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9일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1-19 07:26:11    조회 : 413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월19일 금요일 [(녹)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수도회]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까닭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24,3-21
† 복음 마르 3,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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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몇 가지 특권을 주십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입니다. 당대의 최고
예언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이라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은 물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
정도는 가져야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목격했으며, 그분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거부한 유다 이스카리옷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 그분과 함께
머물렀고, 약속된 협조자 성령 안에 머물면서 수많은 복음의 열매들을
맺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시기한 사울의 미움과 분노에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그리고 복수의 기회를 화해와 신뢰로 바꾸어 냅니다. 그것은 다윗이
사울을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임금으로 인정하고, 그의 곁에
머물면서 의로움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윗의 의로운 모습에
사울이 감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을 경외하며 정의와
인정을 동시에 지닌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의로운 예수님의 제자로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는 하루에 얼마나 자주
예수님 곁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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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해주시고 지지해주시고 계심을

2018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4,3-21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9

얼마 전, 우연히 두 분이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점점 서로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런 말을 자주 하더군요.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이 말을 들으면서 왜 목소리가 커지고 싸우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상대방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목소리를 더욱 더 키울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 안에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화도 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자신도 말했듯이 서로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사람은 누구나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상대방으로부터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대우받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별 것 없습니다.
그저 눈을 맞추면서 따뜻한 눈빛을 건네주는 것, 말 한 마디에도 반응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가 존중받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상대방 역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앞에 있는 사람,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판단하지도 않으십니다. 이를 오늘 열 두 명의 제자를
뽑으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당시에 능력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받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중에서
제자를 뽑지 않으셨지요. 오히려 부족함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뽑혀 제자가 됩니다. 그 부족함이 결정적으로 드러났던 부분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도 있었고, 수석제자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붙잡히자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신도 모두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첫
번째 말씀은 ‘평화’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정이 제자들이 세상 끝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근본적인 힘이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인정해주시고 지지해주시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 안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 ~~~~~ ~~~~~
거룩함은 특별한 것을 행함을 뜻하지 않고, 사랑과 신앙으로 평범한
것을 행함을 뜻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 ~~~~~ ~~~~~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야 할 때.

18년째 새벽마다 묵상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쓴 내용이 모두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바로 나쁜
말은 없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이니 어떻게 나쁜 말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들을 100% 실천하면서 사는가 라고
묻는다면 조그만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네요.

‘꼭 그렇게 살지는 못해요. 저도 인간이거든요. 그저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뿐이죠.’

글이 행동과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를 종종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선물도 많이 보내주시고, 우연히 만나게 되면
사진을 좀 같이 찍어달라는 부탁도 하십니다. 제 책을 가지고 오셔서
사인해 달라는 분도 꽤 됩니다. 제 자신을 아무리 잘 보려고 해도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부족한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인정받으면 기분도 좋고 힘을 쑥쑥 솟아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내 자신이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행복이지요. 그래서 오늘도 고개를 숙이고 주님께
겸손되이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이렇게 부족한데도 저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자신의 능력과 재주란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늘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당신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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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까닭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 3,13-19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함께 지내게 하셨다.”
(마르 3,13-14)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까닭은...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소명에 대해 생각하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3,13) 그분께서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나는 산에
올라가신 것은 인간적인 필요나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을 뽑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앞선 부르심들
(1,20; 2,17)보다 훨씬 더 강력한 초대와 특별한 소명을 위한
부름으로서 하느님께 뿌리를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전적인
주도권을 지니신 그분께서는 그들의 원의와 상관없이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처지나 됨됨이를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니지요.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원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들이 그분께 나아갔습니다."(3,14) 그들은 장소를 옮긴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들을 원하시어 부르신 것일까요? 부르신 목적은 세
가지 정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사랑 때문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은 사랑의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제자들 안에 충만해지고,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하시려고 그들을
부르신 것이지요. 제자들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도록 당신의 ‘측은한
마음’을 나눠주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매순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의 간절한 사랑을 감지하고 깊이 새기도록
깨어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신 다른 동기는 모든 것에 앞서 당신과
함께 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3,14). 그분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삶을
같이 하고 운명을 공유하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새 이름을 받고
새로워져 그분과 함께함으로써 하느님의 선과 지혜, 의로움과 자비
안에 머물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다른 한편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수난을 겪고 죽음에 처해지는
메시아의 운명에 동참하도록 불렸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르심은 죽음에로의 초대인 셈입니다. 그 길은 모두를 살리려는 사랑의
십자가길이지요. 따라서 부름받음 우리는 다가오는 일상의 불편과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 견뎌내야겠습니다. 정의와 공동선이 실현되도록
세상의 불의와 가난과 불평등에 맞섬으로써 제자다운 응답을
해야겠지요.

끝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복음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3,14).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같은 거처에서
합숙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함께 지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전체
구원사적인 몸짓과 사랑을 온전히 수용하며 그분과 함께 느끼고 말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결과 부름받은 제자들은
복음선포의 도구로 '파견'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지내도록 부름 받았고 이 순간도
부름 받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절절한 사랑을 알아차리고 그
사랑에 깊이 젖어들었으면 합니다.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바꿔, 사랑으로
일상의 십자가를 기꺼이 견뎌내고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위해
투신해야겠습니다. 반생명적이고 비복음적인 모든 것들을 하느님
뜻대로 되돌리도록 온 힘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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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 13)

부르심과 머무름 이 모두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의 사건입니다.
부르심은 함께하자는 초대로 시작됩니다.
머무름은 서로를 알게되고 나누게되는
맞아들임의 가장 기쁜 사랑입니다.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분명 머무르는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없이는 행복할 수없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머물러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머무름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생명의 샘이 있습니다.
사랑을 되찾는 길은 머무름입니다.

부르심과 머무름을 아우르는 것은 기도이며 감사입니다.
부르심은 봉헌이되고 머무름은 내어맡기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질서는 부르심과
머무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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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교구에서 직원들에 대한 인사평가를 하도록 공문을 보냈습니다.
직원들이 스스로 하는 평가가 있고, 부서장이 평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쉽지 않았습니다. 평가의
항목은 ‘신앙심, 창의성, 근면성, 추진력, 소통, 학습능력, 협동능력’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다른 부서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원하는 부서를 신청하도록 하였습니다. 부서장은 다른 부서에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하도록 하였습니다. 적성과
능력에 따라서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부서에서 일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부서에서 일하면서 생기는 신선함도 있을 것 같고,
여러 부서에서 일하면 업무 능력이 더 좋아질 것도 같습니다. 교구의
새로운 시도가 직원들에게도, 부서장들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복음을 선포하는
것,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 아픈 이들을 도와주는 것,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구의
원로사목자께서 후배 사제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오랜
사목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제들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자들이 원하는 사제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가난을 삶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전례를 정성껏 하라는 것입니다.
미사 시작 30분 전에는 고백소에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장례가 나면 먼저 가서 유족들을 위로하고 연도하라는 것입니다.
행정과 관리를 하기보다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제가 필요한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에는 성당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책을 가까이하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찍 잠자리에
들라는 것입니다. 

사제들도 본인의 사목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사제들이 사목을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습니다. 피정과 교육의 자리를 많이
마련하여서 사목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사제들 스스로 기도에 충실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에, 자선과 나눔을 한 사람들의 명단에,
누군가를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운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잊고, 모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시편 31,3-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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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지남철에 쇳가루가 붙어있듯|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마르3,13-19)

지남철에 쇳가루가 붙어있듯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말씀대로 입니다.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 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 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서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
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사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주어집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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