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2월2일 금요일 [(백) 주님 봉헌 축일 (봉헌 생활의 날)]
[수도회] 주님 마음에 드는 참다운 봉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제1독서 말라 3,1-4
† 복음 루카 2,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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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께서 원하시는 최고의 봉헌
2018년 나해 2월2일 금. 주님 봉헌 축일 (봉헌 생활의 날)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
지난주에는 무척 바빴습니다. 이곳저곳에 보내는 원고를 써야만 했고,
또한 방송녹음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쁘다보니 좋아하는 책도
읽을 수가 없었고,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지요. 또한 운동도 전혀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문득 이러한 상상을
해봅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이면 좋겠다.’
그런데 반대로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할 때도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로 어떤 기다림이 있을 때가 그러한 순간입니다. 어렸을 때 소풍
전날 빨리 하룻밤이 지나서 다음날 아침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기다렸던 결과를 빨리 보았으면 하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아마 이때는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면 좋겠다.’
천천히 갔으면 하는 시간도 있고, 또 빨리 갔으면 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대 시간들을 평균내보면 결국 하루
24시간이 가장 적당하고 아름다운 분량이 아닐까요? 이보다 길면
지루하고, 짧으면 무척 바쁘고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적당한 시간 24시간을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만을 봐도 주님께 얼마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향한
최고의 봉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는 오랫동안 성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기도와 단식을 하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는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더 큰 행복의 길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직접 보고 주님을 자신의 품에 앉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 내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봉헌이란 나중에
무엇인가를 받기 바라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봉헌했으니, 당신께서도 제게 무엇인가를 주셔야지요.’라는 마음이라면
참된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봉헌이란 주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맞춰서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최고의 봉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께 어떤 봉헌을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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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언제나 선악을 초월한다(프레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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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판단하지 마세요.
나무는 어디가 정면일까요? 특별히 어디가 정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볼 때마다 또 보는 위치에 따라 정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꼭 눈, 코, 입이 있는 부분이
정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뒤통수가 원래
하느님께서 만드신 정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고정화시키지요. 모든 곳이 다 정면이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사람의 한 가지 모습이 그 사람 전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격도
얼마나 다양합니까? 운전할 때 너무 바빠서 딱 한 번 속도를 내서
추월을 했습니다. 이를 두고서 아주 난폭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평상시에는 3~4시면 일어나지만, 어제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 5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일어났습니다. 이를 두고서
“빠다킹 신부는 게으른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고 간단히 단정 짓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한 가지
모습이 그 사람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한 가지의 모습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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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 마음에 드는 참다운 봉헌
2018년 나해 2월2일 금.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주님 마음에 드는 참다운 봉헌
한국 축구계에서 홀대받으셨던 박항서 현 베트남 남자 축구 대표
감독님이 지난 1월 한달 동안 베트남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지금 현재 그는 베트남에서 전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박항서 감독님께서는 짧은 기간 안에 선수들을 잘 다듬었고,
베트남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던 ‘아시아 23세 이하 축구 선수
대회’에서 준우승이라는 대단한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준우승도
준우승이지만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1억명에 가까운 베트남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고, 베트남 국민들의 자긍심을
한껏 드높여주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국제회의 갈때 마다 언제나 베트남 형제들에게 늘
미안했고, 죄인인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회의 때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항서 감독의 일거수일투족,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 모든
베트남 국민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과의 결승전에서 연장 후반전 단 1분만을 남기고 통한의
결승골을 내주고,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을때, 박항서 감독님은
라커룸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선수들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넸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왜 고개를 숙이느냐? 당당히 고개를 들어라.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입만 열었다 하면 천박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폭언들을 여과없이
쏱아내시는 분들, 말만 시작하면 국민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대는 분들의
수천, 수만 마디 말보다, 잘 정련되고 진심이 담긴 박항서 감독님의 단
한 마디 말이 백배, 천배 더 영양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베트남 참전’ 문제, 그리고 ‘라이 따이한’(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2세) 문제로 인해 언제나 지고 있는 큰 마음의 빚을
손톱만큼이라도 덜게 해주신 박항서 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이지 그분은 존재 자체로 대한민국의 국격을 크게 높인
애국자이십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봉헌생활의 날입니다. 특별히 봉헌생활을
하고 있는 저희 수도자들이 존재 자체로 주님 마음에 드는 선물이자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되는 하루입니다.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 마음에 드는 참다운 봉헌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은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말라키 예언서 3장 3~4절)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우리네 삶입니다. 제련사가 불순물을
걸러내듯 열렬한 기도를 통해 우리 안의 악과 죄를 걸러내야겠습니다.
진지한 성찰 작업을 통해 우리 내면의 불의와 우상숭배를
걸러내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 앞에 합당히 서기 위해 늘 자신의 가슴을 치고,
하느님과 이웃들 앞에 죄를 고백하며,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주님 마음에 딱 드는 의로운 제물로
변화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평신도, 성직자, 주교님!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보여주는 일, 이것이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이
자리에 불림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이 현실의 세계에서 녹록지 않음을 매일 체험하며
살아가면서 여러 도전과 어려움과 관성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 안에서 복음적 권고를 실천할 때 우리와 세상
안에 궁극적인 변화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신앙의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 축성생활 회원들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이 가난한 이들, 어려움과 절망에 빠진 이들, 고통
받는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 깊은 갈망 중에 있는 이들,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이들 가운데 있게 하시고, 진실한 연대와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 안에, 창조 질서가 보존되는 우리의 '공동의 집'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머물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활동과 지향들을
격려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2018년 축성생활의 날 담화문, 베네딕토 수도회, 한국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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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봉헌과 혼인|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2월2일 금. 주님 봉헌 축일 (봉헌 생활의 날)
루카 2,22-40
봉헌과 혼인
전에 유투브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조금 들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것저것의
예를 들면서, 그것을 내지 않으면 질병이든, 사고든, 세무조사든,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몫을 꼭 챙겨 가신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몇 배로 갚아
주시니 빚을 내서라도 꼭 정확히 셈해서 십일조를 내라고 설교를 했고
앉아있던 신도들은 계속 아멘이란 말로 응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렵지 않게 개신교 목사님들이 십일조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봉헌이란 말이 나오면
십일조를 가장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십일조는 내야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봉헌’이란 단어의 10분의 1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 특별히
봉헌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봉헌’이란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에서 배웠듯이 ‘자신을 봉헌함’은
‘사랑’과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즉, “아버지 - 성령님 - 아들”의 모델에서 아버지가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것’이 바로 아드님께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들이 아버지께 다시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이 아들의 ‘자기
비움’입니다. 또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드님께 ‘순종’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자기 비움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곳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입니다.
또 이 죽음과 부활을 일시에 체험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곧 그리스도의
‘세례’였습니다. 즉, 세례는 죽고 다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죽이니 성령님을 통한 부활이 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세
분은 한 몸을 이루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비움을 통한 사랑의 일치를 당신의 백성과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인간에게 내어주시는데 그
모습이 “성체”입니다. 인간 또한 그 성체를 영하기 위해 자신 안에
공간을 마련해 놓아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듯이 인간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의미입니다.
이 봉헌은 ‘감사 (Eucaristia)’의 형태로 표출됩니다. 이 ‘감사’는
찬미로 표현되고 그래서 성경에선 ‘찬미의 제사’ (히브 13,15)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어떤 봉헌이든 ‘감사’의 마음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봉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봉헌하시면서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렸음을 명심해야합니다.
감사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생명 자체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든 미사 중에 자신의 온
마음을 비워 주님께 봉헌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실지라도 그 마음 안에는 자신이 봉헌한 만큼만 은총이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자신 안에 자신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죄’라고 하고 그 ‘죄’는 ‘원죄’라는 형태로 모든 인간에게 인성을
통해 전달됩니다.
영혼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성모님처럼 자신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싶지만 그 안에 ‘교만과 육욕과 소유욕’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교만의 죄와, 그것을 통해 들어온 육욕의 죄, 또
그것으로 전달되어 카인이 짓게 되는 소유욕의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육욕과 소유욕도 교만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기에, 교만과 육적인
이기심이 카인의 제사가 하느님께 역겨운 것이 되게 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하느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봉헌을 하지 못하니 동시에 사제직도
잃게 된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봉헌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나는 내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
(갈라 2,19)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치는 결국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인데 죄라는 것이 들어와서 이기적이 되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의미가, 따라서, 三仇 (교만, 육욕, 소유욕)를 이기는
福音三德 (순명, 정결, 가난)에 있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의 일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엔 순명만이 아닌, 자신의 육신을 이기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 가난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복음삼덕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 봉헌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수녀님’들의
봉헌생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여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수녀님들은 ‘여성’으로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가 나아가야 할 상징적인 모습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어떤 분들은 ‘축성생활’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축성’이란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써 ‘성체’의
축성에 가장 적당한 말입니다. 수도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몸처럼 온전히 거룩하게 변하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거룩해짐은 서품이나 서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향주삼덕 안에서의 복음삼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봉헌의 모델을 찾으라면 성모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봉헌이란 자신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지닌 모든 것, 즉 빵과 포도주를 봉헌함으로써 성자
자신인 성체와 성혈을 받는 것처럼, 자신을 바치지 않으면 어떤
주고받음에서 오는 혼인의 일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처럼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한다는 것은
그 봉헌을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의 기적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으십니다. 그 이유는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원죄의
물듦에서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고 그만큼 자아가 비워졌기에 완전한
순종, 즉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며 당신 자신을 아버지 뜻에 봉헌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물론 그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나누어 가지시게 됩니다.
봉헌을 통한 온전한 한 몸이 되는 모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헌생활이란 이 한 말씀으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마태 16, 24)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버려야합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곧 매일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매일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다운 봉헌은 참다운 하와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참다운 하와가 되어 신랑이신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신 것처럼, 또 성모님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완전한 하와가
되어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하와가 되는 것이 바로 봉헌입니다.
왜냐하면 봉헌이란 말엔 자기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주 강하게
들어있는데 그것이 자신을 버린 완전한 믿음과 순종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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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봉헌 축일
교구청 경당에서 유아세례를 주었습니다. 아이 할아버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허리의 통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의사들도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병원에서
괴로운 날을 보내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통증이 가라앉고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기적이 가능 할 수 있었던 것은 누님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동생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였던
누님들도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의 유아세례를 미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영하 15도가 넘는 추운 날에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이의 부모도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에 아이를 봉헌하였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이유로, 나태함으로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성가정의 출발은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주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 받은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도 받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의 중심에 있는 공연장입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면 영광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거장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면 세종문화회관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과 성요셉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성전을 찾았으니 성전이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시메온은 진실함과 겸손함으로 많은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위해서 기도한 시메온은 이제 주님의
모습을 보았기에 더 할 수 없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시메온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본당에 교무금을 책정합니다. 매주 주일 헌금을
준비하고 감사헌금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봉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진 재능과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샘물은 자꾸만 퍼내야만 새로운 샘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재능, 시간, 마음을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더 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봉헌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기도 봉헌입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조금이라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봉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시간을 내서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는 선행의 봉헌입니다. 선행은 아주 작은 것부터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커다란 선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누군가 청을 하면 기꺼이 가셔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어느 식당의 식탁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도와
선행의 봉헌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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