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월5일 목요일 [(백)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수도회] 더불어 사랑으로 건너는 죽음의 다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요한 3,11-21
† 복음 요한 1,43-51
***** ***** *****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또 다른 요한의
제자에게 이미 했던 말입니다(요한 1,39-40 참조). 필립보는 같은
고향 출신인 안드레아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필립보는 이 기쁜 소식을 또다시 나타나엘에게 전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당신의 예지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필립보와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라삐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성경 공부에 전념하곤 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나타나엘
역시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곧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더 신비로운 계시를 해 주십니다. 창세기
28장 12절에 나오는 야곱의 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야곱과 하느님 사이를 오가면서 축복을 전해 주는 예표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 기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축복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기쁨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하고 있습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 *****
◈ [인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려는 노력
2017년 가해 1월5일 목요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제1독서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1-21
복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3-51
갑곶성지의 밤은 아주 조용합니다. 그래서 밤에 성지를 산책하면
이렇게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있는 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는 일부러 찾는 곳을 저는
이곳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어떤 분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렇게 넓은 공간에 혼자 살면 정말로 힘들겠습니다.”
그러면서 외롭지 않느냐, 무섭지 않느냐 등의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십니다. 어렵고 힘든 점만을 생각하면서 갑곶성지를 바라보면
살기 힘든 곳이 되겠지만, 좋은 점 그리고 긍정적인 부분들을
생각하면 이곳보다 나은 곳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쓸모없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떤 창조물 안에서든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비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면 삶 자체가 놀랍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신비들에 둘러 싸여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대충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죄스러운가 싶습니다. 그 신비와 아름다움을 두고
부차적인 것들에 눈을 팔며 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까요? 분주히 오가다 허겁지겁 생을 마감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하느님의 신비 속에서 살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깊이
묵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정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아주 간단히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또한 가까운 지인인
필립보를 만나 예수님에 대해 들었지만 나자렛에서는 특별한 인물이
나올 수 없다는 단정을 지으면서 무시하려고 하지요. 마치 시골 출신인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선입견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선입견이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깨닫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변화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큼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깨닫고 자신의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곧바로
뉘우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길에서도 곧바로 방향을 바꿔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 ~~~~~ ~~~~~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면 행동해도 허물이 없고, 말해야 할 때 말하면
말해도 후회가 없다(유도원).
~~~~~ ~~~~~ ~~~~~
감사합니다.
내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 때 우리들은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예를
들어, 식당 같은 곳에서 특별한 서비스나 친절함을 받게 되면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합니다. 즉, 친절함을 느꼈을 때, 특별한
도움을 받았을 때 우리는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의 표시를 하는 사람은 90% 이상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 감사의
표시가 50% 이하로 줄어들 때가 있습니다. 과연 언제일까요?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람에게는 감사의 표시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식사를 해 주는 것, 집안 청소와 정리를 하는 것, 심부름을 하는 것
등등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를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무관심
속에서 사랑이 가득해야 할 곳이 오히려 아픔과 상처가 가득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까운 사이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감사하다고 표시하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감사와 사랑을 직접 말로 표시하면 18.5% 더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이 감사와 사랑을 표시해서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 *****
◈ [수도회] 더불어 사랑으로 건너는 죽음의 다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요한 1,43-51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1요한 3,14)
더불어 사랑으로 건너는 죽음의 다리
오늘 제1독서는 삶의 방향을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4-16)
우리의 일상은 죽음과 생명 사이를 오가는 ‘다리 건너기’입니다.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은 생명을 간절히 갈구하면서도 정작 생명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지 못한 채 늘 죽음 언저리에서 서성입니다. 건너려
해도 마음뿐 세상의 달콤함이 뒤에서 붙들며 주저 앉아버리곤
하지요. 왜 우리는 아들 이사악을 바친 아브라함이나 목숨을 기꺼이
바치신 예수님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느님보다 현세의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늘 번민과 갈등, 혼돈과 어둠이
일어나고 고통이 이어지는 것임을 다시 상기해야겠습니다.
요한 1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길은 사랑뿐임을 알려줍니다. 사랑하지 않는 한 그 무엇을 한다
하여도 죽음 안에 머무른다는 것이니(1요한 3,14)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공허한 사랑의 메아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은 나의 실제 얼굴을 보고자 하십니다.
죽음의 다리를 건너 생명의 땅으로 가기 위해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거나,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3,17-18)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때 영원한 행복으로 갈
수 있는 ‘생명의 다리’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명의 길이요 구원으로 가는
다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된 필립보의 태도를 본받아야겠습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요한 1,45) 하고 알려주지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그에게 “와서 보시오.”(1,46) 하고 말합니다.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을 말과 행동을 통해 실제로 체험하도록
이끌어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죽음의
다리를 건너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니라 사랑을 거부하며 죽음에 머물고 있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그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메말라 가는 오늘입니다. 우리 서로 서로 참
생명과 행복으로 건너갈 수 있는 사랑의 티켓을 얻어 실천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됩시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처럼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죽음의 다리 저편에서 펼쳐지는 ‘생명과 행복의
축제’에 함께 참여하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 *****
◈ [서울] 주님 공현 전 목요일
2017년 가해 1월5일 목요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요한 1,43-51ㅍ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결심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금연을 결심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수영을 하기로 결심하고, 어떤
분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기를 결심하고, 어떤 분들은 새벽
미사를 가기로 결심하고, 어떤 분은 책을 읽기로 결심하고, 어떤
분들은 봉사활동을 하기로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새해에는
피아노 연습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그림에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잡은 핸들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듯이, 사람의 몸은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위한 삶을, 본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멈추면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다이어트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체중이 너무
나가서 다이어트를 결심했습니다. 어떤 분은 당뇨가 시작된다는 말을
듣고 다이어트를 결심했습니다. 어떤 분은 10년 후에 당뇨가 생길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다이어트를 결심했습니다. 다들 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방법은 달랐지만 원하는 만큼 체중 감량을 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음먹은 것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명동에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식당이 있습니다.
요리하는 분들의 정성을 볼 수 있었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청결하기 때문에 믿음이 가는 식당입니다. 마치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감출
것이 없다면, 자신이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세요.’ 지난해 모든 혼란은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연탄 한 장’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 *****
◈ [수원] 나타나엘이 주님을 만나 변화 됨/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복음: 요한 1,43-51: 필립보와 나타나엘과의 만남
나타나엘이 주님을 만나 변화 됨
예수님은 필립보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그를 부르신 것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소명들에 많이 소개되는 형식이다
(참조: 마르 2,14; 10,21; 루가 9,59). 이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주님께
인도한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자기와 자기 동료들이
예수님에게서 모든 구약성서를 의미하는 형식인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45절) 분을 만났다고 확언을 한다
(참조: 1. 모세와 관련하여: 루가 16,29.31; 24,27;
사도 26,22; 28,23; 2. 율법과 예언서: 마태 5,17; 7,12; 11,13; 22,40;
루가 16,16; 24,44; 로마 3,21).
나타나엘 역시 성서연구에 열중하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찾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필립보는 다른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보통 유다인들이
말하듯이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하였다(45절).
예수께서 탄생하신 도시의 이름을 듣자마자 나타나엘은 즉시
회의론을 편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46절). 이 역설적인 질문에는 메시아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지방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데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요한 7,52의 경우와 같이,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나자렛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중요성이 없는
곳이었고, 거기에 대해서는 구약의 어느 곳에도 언급된 곳이 없는
곳이다.
가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나타나엘은 요한 6,42의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비천한 기원에 대해 경악하고 있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육으로 왔다는 것은 큰
어려움일 것이다. 나타나엘은 신앙으로써만이 장애의 원인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을 지상적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모델이다. 그 신앙은 바로 예수께서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권위로 일으켜주시는 신앙이다.
필립보는 그에게 “와서 보시오.”(39절 참조)라고 하며 권한다(46절).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아직 인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에 깜짝 놀라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48절) 하셨을 때, 그는 완전히 믿게 되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을 연구하기 위한 것으로 아마
나타나엘은 메시아 대망에 관계되는 성서를 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49절). ‘하느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예수께서
하느님과 가까이 계신 분이며, 그분과 연결되어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또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50절).
제자들은 이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1절).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의 ‘장’이고,
사람의 아들 안에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참조: 요한 2,11; 11,40; 14,8이하)는 것이며,
‘하늘이 열린 것’은 천사들이 먼저 내려오는 것 그리고 올라가는 것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 땅에 있는 ‘사람의 아들’로부터 천사들이
기도와 청원을 가지고 하느님께로 오르고, 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시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굳은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제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임을 약속 받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이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분을 직접
체험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체험으로 만나는 그분은
우리에게 더 큰 일들을 보여주실 것이며 깊은 신앙에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이러한 삶을 조금이라도 시도하면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이루어 간다면 우리도 나타나엘과 같은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주임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 *****
◈ [청주]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월5일 목요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요한 1,43-51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본받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 시켜 주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은 벳사이다인데 필립보도 벳사이다
출신입니다.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 요르단강 하구에
위치하며, 그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입니다. 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났고 안드레아가 형 시몬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나타나엘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5,1). 많은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는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고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의해 발길을 옮기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나를 먼저 알고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 이십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 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 하신 것입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쿤등한 반응을 보인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그는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창세28,16-17).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2절 이하를 보면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