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1일 세계 병자들의 날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2-11 07:06:39    조회 : 482회    댓글: 0

☆ 2018년 나해 2월11일 주일 [(녹) 연중 제6주일 (세계 병자의 날)]

[수도회] 손을 대시어 간격을 메워주시는 주님의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레위 13,1-2.44-46
○ 제2독서 1코린 10,31─11,1
† 복음 마르 1,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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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2018년 나해 2월11일 연중 제6주일 (세계 병자의 날)

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없습니다. 싱싱한 회를
먹습니다. 그런데 간장이나 와사비가 없습니다. 아마 고기나 회만을
먹기란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고기와 회의 맛을 더욱 더 돋우는 것은
바로 소금, 간장, 와사비 등이지요. 그렇다면 고기나 회 없이 소금,
간장, 와사비 등만을 먹게 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힘듭니다. 소금과
간장은 너무 짜고, 와사비는 너무 맵기 때문입니다.

소금, 간장, 와사비 등이 비록 그 자체만으로는 좋아할 수 없지만,
음식과 함께 어울렸을 때에는 그 음식의 맛을 최상으로 만듭니다.
어쩌면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혼자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적대시하는 사람 역시 내게 필요한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러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함께 할 때, 나의 가치가
더욱 더 높아질 때가 많았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과만 가까이 하는 사람과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의 사람이지만 어떤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의 가치가 더 높아
보입니까? 주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고,
진정으로 당신을 믿고 앞으로 용기 있게 나온다면 큰 사랑을
전해주십니다. 이 사랑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부정한 사람을 멀리했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레위 13,46 참조). 따라서 나병과 같은 병에 걸렸을 경우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고 만져도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면서 나병환자는 치유해주시지요.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지하는데도 나병환자를 만지셨을까요?
사실 말로만으로도 충분히 나병환자는 고쳐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의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치유의 은총을 얻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손을 댄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종속되어 계시지 않고 오히려 율법 위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러다보니
사람보다 율법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로써 하느님의 사랑도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둘째, 나병 환자가 지닌 육신의 상처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거나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서 무조건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병으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용기 있는 믿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를 뚫고서 예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이
용기 있는 믿음에 주님께서는 손을 대시면서 응답해주십니다.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깨닫습니다. 무조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배척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서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 베푸는 사랑입니다. 분리시키는 사랑이 아니라 일치시키는
사랑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는 내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 ~~~~~ ~~~~~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이 베풀어주는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다
(영국 속담).

~~~~~ ~~~~~ ~~~~~
배려

영국의 유명 수필가인 찰스 램의 체험 하나를 적어 봅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바쁘게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은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면서 문도 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연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됩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는 그날 당신을 기다리며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주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누추한 옷차림의 한
여성과 부딪쳤지요. 그런데 이 여성이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저의 집으로 달려 온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약한 사람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별 이후 그는 배려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사랑을 잃기는 했지만 인생의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배려하는 사람은 대단해보이지요. 나의 배려로 누군가를 돕는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을 더욱 더 높여주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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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손을 대시어 간격을 메워주시는 주님의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11일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마르 1,41)

손을 대시어 간격을 메워주시는 주님의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불편한 죽음의
골짜기를 메우는 사랑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계약공동체를
굳건히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께 속한 것과 이교적인 것을 엄밀히
구별하였습니다. 또한 일상적인 것들도 가능한 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지요. 그 결과 정(淨), 부정
(不淨)에 관한 세밀한 규정들이 생겨났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악성 피부병자들을 벌하셨으며, 그들이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악성
피부병자들은 사회와 격리되었으며,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지요
(13,46). 그들은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며 윗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악성 피부병은 ‘죽음의 첫 사자’요(욥기 18,13 참조), 가장 고통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병에 걸린 이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민수 12,12) 취급을 받았지요. 예수님 시대에도,
악성 피부병인 나병은 단지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인 사형선고와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나환자에게 대시어”(1,41) 나병을 깨끗이 고쳐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나환자를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짐을 잘 아셨지요. 그럼에도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정(淨)과 부정(不淨) 사이의 깊고 넓은 간격을
메워주십니다. ‘절대 순수요 온전함’이신 주님께서 부정에게 손을
내밀자, 소외와 차별과 단절의 골짜기가 생명의 강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격리의 대상이었던 악성 피부병을 고쳐주심으로써,
죽음의 상황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나병의 치유는 죽은
이의 소생과 같은 놀라운 일이었지요. 나환자의 치유 이야기는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만들어내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죽음의 틈'이 메워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손 대심'으로 하느님의 관심과 배려, 정의와
평화가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내 안에도 분열된 자아의 파편들이 꿈틀거립니다. 욕망과 애착 때문에
생겨난 육의 틈바구니이지요. 대인관계에서도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굳어버린 사고의 틀 때문에 갈등과 층돌이 일어납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와 신념, 이념과 세계관, 언어와 문화 등의 차이가
빚어내는 '죽음의 골짜기'가 널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골짜기를 메워주셨습니다.

악성 피부병은 소외를 부르는 증오와 편견의 덩어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득권자들로부터 소외된 빈곤층, 노동자,
이주민, 죄수들, 동성애자, 고독병에 걸린 이들 등 소외된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죽음의 틈'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저승사자처럼 예고없이 찾아드는 죽음의 골짜기를 메우는
두 가지 길을 알려줍니다. 하나는 산송장 취급을 받았던 나환자가
지녔던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자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닐
때 죽음의 골짜기를 메우고, 편견과 차별과 증오의 덩어리를 깨부수어
소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갈라진 틈을 메워나가야겠습니다. 정(淨)과 부정(不淨)의
다리를 건너,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견뎌내는 사랑으로,
서로를 치유하고 부패한 사회를 재생하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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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병실 사도직

2018년 나해 2월11일 연중 제6주일(세계 병자의 날)

병실 사도직

오늘도 길고 지루한 투병생활로 힘겨워하고 계시는 환우 여러분들,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때로 왜 하필 이 몹쓸 병이 내 인생에
끼어들어 나를 못살게 하는가, 부르짖으며 눈물도 많이 흘리셨겠지요?
때로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의 주님, 치유의 주님이시라면서 어찌
이리도 참혹한 현실을 내게 겪게 하시는가, 원망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꽤나 오랜 세월 끔찍한 병치레를 해봐서 환우들이 오늘 겪고 있는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도 어두운 터널 속에서 답답해하던 그 시절, 참으로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너무 힘겨운 나머지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것 내려놓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만큼 병고는 끔찍하고 혹독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드셔도 이 한 가지는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끝이 보이지 않아
괴로우시겠지만 이 고통에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 비록 더디게 오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반드시 오신다는 것, 그분께서는 기필코
내 인생에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 머지 많아 이 서러움의 뜨거운 눈물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환우들께서 품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투병생활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투병하느라 돈이란 돈은 다
까먹고,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통을 잘 참아 견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병과 맞설 때,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아 모든 환우 여러분들, 지금 여러분들이 겪고
계신 병고에 분명히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환우 여러분도 병실 안에서, 병을 통해서도 훌륭한
사도직에 참여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여러분 주변 사람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환우 여러분과
동고동락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자주 해드리는
것, 너무나도 훌륭한 사도직입니다. 여러분의 치료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의료인들에게 환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 역시 좋은 병실
사도직입니다. 여러분이 시시각각 온 몸으로 체험하는 고통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역시 정말 좋은 병실 사도직입니다.

사랑하는 환우여러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권고에 따라 여러분의
고통을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하시길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도 인내하며 받아들이면 가치가 있고, 온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시길 부탁드립니다.

“힘을 내십시오.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지금 고통 받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도 십자가 아래에서 말없이 고통을 받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통까지 짊어지고 계십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과 결합될 때, 그 고통은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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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6주일

지난 주일에 선배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12년 동안
의식이 없이 병원에 계셨습니다. 김용화 바오로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후배 신부님이 의식이 없이
병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시간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신현박 아우소니오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분들이 죄가
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고 일주일 만에 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병명은 유행성 출혈열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의식이 없이
1주일을 지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치료해 주셨고,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의식이 돌아왔고,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잘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라고 합니다.
제게 주어진 삶을 ‘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감사하고, 더욱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저는 두 번의 치유 체험을 하였습니다. 하혈이
심해서 병원에서 포기했던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자매님은
건강을 회복하였고, 성당에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저의 능력이
커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저를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패혈증으로 위독했던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형제님께서도
건강을 회복하였고, 성당에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잘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저를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피부 질환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가렵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름에도 긴 팔을
입어야 하고, 사우나에도 가기 힘든 고통입니다. 한방 치료도 받아
보았고, 피부과에서 치료도 받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아직
상용화 된 약은 아니지만 그 약으로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친구와 함께 그 친구를 위해서 물이 좋다는 온양온천엘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객실에도 온천수가 나오기 때문에 친구는
객실에서 온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약이 친구의 피부를
깨끗하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천시를 받았고, 나병환자는 죄를 졌기 때문에 생긴 거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깨끗해진 나병환자는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을까를
생각합니다. 아마 그 나병환자는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얼굴에 있던 점을 뺀 적이 있습니다. 점 하나를 뺐을 뿐인데도
기분이 좋았는데 온 몸이 흉하게 망가지는 나병에서 깨끗하게
치유되었으니 정말 행복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서 아마 꿈도 그렇게 꾼 것 같습니다. 제 몸에 이상한
것들이 생기는 꿈이었습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생길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음식을 잘 못 먹은 것도 아니고, 피부병이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꿈에서 보니, 제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 제
욕심대로 판단할 때, 시기와 질투를 할 때 제 피부에 그런 이상한 것들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약을 발라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천엘 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욕심을
버리니까, 모든 것을 받아들이니까, 하느님의 뜻에 맡겨 드리니까
그런 상처들이 깨끗하게 없어졌습니다. 사실 꿈속에서 본 것은 제
마음의 피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어쩌면 나병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지고, 갈라지고, 상처로 곪아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나병은, 눈에 보이는 피부병은 병원에서 의사들이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영혼의 나병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엔 병들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전과자로 낙인이 찍혀 사회에로의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누군가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방에서 혼자 외로움에 떨고
계시는 우리 주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지치고 힘든
사람들 나에게 와서 쉬어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길 합니다. “교우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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