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1일 행복한 사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2-21 06:23:19    조회 : 503회    댓글: 0

☆ 2016년 가해 12월21일 수요일 [(자)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수도회] 하느님을 품는 축복과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아가 2,8-14
† 복음 루카 1,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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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늦둥이를 잉태한 엘리사벳과 달리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를 잉태한 처지입니다. 그러니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도 크게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얼마나 따스한 위로입니까?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찬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면 나는 더 큰 힘을 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공통된 아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일은 엄청난 고난의
길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런 길을 걷도록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뜻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나로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이 하나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이기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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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한 날로 만들어야 합니다.

2016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 2,8-14<또는 스바 3,14-18ㄱ>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이제 예수님의 기쁜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이 기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날을 기뻐합니다. 단순히 하루 쉬는 날이라고 해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 년에 딱 하루 기념하는 성탄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매일이 성탄절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성탄의 기쁨을 제대로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일도 성탄이니까 내일 기쁘면 되니까요.
이렇게 내일 내일을 외치다보면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서 그냥 평범한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니 매일 매일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한 순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연인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말합니다.

“오늘 아주 특별한 날이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여자 친구는 자신이 잊어버린 무슨 특별한 날이 있는가 싶어서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일도 아니고, 특별히
기념할 날도 아닌 것 같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갖고서 “정말로
모르겠어. 오늘이 무슨 날인데?”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남자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둘이 사귄지 284일 되는 날이야.”

뭘 이런 것을 다 특별하게 여길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남자
친구에게 사귀기 시작한 날부터 시작된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284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날에도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이 순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날도 의미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적극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 성모님이십니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이런 성모님을 향해 엘리사벳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가장 힘이 되는 말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준 엘리사벳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날을 맞이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힘차게 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한 날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나에게 그런 날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그런 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한 남들에게 그런 특별한 날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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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끌어올려 줄 때 말고는 사람을 내려다보아서는 안 된다
(제시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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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의 미덕(‘좋은생각’ 중에서)

서예가 위유런은 명성이 자자했다. 하루는 제자가 말했다.

“지금 저잣거리에 위유런의 글씨라며 모조품을 간판으로 건 식당이
많습니다. 이들을 당장 혼내십시오.”

“자네가 본 식당 이름이 무엇인가?”
“베이징 자장면입니다.”
위유런은 고개를 끄덕이곤 생각에 잠겼다.
“나서기 곤란하시면 제가 가서 간판을 내리겠습니다!”
제자가 뛰쳐나가려 하자 위유런이 화선지에 몇 자 적어 건넸다.
“이걸 식당 주인에게 주거라.”
제자는 화선지에 적힌 글씨를 보고 당황했다.

“이건 ‘베이징 자장면’이 아닙니까?”

“가짜 글씨를 간판에 내걸 정도로 내가 인정받는다는 뜻 아닌가.
잘 모르는 이들은 모조품을 보고 오해할 터, 내 필체는 몸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제자는 식당으로 달려가 주인에게 글씨를 전했다. 주인은 위유런의
깊은 뜻에 탄복하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자신이 손해를 보았다 생각하면 어떻게든 적대시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의
삶은 유한할 뿐인데, 왜 함께 살아가는 포용의 길보다는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배척의 길을 선택할까요? 지금 내 자신은 어떠한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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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하느님을 품는 축복과 기쁨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루카 1,39-4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43)

하느님을 품는 축복과 기쁨

오늘 제 1독서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교회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와 창틈을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는 노루나 젊은
사슴과 같은 연인으로 비유합니다(아가 2,8-9.14). 그렇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설레고 벅찬 기쁨을 안겨주며 복된 ‘은총의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 하느님을 품음으로써 은총을 가득히 받으시고,
충만한 기쁨의 어머니가 되셨으며(루카 1,28),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1,42). 여기서 무엇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는
내 삶의 질을 가늠하는 관건이 되지요.

남을 해치려는 생각과 악하고 불순한 마음, 분노와 증오를 품고
살아가면 영혼이 혼탁해지지 않습니까? 무엇을 더 소유할까에 온통
집중하면 그 대상에 매이게 되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맛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복되고, 참 기쁨 중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이신 하느님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기쁨이신 분이 그녀를
방문하시어 함께해주셨기에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리아의 기쁨은 일시적으로 발출된 정서적 기쁨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진정 행복해지고 싶거든
기쁨 자체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품어야만 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복된 존재가 되기 위해 마리아의 발걸음에
집중해봅시다. 마리아는 구원의 기쁨을 위해 주님의 몸만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인류구원을 위한 죽음에 이르는 수난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참 기쁨을 향한 복된 마리아의 발걸음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 서둘러’(1,39) 유다 산골로 향합니다. 기쁨을 찾아가는
복된 길은 늘 그렇게 애착을 버리고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버리지 않는다면 자유도 기쁨도 맛볼 수 없습니다(9,62 참조). 애착의
끈을 붙든 채 행복을 바라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마리아는 얼떨결에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대답하고
말았지만 불안하고 무서웠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임신한 몸으로
그 먼 여행길에 오릅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기쁨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굴레를 안은 채 주님께로 가는 것이지요. 그 길이야말로 참 기쁨을
주는 유일한 길임을 믿으면서...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얘기를 들었을 때에만 해도 행복한 가정은
꾸릴 수도 없고 죽음만이 남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품고 길을 떠납니다.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은 구세주께서 자신의 길을 준비할 요한을 만나러 가는
‘저 낮은 곳으로의 순례’였습니다. 기쁨의 길은 그렇게 자신과 소유를
떠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움직임에서 샘솟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애착을 버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기고
주님을 품음으로써, 진정 복되고 기쁜 주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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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80회 생신을 진심을 축하드리며
 
2016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45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80회 생신을 진심을 축하드리며

나자렛의 산골 소녀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아인카림으로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길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선 제 머릿속에
떠오른 길 떠난 이유는 ‘난감함’ ‘당혹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처녀
잉태’란 엄청난 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소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고, 점점 불러오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당혹해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산모였던 마리아가 자상한 시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 아무런
걱정 없이 출산을 준비했어도 힘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는 특별한 잉태 앞에 가녀린 소녀
마리아가 감당해야했을 괴로움이 얼마나 컸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윽고 기진맥진한 마리아가 유다 산악 지방에 유치한 아인카림에
도착합니다. 산전수전 끝에 겨우 사촌 엘리사벳의 집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어떻게 보면 미혼모에다가 오랜 여행길에 지칠 대로 지친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측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혼모 마리아를 맞이하는 여인의 모습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호호백발 할머니, 돌아가실 날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 노파
엘리사벳이 불러오는 배를 겨우 감당하며 마리아를 맞이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니 참으로 웃기는 장면이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쪽
여인은 이제 겨우 소녀티를 벗어난 미혼모요 다른 한쪽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해외토픽감이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의 노산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못할 사건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상봉이었지만, 하느님의 시각, 성령의 눈길로 바라보니
이보다 더 기쁜 사건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천사로부터 뚜렷한 사명을 부여받은 두 분이었기에 너무나도 웃기는
이 상봉장면이 절대로 웃기지 않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은 이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뚜렷이 현존하고 계신다는 명확한 표지였습니다.

따라서 미혼모와 노파 두 사람은 두 손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터트리지 않습니다. 서로를 얼싸안고 위로의 말을 던지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대단히 특별한 큰일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노래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고 환대받지 못하던 마리아를 극진히 환대하는
엘리사벳의 모습이 눈에 띕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이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복음 1장 42~45절)

며칠 전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80세 생신을 맞아 바티칸
광장 근처에서 기거하는 노숙인 8명을 바티칸 식당으로 초대하셨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습니다. 습관 되지 않은 분들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겠지만 우리 교황님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벤트였습니다. 편안한 얼굴로 노숙인들과 함께 앉아서 점심식사를
하시고 그들과 담소를 나누시는 모습에 참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느낌은 저만 받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교황님 생신 관련
기사가 국내 일간지에도 일제히 보도되었는데, 인터넷 기사에 딸린
댓글을 바라보며 저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수천 수 만개의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었는데, 교황님의 감동적인 모습을 칭송하는 댓글도
많았지만, 다른 성직자들, 타종교 지도자들, 정치지도자들은 과연 뭘
하고 있는가? 하는 비난의 댓글들도 상당했습니다. 요즘 저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님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ㅋㅋ

저도 유학시절 바티칸 광장 주변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습니다. 마치 엘리사벳이 오랜 여행길에 지친 마리아를 따뜻이
환대하듯이 노숙자들을 극진히 환대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
우리 교회의 희망을 봅니다. 교황님의 80회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부디 오래 오래 우리 곁에 남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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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림 제4주간 수요일

2016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45

제가 도움을 주고 있는 ‘복음화 학교’에서는 1년에 5번 정도 피정을
합니다. 많은 분들이 피정을 통해서 영적인 힘을 얻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를 해 줍니다. 지난 5월에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서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습니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9월에는 여의도 성당 신부님께서 ‘누가 저희의
이웃입니까?’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피정을 마치면서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사연씨가 부른
‘만남’입니다. 멜로디가 감미롭고, 가사도 아름답기 때문에
애창곡으로 부르곤 합니다. 오늘은 곧 다가오는 성탄을 기다리면서
‘만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였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두 분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두 분의 만남은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
만남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하였듯이, 우리들 또한
소중한 만남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웃들을 축복하면 좋겠습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장롱 위에 있는 물건을
꺼내다가 의자에서 넘어져서 팔이 부러지신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제게 감사하다고 말을 하셨습니다. 오른팔이 아니고 왼팔이라서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다리가 아니라 팔이라서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주어진 일들을 감사하게 생각하면 행복은 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항암치료를 받는 분께서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감사하였습니다. 결혼 5년 만에 아이를 가진 엄마가 있었습니다.
쌍둥이였고, 일찍 조산해서 아이들이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조금 건강이 회복되어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살아서 유아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은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지냈습니다. 이 또한 행복의 시작입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할 때 이루어집니다. 물건은 자기의
기능을 다 할 때 유용합니다. 시계는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마이크는 소리를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물건들은 쓸모없고, 쓸모없는 물건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하겠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 중에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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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행복한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45

행복한 사람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마리아가 행복한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곧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브12,2).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7-28)고 하셨습니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뜻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고, 제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른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믿고, 믿는
만큼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나는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이 유혹하며 손짓하지만 그것을 거절하며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며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시기바랍니다. 주님만이 내 행복의 전부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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