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1일 주님께 돌아가야 할 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1-21 07:40:04    조회 : 411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월21일 주일 [(녹) 연중 제3주일]

[수도회] 주님께 돌아가야 할 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요나 3,1-5.10
○ 제2독서 1코린 7,29-31
† 복음 마르 1,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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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살면서 ‘때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코헬렛은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니네베의 악행을 심판하시려고
요나를 보내셨을 때, 요나는 자신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도망을 칩니다. 요나가 생각하기에 니네베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의 달갑지 않았던 회개 선포에 곧바로 단식을 선포하고 회개의 표지로
자루옷을 입은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은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이 잡힌 뒤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때가 되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음속
깊이 그들이 찾던 인생의 해답을 그 부르심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세속의 행복만을 찾는 사람에게 결코 다가오지 않는 때입니다.
냉담 중인 부모나 자녀들,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대자 대녀들,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싶지만 눈에 거슬리는 동료
신자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내게 상처를 준 본당의 사제나
수도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내 맘에 들고, 나에게 기쁨을 주고, 나를
인정해 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생각하는 조급하고 이기적인 때와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흘러
지나가는 시간의 때가 아니라, 당신의 충만함을 보여 주시는 때를
선물하십니다. 물론 그때와 그 시간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께서 섭리하시는 그때를 기다리며 믿고 맡기고 사랑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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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예"

2018년 나해 1월21일 연중 제3주일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5.10

제2독서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9-31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아주 어렸을 때 제게 커다란 열등감을 안겨준 텔레비전 프로그램 하나가
생각납니다. 물론 재미있게 보기도 했지만, 어떠한 장면을 보면서 ‘왜
나는 저렇지 않지?’라면서 괜히 부끄럽고 어디에 숨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묘기대행진’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세상에 이런 일이?’, ‘생활의 달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종종 어린이들이 나옵니다. 소위 천재, 영재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지요. 대단한 암기력을 보여주고, 외국어도 달달 욉니다.
암산을 비롯해서 어려운 문제도 척척 풉니다. 이런 어린이들과
비교해보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내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지요. 마냥 이런 아이들이 부럽고 나도 이렇게 천재나 영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러워했던 이 아이들은 커서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솔직히 어렸을 때의 천재성이 성장해서까지 유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4살 때 검사한 지능검사에서 IQ 210을 기록해서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으로 기네스북까지 올랐던 사람도 현재는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러워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은 부러움이 더욱 더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 안에서 대단한 부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후대에 인정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아닙니다. 돈밖에 몰랐다면 욕을 먹고
있을 테고,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돈’을 잘 활용해서 이 세상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별 것 아닌 것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대신 미래를 바라보면서 했던
행동은 대단하게 평가받습니다.

소위 예전에 잘 나갔다는 분들이 술 한 잔 걸치시면
“내가 왕년에~~~”라는 레퍼토리를 쏟아내십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와~ 부럽다. 나도 그렇게 살았으면.... 이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무용담과
같은 이야기는 관심이 없으며,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듣기 싫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이야기, 지금을
더욱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구원의 삶을 향하길 늘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릅니다. 이는 요나의 말 한마디로 하느님을 믿고 악한 길에서
돌아선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이 모습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내리시기로 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지요
(요나 5,10 참조).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1코린 7,29)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예”는 충만하고 전적이며, 평생을
걸만큼 조건 없는 “예”입니다. 어중간한 “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솔직하게 어중간한 “예”에 길들여있는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못하겠습니다.”, “오늘은 안 되고, 내일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내일은 좀 더 나을 거예요. 내일 기도드리겠습니다.
선행도 하겠습니다. 내일이요.”

우리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이러한 어중간한 “예”를 통해서는
주님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가장 큰 가치인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예”를 기쁘고 또 힘차게 외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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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촛불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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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동기부여(‘따뜻한 하루’ 중에서)

초등, 중,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같이 다닌 친구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저는 원하는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이력서를 내는 곳마다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친구는 취업 준비 생활이
조금 길어진다 싶더니 몇 년이 지나도 이 친구가 취업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걱정과 조언을 해도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있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라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만 늘어났습니다. 급기야 친구의 부모님도
포기하고 방치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 친구가
걱정되어 만날 때마다 ‘취직해, 취직해’라고 잔소리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저는 회사에서 상사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경위서에
감봉까지 억울하게 당했던 날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었던 그 날 그
친구를 만났고 그만 이렇게 말해 버렸습니다.

“회사 생활 왜 하는지 모르겠다. 네 팔자가 나보다 백번 낫네.”
친구는 당황한 눈으로 저를 바라봤지만 저는 계속 말했습니다.
“너 그냥 평생 그러고 살아라. 차라리 네가 정말 부럽다.”

그런데 한 달 후, 친구가 한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왜 심정이 변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나한테 잔소리하던 너마저 포기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정말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정말 무서웠어.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다시 도전하게 되었어.”

동기부여가 필요합니다. 내가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동기부여를
찾아봅시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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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께 돌아가야 할 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21일 연중 제3주일

요나 3,1-5.10; 1코린 7,29-31; 마르 1,14-20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께 돌아가야 할 때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식민통치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겪는 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인 그분께서는 정통성을 의심받고 멸시받으며 소외된 바로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주님의 날, 구원의 결정적인 때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선과 사랑과 정의가 드러났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계획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일 수밖에 없지요. 주님의
오심은 경이로운 축복이자 주님께로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코린 7,29)

시몬과 안드레아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하고
부르시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1,20). 두 제자들은
자신을 '떠나'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단순히 생계도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뿌리와 습관과 경험, 자기애, 인간적인 지식
등을 버리고 삶의 중심과 방향을 철저히 예수님께로 돌린 것이지요.
그들은 근본적인 회개의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차려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버리고 그분과 나를
동일화시키며, 삶을 믿음 안에서 자기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란
가난하고 소외된 곳에 계신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용서가 인간관계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스며들도록 투신하는 것이야말로 참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와 행동에서 떠나야 합니다.
요나의 회개 선포로 이스라엘 적국의 수도 니네베 사람들은 악한 길에서
돌아섭니다. 그렇게 주님의 자비가 민족과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드러납니다(요나 3,1-5). 이처럼 긴박한 구원의 때를 사는 우리들도
온갖 장벽을 허물고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 추종의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입니다. “따르라”는 부름은 수난의
선포와 밀접히 얽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모든 가치와
명예까지도 박탈당하고 철저히 버림받으셨지요. 곧, 예수님의 수난은
철저한 불명예의 수난이었습니다. 구원의 때를 사는 우리는 일상의
괴로움, 번민, 어려움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해야겠습니다.
탐욕과 거짓, 불의와 불신의 그물을 버리고, 겸손과 사랑, 평화와
기쁨을 낚아올리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임을 의식해야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주님을
만날 은총의 때입니다. 따라서 지나가 버릴 세상 것에 현혹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사건 안에서 그분을 주인공으로 드러내는 겸손과 수난의
길을 함께 걸어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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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주일

2018년 나해 1월21일 연중 제3주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4-20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주 보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시간입니다. 거울이 지금 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시간은 나의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삶을 드러내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시간은 철학자에게도, 물리학자에게도, 심리학자에게도,
신학자에게도 참으로 의미 있는 주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시간은
무엇입니까?  

시간은 인연을 맺어주는 수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위해서도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천년에 한번 바위로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에 스쳐서 바위가 다 닮아
없어져야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맺어진다고 합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는
인연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저는 3가지 차원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하나의 약속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다르면 혼란이
오기 때문입니다. 2018년 1월 21일은 누구에게나 같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역사를 기억하고, 이 시간을 통해서 만나고,
이 시간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일정표에 있는 약속은 모두 물리적인
시간을 기록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은경축, 서품기념일, 축일, 기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의미의
시간을 살기 때문에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은 의미의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기도 하고,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하기도 하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기도 합니다. 헌신, 희생, 나눔은 가치의 시간을
택한 사람들의 몫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본인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진 것을 다 나누고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모두 가치의 시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나옹선사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새해에는 물같이 바람같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탐욕 때문에 자신을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피정 중에 선배 신부님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영신수련이란
간단하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정말 간단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속에 참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다만 자식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우리들이 참된 인생길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에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때가 다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니네베의
백성들은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향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우리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신앙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배척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이런 결단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한 결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교우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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