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24일 수요일
[(백)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수도회] 우리 삶에 희망의 씨를 뿌리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사무 7,4-17
† 복음 마르 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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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농경 사회였던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이
익숙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뿌려진 씨앗들이 떨어지는
다양한 상황들을 익숙하게 본 농부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자라나는 환경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마음 밭은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이 자라나는 우리의 다양한 상황들과 비슷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아예 듣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 말씀을 들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좋은 땅에서 말씀의 힘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꼭 집어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내 안에서도 얄팍하게 네 가지 부류를 넘나드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편견에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약속하신 땅을
후손에게 주시며, 다윗 임금에게 축복을 내리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이 지닌 창조와 해방의 힘을 여전히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삶에 지쳐서,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고 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씨앗을 우리에게
뿌려 주십니다. 교회의 전례에서, 성경 읽기에서, 양심의 소리로, 때로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동료들의 삶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마음만 열면 언제든지 우리를 품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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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우리의 삶의 사용설명서
2018년 나해 1월24일 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네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17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0
전에 어떤 전자 제품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이 안에는 제가 구입한
제품의 본체와 함께 부속품들 그리고 책 한 권이 들어있었지요.
그렇다면 책은 어떤 책일까요? 심심할 때 읽으라고 넣은 책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이 전자 제품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용설명서입니다. 각 부품의 설명부터 시작해서 사용하는 방법 그리고
취급 시 주의사항까지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 등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설명서를 제대로 펴보지 않고 그냥 서랍
안에 넣었습니다. 이 제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설명서를 보지
않아도 사용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 사용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이 전자 제품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어디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봐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사용설명서입니다. 이
안에는 이상이 생겼을 때의 조치사항도 적혀 있어서 문제의 해결을
간단히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이 설명서를 보고도 해결이 안 되면
A/S 센터를 찾아가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이 제품을 만든 사람에게만 탓을 돌리지 않습니다. 사용자의
잘못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사용설명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이란 있을 수가 없지요. 따라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잘
해결될 수 있는 사용설명서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나 각종
영성서적들이 우리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사용설명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삶의 문제를
함께 풀어줄 수 있는 성직자나 수도자 등의 전문가를 찾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러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주님 탓만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은 우리들이 잘 아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입니다. 씨는
뿌려져서 어떤 것은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고, 또 어떤 것은 해가
솟아오르자 그냥 타버리고 맙니다.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분명히
모두 좋은 씨였는데 왜 다른 결과를 보이는 것일까요? 어떤 곳에 씨가
뿌려졌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다른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땅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님께서 뿌리신 하나의 씨앗이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불평불만에 앞서 먼저 내 마음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돌려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내 안에서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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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어떻게 잘 쓸까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하라. 나머지는 모두
강물처럼 흘러갈 것이니(피에르 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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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은?
아주 오래된 그러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어떤 남자가 야간 산행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서 절벽에서 떨어집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떨어지는 와중에 튼튼한 나뭇가지가 있어서 꽉
움켜잡을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이 남자는 도와 달라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사람 살려~~~ 거기 위에 누구 없어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하느님이다. 널 도와주겠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믿고 손을 놓아라.”
이 남자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다시 말했다고 하지요.
“거기 위에 누구 또 없어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두겠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너무나 많았던 것은 아닐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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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우리 삶에 희망의 씨를 뿌리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24일 연중 제3주간 수, 마르 4,1-20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 4,3)
우리 삶에 희망의 씨를 뿌리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군중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어떤 뜻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27년경부터 활약하셨는데 초기에는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어디를 가나 군중이 몰려들어 심지어는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인기는 대단해서 헤로데와 유대 지도자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30년경 말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적대자들의 방해와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점차 인기를 잃기 시작하셨지요. 나아가 그분은
신성모독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박해를 받는 처지에 몰려 희망을 잃고
비틀거리는 실패자로 비쳤습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는 겨우 열두 제자와 몇몇 여인들만이 그분을 따라갈 정도였지요.
제자들마저도 이런 예수님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였지요. 절망의
그림자가 짙어가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제 모든 것을
다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시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할 바로 그때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당신의 뜻을 단호히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절대적 희망과 기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분께서는 그토록 헌신하셨던 가난한
이들에게 버림받으셨으나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로질러 다니는 지름길이나 흙이 깊지 않고
가시덤불로 덮힌 밭에 씨를 뿌려봐야 결실이 없을 수 있겠지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내는 씨도 있으므로 씨 뿌리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농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씨를 뿌리러 '나가십니다'
(4,3). 집밖으로 장소를 옮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려고
육체를 받아들이시어 삶 안으로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씨'요, 인간의 영혼은 '밭'이며, 예수님 자신은
'씨 뿌리는 농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과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어 희망의 씨를 뿌리십니다. 그분께서는 믿음과 사랑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살아남는 씨보다 더 많은 씨를
잃어버린다 하여도 희망 속에 끝까지 씨를 뿌리시는 희망의 샘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실패와 절망, 불의와 슬픔, 그리고 거짓과 불신이
있는 삶의 한복으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의 밭, 삶의 밭에
희망의 씨앗을 뿌립시다. 슬픔이 있는 곳에 위로의 씨를 뿌립시다.
불신이 있는 곳에 믿음의 씨를 뿌립시다. 불의와 차별이 있는 곳에
정의와 평등의 씨를 뿌려야겠습니다. 희망 속에 죽음의 밭에 생명의
씨를 뿌려야겠지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오늘도 절망의 그늘을 벗어나 우리에게
씨를 뿌리시는 희망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하여 슬픔과 절망,
불신과 불의, 죽음의 문화가 있는 곳에 희망과 생명의 씨앗을 뿌렸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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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불후의 명작
2018년 나해 1월24일 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르 4,1-20
불후의 명작
‘불후의 명작’ ‘불세출의 걸작’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바라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감동과 전율, 기쁨을 선사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인(聖人)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땅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다들 너나할 것 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존재려니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우리들 사이에 명품(名品), 곧 성인이 존재합니다.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는 솔직하고 자연스러우며 유머감각도 풍부합니다. 우리 시대 성덕은
왕좌 밑에 감춰져 있을 수도 있고 노숙인의 외투 안에 숨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영역에 있어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겸손할 때, 반대로 한 인간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이를 기꺼이 수용할 때 성덕은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신학자가 성인일수 있지만 과학자도 성인일수 있습니다. 수도회
창설자가 성인일수도 있지만 한 가정의 가장도 성인일수 있습니다.
반드시 대단한 업적을 남겨야만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인이
이룩한 업적 안에서 성덕이 발견될 뿐입니다. 성덕은 한 나라를
통치함에서 드러날 수도 있지만 작은 노점상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특별한 성인(聖人)이 한 분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입니다. 그는 어렵게만 여겨졌던 성화의 길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만천하에 공포하신 분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 사람들은 성화의 길이 아주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성화는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로 생각했기에
평신도들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이냐?”며 크게 반박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인의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는
당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성성(聖性)의 보편성을 강조했습니다.
성직자·수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업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완덕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성화와 관련된 그의 활짝 열린 시각은 400년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고스란히 수용되고 만천하에 선포됩니다.
살아생전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매력과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한 지방에 순회강연을 갔다가 그 도시를 떠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시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고급 식기 한 벌과 사파이어
반지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의 마음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며 극구 사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출발하는 광장에 모여 마차가 못 지나가도록
막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 감동적인 설교가였던 그를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존경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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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1월24일 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 4,1-20
한 완상님의 ‘예수 없는 예수교회’를 읽었습니다. 독실한 교인이면서
민족의 하나 됨을 꿈꾸었던 지식인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참된 평화는 약자인 염소가 강자인 사자의 주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강자인 사자가 약자의 주식을 먹는데서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 꿈은 이사야 예언자가 먼저 말했다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사자가 어린이와 함께 뒹굴고, 암소와 곰이 나란히 걸으며, 늑대와
어린양이 같은 풀을 먹으리라.”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아니라
역지식지(易地食之)에서 꿈은 현실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꿈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성령이 나에게 오셨다.
묶인 이는 풀어주고, 갇힌 이는 열어주고, 억눌린 이는 자유를 주고,
억울한 이는 위로를 주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을 주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강자인 하느님께서
약자인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고,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하고, 인간인
우리처럼 생각하고 먹고 마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실천하셨고, 예수님의 이런 삶이 복음이 되었습니다.
강자인 사자가 약자인 염소처럼 풀을 먹기 위해서는 체질 개선을 해야
합니다. 달콤한 유혹도 물리쳐야 합니다. 불편함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래야만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공생활 3년 동안 선포하신 복음이고, 이것이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신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다만 제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이해는 했어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몸으로는 따르지 못했습니다.
역지식지(易地食之)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일 년 동안 사용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태양이 하루에 90분 정도
주는 에너지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부족해서
갈등과 분쟁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에너지가
부족해서 가난과 질병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역지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세상의 곳간에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우리의 욕망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신부님들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녁을 함께 하면서 열띤
토론을 하였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사목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평가를
하자는 신부님들은 몇 가지 이유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는 사목을 좀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평가를 받으면 자신이 사목을 잘하고
있는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스스로를 위한 자기 개발은 잘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본당과 신자 공동체를
위해서입니다. 열정과 신념을 갖춘 사제가 함께하는 본당 공동체는 더
많은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목적인 재능을
평가하면 특수사목과 같은 곳으로 파견하기도 좋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사제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평가를 받지
않으면 나태해질 수 있고, 현실에 안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와 본당 공동체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과 각성이 필요합니다. 사목에 대한 평가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제는 온전히 교회를 위해서, 복음 선포를 위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목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우려를 하는 신부님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평가를 할 수 있는지를 걱정하였습니다. 사목에 대한 평가는
주교님들의 몫이고, 주교님들께서 하실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제와
본당 공동체의 인격적인 만남을 어떻게 구체적인 수치로 정할 수
있는가를 걱정하였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목자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걱정하기도 하였습니다. 평가 받는 것에 대한 압박감과
두려움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생각을
하지만 교계제도는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목을 평가한다는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열띤 토론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열매를 맺는 농부를 이야기 하시는 것 같습니다. 농부가 자갈밭을
옥토로 바꿀 수 있다면, 가시덤불을 뽑아낼 수 있다면, 길가를 밭으로
만들 수 있다면 분명 씨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씨는 그 안에 생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 마음의 밭에 뿌려졌습니다. 말씀이 결실을 맺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들 마음의 밭이 비옥해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의 밭에 기도의 비료를 뿌려야 합니다. 사랑의 물을 주어야
합니다. 친절과 온유, 겸손과 나눔의 하우스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 말씀은 우리들 마음의 밭에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수십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와 가족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환하게 밝혀줄 수 있는 말씀의 열매들이 전해 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밭을 가꾸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역시 역지식지(易地食之)의 마음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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