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31일 수요일 [(백)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수도회] 익숙함과 굳어진 틀을 내려놓고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사무 24,2.9-17
† 복음 마르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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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다윗이 가드 예언자를 통해서 받은 징벌은 하느님께 지은 죄를 철저하게
용서받으려는 한 인간의 애절한 몸부림입니다. 죄를 짓고도 남 앞에서
떳떳하게 살고, 오히려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며 자신은 정당하다고
자부하는 위선이 다윗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임금이라면 자신을 지키고 대신 싸워 줄 병사들을 파악하는 인구 조사가
필요했고, 충분히 권력과 재산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탓을 다른
이에게 돌릴 수도 있었겠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않은 죄과를 혹독하게 받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자신 때문에 백성이 무고하게 다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에게 직접 재앙을 내려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런 다윗의
참회는 “이제 됐다. 손을 거두어라.” 하시며 하느님께서 징벌을 거두시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와 별다르지 않았던 동향인이
갑자기 위대한 예언자가 되어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은 진리를 왜곡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죄의 현실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이 본당이나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아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다 알고 있는 가족들 앞에서는
예언자로 살기 힘듭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족들을 대하면
진심은 통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교회 안에서
받은 소명을 기억하고, 겸손과 인내로 공동체에 봉사한다면, 우리
교회도 편견과 선입견의 늪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쇄신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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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2018년 나해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인구 조사를 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2.9-17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오늘은 분위기 있게 시 한 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라이너 쿤체의 ‘두
사람’이라는 시입니다.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결혼 축시로 자주 낭송되는 시입니다. 한 배를 탔다는 것은 같은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별은 목적지, 폭풍은 그곳에 가는 여정에서
부딪치는 예기치 않은 일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즉,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으면 삶의 여정 안에서 고통과 시련의 순간을 잘 이겨내면서
아름다운 삶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희망과 기쁨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마치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화를 내기도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모습 등이 바로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운명 공동체로서, 함께 고통과 시련이라는 폭풍을 이겨내면서 아름다운
별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고향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는 뜻밖에 사람들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분이 아니라, 배척해야 하는 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의 기적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나만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주변의 사람들 역시 내가 믿을
대상이고, 내가 함께 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닌, 진정으로 함께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 ‘우리’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요? 가족들이 속해있는 집단만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직장에서는 어디까지가 우리일까요? 우리의 범주를 계속해서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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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보다 먼저 죽은 사람들과 모두 함께
다시 태어나고 싶다. 대신 이번에는 내가 먼저 죽고 싶다. 내가 먼저
죽어서 그들 때문에 슬퍼했던 마음들을 되갚아주고 싶다
(어느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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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100명의 인디언들이 버펄로를 구석에 몰아서 창을 던집니다. 이
버펄로는 3~4개의 창을 맞고 죽고 말지요. 인디언들은 버펄로를
똑같이 100명이서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용맹하고
사냥을 잘하는 인디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맞췄는데 왜 나눠 먹어야 하느냐? 이제부터는 창에 이름을 써서
맞춘 사람이 버펄로를 차지하자.”
인디언들은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창을 맞춰서 버펄로를
죽인 사람이 차지할 수 있도록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창을 맞춘 사람만 버펄로를 차지해서 먹다보니 굶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먹지 못하니 힘이 없어서 사냥을 나가서 버펄로를 구석으로
몰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버펄로를 맞춘 사람만이 버펄로를 차지하니
그 누구도 구석으로 모는 역할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창을
던지기만 하니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의 삶 안에서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모두가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베푸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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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익숙함과 굳어진 틀을 내려놓고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31일 연중 4주 수, 마르 6,1-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익숙함과 굳어진 틀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에 사람들은 몹시
놀랍니다(1,22; 2,12; 7,34-37).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그분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자 의아하게 여기며 신성모독 행위로
판단해버립니다(2,7-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자 많은 이들이 놀랍니다(6,2).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과 친인척 관계, 직업 등에
묶여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6,3).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나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6,5)
고향사람들이 그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엔 기적도
없는 법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놀라게 한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나자렛 사람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과 경험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익숙함에 젖어 '지금 여기서' 드러나는 창조의 새로움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 자신들이 알고 있던 과거의
지식에 갇혀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그들을 불신으로 내몬 것은 과거의 틀이었습니다.
불신은 교만과 그릇되고 고착된 신념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 교만은 어김없이 불신의 늪에 빠지게 합니다.
또 자기 신념에 집착하여 충분한 근거도 없이 다른 사람을 나쁘게 보고
차별하고 비방하며 반감을 가지는 신념고착 또한 불신의 뿌리입니다.
신념과 편견 및 고정관념은 모두 태도나 생각을 경직시켜 불신을
불러일으키지요.
또한 겉모습과 외적 조건에 애착을 둘수록 주님과의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틈을 비집고 불신이 끼어드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인간적인 조건이나 능력, 출신 배경과 환경, 학벌과 외모 등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근심걱정 또한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밑바닥을 뒤흔들어
불신을 낳습니다.
우리 모두 과거의 경험과 지식의 틀에 매이지 말고, '지금, 여기'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새로움과 메시아의 구원활동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생명의 기적, 사랑의 기적을 이루실 수 있도록
(6,5)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고정관념을 버리고 믿음의 끈을
붙들어야겠지요.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보며
경탄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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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참 사랑은 주고 받는 것
2018년 나해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 6,1-6
참 사랑은 주고 받는 것
저희 사부 돈보스코 축일을 맞아, 그분의 제자이자 살레시오 회원,
청소년 사목자로서, 지난 제 삶 안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한번 돌아봤습니다.
아무래도 혈기왕성했던 젊은 사제 시절, 상처투성이에다 오갈 곳 없던
아이들과 스물 네 시간 동고동락하던 때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상처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힘든 점도 참 많았고, 부끄러운
일도 많았으며, 젊은 혈기에 아이들을 힘들게도 많이 했지만, 행복했던
순간들도 참 많았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이 녀석, 저 녀석들이 제게 다가와서 졸라댔습니다.
한 아이는 게임하러 가자. 지난 번 시합에서 끝장을 못봤으니, 오늘
담판을 지어야하지 않겠냐고 다그칩니다. 다른 한 아이는 제 팔을
붙들고 늘어지며 농구장으로 가자고 합니다. 자신의 3점슛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여주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다른 한 아이는 큰 고민이 하나
있는데, 자기 이야기 좀 들어주라고 졸라댑니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몸이 하나 뿐인게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우면서도,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돈보스코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 청소년들 가운데 있으면 행복합니다. 청소년들은 제 삶의
기쁨이요 전부입니다. 저는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공부하며, 청소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때 당시 청소년들 가운데 살던 저 역시 돈보스코와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회의나 피정으로 한 며칠
자리를 비우면 아이들은 궁금해 죽습니다. 외국이나 출장지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그까지 아이들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대체 어디갔냐?
뭐하고 있냐? 밥이나 제때 먹고 다니냐? 여행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을
제 주위를 뺑 둘러싸고 좋아서 난리가 납니다.
그 순간, 제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그래! 사랑은
오고 가는 것, 주고 받는 것, 흘러가는 것이로구나.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먼저 아이들로부터 사랑받아야겠구나.’
‘이 사랑스런 아이들을 두고 앞으로 내가 밖으로 돌아다니면 절대
안되겠구나.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들 사이에 현존해야겠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우나 고우나, 어떻게든 아이들 사이에 꾸준히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이로구나.’
200여년전 탄생하셨던 착한 목자 돈보스코의 청소년 사랑은 참으로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토리노 발도코를 떠나 로마에 한 몇 개월
체류할 때 아이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나는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내게 있어 단 한 가지 소원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여러분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섭섭함이요 괴로움인지
여러분은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창립자의 축일을 성대히 기념하는 우리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과 세상의
모든 부모들과 교육자들의 마음 속에도 돈보스코가 지니셨던 청소년들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 그 애틋한 사랑, 그 각별한 사랑, 그 사심 없는
순수한 사랑이 가득히 깃들길 기원합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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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 6, 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31일 수.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 6, 2)
지혜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새로운 길은 지혜를 통해 알게되고 드러납니다.
지혜 없는 열정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지혜 없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모든 시간을 살아가셨습니다.
지혜를 간절히 청하는 우리의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친밀한 관계안에서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는 부드러운 겸손으로 드러납니다.
새파란 청소년같은 지혜에서부터
영글어가는 노년의지혜로 영글어갑니다.
지혜는 서로의 약함을 갖고 물고 늘어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지혜 앞에 모든 이들은 소중합니다.
지혜로 영원한 기쁨을 향하여 걸어 가는 열정의 날 되십시오.
하느님의 지혜로 삶의 진정한 내면을
바라보고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지혜는 하느님의 뜻에 내어맡기는 참기쁨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 소중한 청소년들 모두 열정 가득한 이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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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4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 6,1-6
오늘 사제평의회가 열리고 서울대교구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인사이동의 대상이 되는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할 것입니다.
새 사제들은 내일 서품식이 끝나면 추기경님께서 처음으로 사목할
본당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교구에서는 인사이동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출신 본당으로 임명을 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같은 곳에 두 번 보내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로 같은 신부님과
두 번 지내게 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한 신부님, 사랑이 많은 신부님,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는 신부님,
미사시간 30분 전에 고백성사를 주는 신부님, 함께 사는 수도자와
신부님들과 잘 지내는 신부님, 성체조배를 자주하는 신부님, 합리적으로
본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신부님, 직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부님,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먼저 찾아가는 신부님이 떠나면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은 어디로 가셔도 사랑받는,
존경받는 신부님으로 지낼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도
그 자리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도 그런 신부님들만
있으면 인사이동을 하는데 어려움이 적을 것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신부님, 강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 신부님,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지 않는 신부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신부님, 지나치게
음주를 하는 신부님,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신부님, 세상의 것에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신부님은 출신 본당이 아니어도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
같을 것입니다. 다른 본당에 가서도 어려움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문제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철학을 머리로 배우기 전에 가슴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커다란 능력과 재능이 없어도 신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제들을 알아봅니다. 그런 사제들에게 마음을 열기 마련입니다.
비판과 비난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비판은 사상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을 했습니다. 비판은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비난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시 못합니다. 비난은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은 비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공정하고 올바른 비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비난은 하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심미숙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흔들리니까 사랑이다. 그대여 아파하지 말아라. 흔들리니까 사랑이다.
온갖 비바람 순순히 허락한 들장미가 눈부시게 아름답듯, 사랑도
그러하리. 때론 굳은 약속도 깨지고 뜨거운 다짐도 비틀거리면서 잔잔한
사랑으로 여울지는 것. 갈대가 수만 번을 흔들리고도 섣불리 꺾이지
않듯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처럼 사랑도 쉼 없이 흔들려야 그 향기가
오래오래 고운 법. 그대여 애태우지 말아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자꾸만
달아난 것이 사랑이다.”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청하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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