이
무너져 내린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자유와 해방의 샘물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함께 하시며’, 병을 고쳐주셨지요.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하지 않으시고 따뜻한 애정으로 품어주셨습니다. 맺힌
것, 막힌 것을 풀어주는 것은 사랑뿐이지요.
종일 사람들을 치유해주신 예수님께서는, 다음 날 새벽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십니다. 사랑이신 분이 사랑을 한없이 펼치시고 자비를
호흡하시려고 하느님 안에 쉬신 것이지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붙들려 하지만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향하여 순례를 계속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픈 나를 치유해주시려고
사랑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나의 낮은 자존감, 부정적인 사고, 왜곡되고
불합리한 사고방식, 절망과 체념의 병에서 해방시켜주시는 분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이 사회의 갈등을 풀어가고 불의에 저항할
힘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 사랑으로 묶이고 맺힌 것 풀어내고, 아픈 곳 서로
어루만져주며 자유와 해방의 길을 꿋꿋이 걸어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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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2018년 나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판관 시대의 종료를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의 왕정(王政) 수립 과정에
큰 기여를 한 마지막 판관 사무엘의 생애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납니다.
그의 출생 배경을 한번 보십시오. 그의 어머니 한나는 원래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날이면 날마다 성전을 드나들며 눈물로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사무엘기 상권 1장 11절)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굽어들으신 주님께서 마침내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은 기적적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감사의 마음으로
아들을 사제 엘리에게 맡깁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자리한 주님의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주님께서 세번에 걸쳐 거듭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사무엘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엘기 상권 3장 10절)
사무엘의 외침,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는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짧지만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가 아니라, 이런 저런 지향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습니다. 그도
아니면 지극히 틀에 박히고 정형화된 기도문들을 달달 반복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창의성, 자발성, 적극성이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가장 근본적인 측면, 하느님 음성을 듣는 과정인 침묵이
생략되거나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주님 앞에 취한
단순명료한 태도를 자주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셨고, 열심히 공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틈나는 대로 홀로 외딴 곳으로 가셔서, 침묵 속에 기도하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코 복음 1장 35절)
침묵의 순간은 공허한 시간, 열정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대면, 내면의 성찰을 통해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는 시간입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데 있어 침묵보다 좋은 도구는 다시 또 없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변변한 이동 수단도 없던 그
옛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12년 동안, 8만킬로의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성체 앞에 홀로
머물며 침묵 속에 기도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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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박수칠 때 떠나라/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마르코 1,29-39
박수칠 때 떠나라.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면서도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침’입니다. 나의 입 속에 있고 항상 삼키고 있으니 참 깨끗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뱉으면 가장 더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도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눈꺼풀’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인지도 모르게 눈꺼풀을
내렸다 올렸다하며 눈을 깜빡입니다. 너무 가벼워서 눈을 깜빡이면서도
전혀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졸음이 쏟아질 때는 어떤 장사도
자신의 이 가벼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으면서도 가장 외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체로 실제로 감실 안에
계십니다. 세상 어떤 누구도 예수님만큼 인기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혼자 계시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미사 때에는 사람이 우르르 몰려오지만 낮의 많은 시간과 대부분의 밤
시간에는 어둡고 좁은 감실에서 외롭게 지내셔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지금이야
영적으로 당신을 원하는 모든 이들과 언제라도 함께 계실 수 있지만,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는 그 인기 때문에 곤란을 겪으셔야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고 사람들을 더 가르치고 싶으셨지만
다른 곳에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항상 시간이 부족하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그들을
두고 홀로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아예 당신께 몰려드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물론 복음 선포를 위해 여러 고을로 이동해야 하셨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하신 곳은 팔레스티나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매우 협소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주 이동하셨으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많이 보아야 평생 한두 번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주 만나는 사람이 곧 깊은 관계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매일 만나고 부모님은 명절 때만 찾아뵙더라도
더 깊은 관계는 부모님과 입니다. 다시 말해 잦은 만남을 강요하는
것이 곧 깊은 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관계를 잘 맺을 줄 아는 사람은 먼저 하느님과 단 둘이만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광야에서 홀로
기도하신 것이고 또 밤을 통해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사실 구체적인 인간관계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먼저
하느님과 홀로 서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약주를 드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끼리 서로
부축해주겠다고 어깨동무하다가 한 사람이 비틀거리면 다른 사람도
그것을 버티지 못하여 함께 넘어집니다.
내가 홀로서지 못하면 힘들어하는 누구에게도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홀로 있을 줄 아는 사람이 떠날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좋아지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떠날 결심을 하십니다. 당신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적어도 당신께 대한 호기심은 생긴 것이니 나머지는 자신들이 알아서
진리를 찾을 일입니다.
예수님은 인기를 즐기려 하지 않으시고 다시 믿음이 없는 곳으로, 즉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곳으로 가십니다. 물론 그 곳에서도 사랑이
일어나면 당신은 떠나실 것입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제목이
참 인상적이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떠나실 때는 바로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박수를 쳐줄 때였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장모도 고쳐주고 병자들도 고치고 마귀도 쫓아내시며
베드로의 권위를 세워주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쉼 없는 순례의
길이기에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글라라 성녀와 자주 만나셨을 것 같지만 사실은 가까이
살면서도 거의 만난 일이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죽기 전에
홀로 외딴 곳으로 가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커다란 순교와도 같겠지만,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처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있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빛이
필요한 곳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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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 1,29-39
영화 1987을 보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군 복무 중이었습니다. 군에서는
외출과 외박이 금지되었습니다. 사회가 혼란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영화는 두 젊은이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문의 과정에서
숨진 박종철과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입니다.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은폐, 조작하여 감추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권력을 가지지 않았지만
진실을 밝히려는 정의감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젊은이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민주화를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그 뒤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민주화의 과정이 이어져 왔습니다.
구원의 역사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숲에 숨었습니다.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몸을 가렸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도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감추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거짓된 것들을 드러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나탄은 다윗의 잘못을 드러냄으로써 다윗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냄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구원은 밝은 곳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해서 가장 밝게
드러났습니다.
정의와 진실은 언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입니다. 사무엘은 침묵
중에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에서 깊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아픈
이들을 치유해주고,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때로 세상과 떨어져 살 필요가 있습니다.
강물에 떠밀려 가는 것은 낙엽이나 나뭇조각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강물에 떠밀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강물 속에 머물기도 하며, 강물을
이용할 줄 압니다. 물고기는 강물 속에서 살지만, 강물을 거슬러 갈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거친
세상이라는 강물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살아가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100세의 노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잘못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보상하고
갚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오래 살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 노인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피정을 하는 학생들에게 꼭
들려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한 것 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4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모두 함께 빵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둘째는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신분의 벽을 허물었고,
남녀의 구분도 없었고, 학력의 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셋째는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넷째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몸이 많은 지체가 있지만 한 몸을
이루듯이 교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지체를 이루어 신앙
공동체로서 마치 한 몸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될 수 있었고, 이웃의 기쁨은 또한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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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신앙은 찾아가는 것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마르1,29-39)
신앙은 찾아가는 것이다.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좇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 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루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고을들을 찾아가자는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외딴 곳을 찾은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신앙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이웃과 세상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 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우리는 고요 속에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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