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0일 흔들림이 없는 삶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1-20 06:14:40    조회 : 415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월20일 토요일 [(녹)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수도회] 주님께 미친 행복한 사람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사무 1,1-4.11-12.19.23-27
† 복음 마르 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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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분을 미쳤다고 생각해서 붙잡으러 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일보다는, 사회의 지도층에 도전하고
막말을 하며 제자들을 불러 모아 군중을 몰고 다니는 예수님을,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살아온 친척들은 ‘미쳤다’고 여기고, 가문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엔가 깊이 열중하거나, 남들이 보기에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 때,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으로 살 때 “미치지 않고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우리도 미치도록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무엇에 미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세상의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진리에 미친 순교자들,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삶을 송두리째 넘겨준
성인들, 정의를 지키고 인권을 보호하려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이들, 소외된 이웃을 위해 말없이 남모르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이들.
이 모든 사람은 하나의 진리에 미친 이들입니다. 그것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으며, 끊임없이 나를 비우고,
완벽하지 않은 나를 사랑하며, 이웃의 모습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지혜를 가질 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진리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미워했던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 앞에 처절한 애가를
부르며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던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미움과
분노를 우정과 사랑으로 승화시킨 다윗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는
정의와 평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미치도록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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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미쳤다.

2018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 쓰러졌는가?>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1-4.11-12.19.23-27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21

미국은 우주개발 계획에 해마다 약 150억 달러를 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화폐 가치로 전환하면 16조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찾기가 힘들면서 한편에서는 이 돈으로 병원이나
학교, 사회보장을 위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비판한다고
합니다. 지금 이 지구 안에서도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그렇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우주개발을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필요
없을까요?

우리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합니다. 환경과
자원부족문제를 가지고 있는 지구이기에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우주개발 계획에 따라 인류의 비약적인
과학기술을 발전시킨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실생활에서도
우주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더욱
더 편하고 유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위해 막대한 교육비를 지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교육비 쓰지 않고 그냥 지금 먹고 싶은 것 더 먹고, 하고
싶은 것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모든 것들을 줄여가면서도
불구하고 교육에 쏟는 이유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그저 지금 한 순간만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열심히 삽니다. 그리고 이 기준에 맞춰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혹시 지금 한 순간만을
바라보면서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붙잡으러 나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친척이면 더욱 더 열심히
지지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시간인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한 순간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해 “미쳤다.”라고
단언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또한 지금 한 순간의 세속적인 만족만을 따르게 된다면 주님의 모든
말씀은 헛된 것이고 미친 사람의 짓거리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두 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모두가 함께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어울려 살기 위해서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도 유익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길을 향해 가야 할까요?

~~~~~ ~~~~~ ~~~~~
성공한 삶이란 그 사람의 꿈과 사랑이 담긴 행복한 공간이 넓어지는
것이다(김이재). 

~~~~~ ~~~~~ ~~~~~
진정한 승자.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한참의 싸움 끝에 마침내 승패가 결정되었지요. 싸움에서 진 수탉은
고개를 숙이고는 어두운 구석에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싸움에서 이긴
수탉은 기고만장합니다. 자신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높은 담장 위로
날아올라가서는 힘차게 “꼬끼오~~~~”를 외쳤습니다.

바로 그 소리를 듣고 근처를 날고 있던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와서 담장
위의 수탉을 낚아채서 날아갔습니다. 결국 암탉은 누가 차지했을까요?
이긴 수탉이 아니라, 싸움에서 진 수탉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기고 진다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지금 한 순간은 이긴 것 같지만, 그것이 영원히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겸손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먼훗날 주님 안에서 진정한 승자가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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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께 미친 행복한 사람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토, 마르 3,20-21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마르 3,21)

주님께 미친 행복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가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3,20).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 병을 고치시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본 이들이 치유와 해방의 샘물을 찾아 몰려든
것입니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로 방향을
튼 것이지요.

한편 예수님의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섭니다(3,21). '예수님의 친척들'을 직역하면 '그분에게서
오는 이들' 또는 '그분 곁에 있는 이들'입니다. 이 표현은 추종자들,
친구들, 가족들, 친척 등으로 옮길 수 있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을 ‘미쳤다’고 판단하여 붙잡아 데려가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가는 길에 묶어두려 한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은 '~의 밖에 서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정신이 나가 있음을 표현한 고전적 그리스어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열두 제자의 조직에 부름받지 못했지요. 그 결과 친척들은
예수님을 자신들과 무관한 저 밖에 있는 사람, 곧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가고 있는 인생길을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고향, 친척, 직업을 저버리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면서(3,20) 세리들, 죄인들과 어울리고 배척받으며
정처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시는 비정상적으로 비친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의 삶과 생각과 행동의 범주 ‘밖에 서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친척들이 정상이라고 여기던 그 길은 실은 선과 생명과
자유와는 거리가 먼 길이었습니다. 그 들은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이며
심지어 하느님과 무관한 그런 길로 역주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은
자신들이 제정신이 아니면서 정상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생명과 자유의 길이신 예수님께서는 역주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유턴하도록 초대하러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정상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그 길에서 벗어나 창조 때의 생명의 숨결과 영 안에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고 자유와
참생명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고 '미친듯'
걸어가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세상의 강력한 도전과 유혹 속에 살아갑니다.
주님의 영과 복음가치를 추구하는 우리는 오해받고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과 자유와 기쁨을
모르고 원하지도 않는 이들의 눈에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죄다
미친짓으로 보일 테지요. 그럼에도 하느님께 미친 우리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생활방식에 따라 선을 추구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며 함께 불의에 맞서며 해방의 길에 투신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세속의 가치와 인연, 고정관념과
편견, 하찮은 판단의 잣대와 굳어진 사고의 틀과 묵은 습관에서 벗어나,
주님께 미쳐 생명을 호흡하는 행복한 우리이길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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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주간 토요일

2018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 3,20-21

집에는 현관(玄關)이 있습니다. 현(玄)자는 누에가 실을 뽑는 형상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누에가 천천히 실을 뽑지만 그 안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현관은 사찰로 들어가는 문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속세에서 살던 사람이 사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당으로 들어갈 때,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 성수를 찍는 것도 비슷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친 일상의 삶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현관을 지나게 됩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이 가득한 문이 되면
좋겠습니다. 경쟁, 성장, 이기심, 권력이라는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정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어 주고, 용서해 주는 가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거룩함이 시작되는 현관이 된다면, 우리의 가정이
사랑이 넘쳐나는 현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 가정에서 희망의 빛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세상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희망, 믿음, 사랑이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지친 날개를
잠시 접고 영적인 충전을 할 수 있는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고, 자녀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머무는 가정은 지친 몸을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는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매일 아침
부부는 눈을 뜨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것입니다. 처음 약속했던
것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항상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가정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 만난 것처럼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갈등이 커지면 다투게 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깊은 상처를 남기고 깨지기도 합니다.  

사제들도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부부처럼 한 집안에서 살지는 않지만
더러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제가 신자들과 어울려 식사를 자주 하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고, 늘 성당에 있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일을 신자들과 상의해서 하면 추진력이 없다고 하고, 혼자서
결정을 하면 독단적이라고 합니다. 강론이 길면 지루하다고 하고,
강론을 짧게 하면 준비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면
정치적이라고 하고, 신앙 이야기를 하면 현실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사제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기껏 준비한 강론을 하는데
주보를 보거나,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피정을 준비했는데 오셔야 될
분들은 오지 않습니다. 성당의 시설물들을 사용하면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습니다. 미사 전에 미리 와서 기도하면 좋겠는데 미사 시간이
돼서야 성당에 오고, 늦게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당의 재정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사제와
신자들도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해서 오해를 하고,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 리를 가자는데 십 리를 가주기
때문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세와 성공 그리고 부와 명예를
좇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영적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수준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나비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여
주셨고,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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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흔들림이 없는 삶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마르3,20-21)

흔들림이 없는 삶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
(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를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 받으시고 모함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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