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4일 와서 보아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1-16 06:14:11    조회 : 413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월14일 주일 [(녹) 연중 제2주일]

[수도회] 거룩한 눈여겨 봄과 동참으로 따르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3,3ㄴ-10.19
○ 제2독서 1코린 6,13ㄷ-15ㄱ.17-20
† 복음 요한 1,35-42

***** ***** *****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그분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눈여겨보시고’, “무엇을 찾느냐?”며 말을 거시고, “와서
보아라.” 하시며 그들을 먼저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무엇을 찾았고, 무엇을 보았을까요?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는 제자들의 확신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제자들의 삶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부르심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도 세례성사와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살면서 때로
하느님을 벗어나 내 몸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속량해 주셨기에 우리 몸은 하느님께 속해 있고, 사실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륜을 멀리하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훈계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뜨끔해지는 것은 내 양심 속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음성과 달리
내 몸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모순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른 자신들의 속내에
세속적인 영광과 성공에 대한 바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참된 진리를 뒤늦게
깨달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사무엘 예언자처럼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뒤늦게라도 응답할 수 있도록 깨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 *****
◈ [인천]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2018년 나해 1월14일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3,3ㄴ-10.19

제2독서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6,13ㄷ-15ㄱ.17-20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2

언젠가 밤늦은 시간에 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분이
저를 흘깃흘깃 쳐다보십니다.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별
일 아니겠지.’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기사 분이 제게
묻습니다.

“혹시 신부님 아니십니까?”

밤늦은 시간이고 또 사복을 입었기 때문에 제가 신부라는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묻자, “신부님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너무 내용이 좋아서 신부님이 나오는 방송을
다 다운받아서 봤어요. 방금 전에도 스마트폰에 담아서 보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제 택시에 타신 것입니다. 영상으로만 볼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뵈니 정말로 신기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세요.

“신부님, 제가 한 가지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의문인데,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간단한 질문이지만 답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가 막연하고,
여러 질문을 함께 묶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있는가?’ 등의 질문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대답해도 답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대답을 해도 모두 틀릴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질문은 누가 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대답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요한의 말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쫓아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고 묻지요.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와서 보아라.”였습니다.

우선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생에서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즉,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생의 목적을 찾을 수 있을 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온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이를 세세
콜콜히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하신 말씀은 “와서 보아라.”
였습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 저 세례 받은 것 취소시켜 주세요.”
라는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여쭤보니
세례 받은 뒤에 잘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당
다니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서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산다고 했는데,
세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도 없고 또 기도도 했는데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하느님과
저랑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면서 직접 보고서 판단하라는 것처럼, 우리들의 행동을 먼저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길, 그러나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길 끊임없이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가 했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실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늘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 뜻에 맞게 살면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
예언자가 부르심에 응답했던 모습을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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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리 안에 있다. 사랑은 파괴할 수 없다. 오직 감춰질 수 있을
뿐이다(마리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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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머(‘좋은생각’ 중에서)

중국 소설가 린위탕은 해학이 넘치는 글을 썼다. 그의 유머 감각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 시골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는 설교 시간에
떠드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면 저쪽 남자분이 좀 더 조용히 잘 것
같은데요.”

꼭 부정적인 말로 상대방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바꾸려고만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방법으로는 바뀌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말, 특히
웃음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 더 크며, 이를 통해 진정으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말과 행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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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거룩한 눈여겨 봄과 동참으로 따르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14일 연중 제2주일
1사무 3,3ㄴ-10.19; 1코린 6,13ㄷ-15ㄱ.17-20; 요한 1,35-42

“와서 보아라.”(요한 1,39)

거룩한 눈여겨 봄과 동참으로 따르는 삶

요한이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36)라고 말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눈여겨본
것’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뭔가를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눈여겨 본다'(엠블레페인)는 것은 영혼의 저 깊은 곳까지
간파하며 주의깊게 바라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와 부자 청년을 바라보신
(1,42; 마르 10,21) 그 눈길로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여겨 봄'이 있을 때 하느님의 모습을 제대로 보며
하느님의 징표를 올바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모습만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으려면 하느님을
품은 '눈여겨 봄'이 있어야겠지요.

눈여겨 봄은 하느님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지향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눈여겨 봄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았고 은총의 핵심을 포착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체험은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36)이라는 탄성으로 이어집니다.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드러내서 알려지게 하려고
'하느님의 어린양'(1,29)이란 선언을 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에
대한 추종을 준비하고 도우려고 같은 선언을 되풀이합니다. 그는이
선언으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과 관계있는 존재가 되도록 이끌고,
그분이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실 사랑의 주님임을 알려준 것입니다.

요한의 말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1,37).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제자가 되어 그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를 지면서 스승을 끝까지 추종하는 것이지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이웃의 밥이 되고 이웃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며, 이웃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어린양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합니다
(1,38). 이는 무엇을 원하며, 어떤 삶을 바라는지, 그리고 어떤 메시아를
만나려 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도 일상을 살며 무엇을 찾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제대로 찾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요, 그분의 삶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거처에 대한 질문은 그분의 인격과 삶
자체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가서' 예수님과 함께
머뭄으로써(1,39)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봅니다(1,41). 그들은 단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면서 깊은 친밀감 속에 존재적 일치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도 장소를 넘어 이웃의 요청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자세를
지녀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을 전제로 하는 당신의 길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거룩한 눈여겨 봄과 그분과의
친교를 통해 장소를 넘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응답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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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와서 보아라!
 
2018년 나해 1월14일 연중 제2주일 요한 1,35-42

와서 보아라!

빛이요 진리 그 자체셨던 예수님, 존재 자체로 환한 광채를 발하셨던
예수님, 그 무엇 하나 숨길 것이 없으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을 향해 아무런 거리낌없이 외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복음 1장 39절)

자신이 없는 사람, 확신을 지니지 못한 사람, 말씀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앞뒤가 잘 안맞는 사람, 뒤가 구린 사람들, 감출 것이 많은
사람들은 결코 건넬 수 없는 말이 “와서 보아라.”입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 인간의 추측은 실체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직접 현장에 가서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해보면 더 많은 진실을
파악할 수 있을 뿐더러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충만한 예수님의 초대 앞에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그 분께서 묵으시는 곳까지 따라와서, 그 분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일거수일투족과 그분의 실체를 아주
가까이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겠지요.

다른 무엇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상하고 계시던 교회 공동체의 진
면모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건설하고자 하셨던 초대 교회의 생명력과
활기,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봤습니다.

그곳에서는 예수님 이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들을 수 없었던 진리의
말씀의 선포되고 있었습니다. 모여있던 군중들은 진리에 대한 갈증을
원없이 해소했습니다. 그분 말씀에는 힘과 능력이 있었기에 죽어가던
사람들도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공동체에는 꿈에
그리던 새 하늘과 새 땅이 막 태동되고 있었습니다.

시선을 돌려 오늘 우리 공동체를 한번 진단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도하셨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흘러넘치던 그 생명력,
그 기쁨, 그 환희,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은 우리들이 선포하는 말씀으로 인해 위로받고 치유되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큰 소리로 외쳐야겠습니다.
“와서 보아라.” 방황하는 사람들, 삶의 깊은 의미를 진지하게 찾고 있는
이웃들을 향해 확신 갖고 외쳐야겠습니다. “와서 보아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 *****
◈ [서울] 연중 제2주일

교구장님께서 새해 선물로 책을 주셨습니다. 제목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입니다. 책은 교황님과 가까이에 있었던 분들의 증언을 담았습니다.
교황님의 영성, 교황님의 고뇌, 교황님의 열정, 교황님의 사랑,
교황님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두려워 마십시오.’라는 말로 첫 번째 강론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깊은 침묵과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많은 도전과 시련이 있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주어진 일들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교황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겨 주신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께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회칙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자, 생명을
주시는 주님, 교회의 선교 사명, 진리의 광채, 신앙과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회칙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사목, 신학,
영성, 삶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저도 새해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들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듣지 않으면 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아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듣지
못하는 아이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무엘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기는 많은 갈등과 분쟁은 먼저 듣지 않기 때문에 생기곤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3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미리 신경을 쓰는
농부이고, 이를 上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이왕 생겼으면 크게 자라기전에 뽑아
버리는 농부이고, 이를 中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생겼는데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나중에
추수할 때 뽑는 사람인데 이를 ‘下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어떤
농부가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상농이겠지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신앙의 농사를 어떻게 져야 할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밭에는 죄라는 잡초가 생기곤 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마음의 밭에 떨어졌으면 곧바로 그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자라서 내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가 나중에 그 죄의 무게 때문에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부류의 태도로 신앙의 농사를 져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 부류의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에는 필요한 것이 5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는 신앙은 금세 메말라 버리게 됩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에 힘을 주고 활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 주셨고, 교회는
우리들을 하느님께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성체성사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받아 모심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받아 모신 우리는 모두 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나가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실천을 삶 속에서
충실하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적인 성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처럼 우리들도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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