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2월15일 수요일 [(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수도회] 눈을 뜨고 빛과 사랑으로 찾아가는 귀향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8,6-13.20-22
† 복음 마르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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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무엇인가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우리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사람이 겪는 답답함은 오히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를 치유해 줄 것을
청한 쪽은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장애를 지닌 이들이
당하는 수모와 멸시는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신체적인 장애로 고통도
크겠지만, 모든 장애가 죄로 인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받은
정신적인 상처가 더 컸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눈먼 이의 장애를 없애 주는 기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 주시고, 다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명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눈먼
이가 받았던 신체적인 상처보다, 치유되고 나서 자신을 멸시하고
천대했던 이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 뒤에 겪게 될 심리적인 상처를
막아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겪는 삶의 아픔들은 관계에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신적인 능력을 내게 심어 주셨기에, 내가
스스로 깨닫고, 결심하고, 노력하면 세상에 극복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하게 하며, 낙심에 빠뜨리는
일들은 모두 우리 사회가 병처럼 끌어안고 있는 편견과 오해, 그리고
이기적 집단주의에서 생깁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사람의 마음이 악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적
현실을 저주가 아닌, 자비로 보듬어 안아 주시고, 땅이 있는 한 자연의
본성을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야말로,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비의 마음이자, 치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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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나와 내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해야
2017년 가해 2월15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노아가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8,6-13.20-22
복음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2-26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의 가장 큰 갈등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다는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일상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유혹들에 쉽게 넘어가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성당 나가는 것이 꺼려진다고 말씀하시고, 또 실제로 그런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갈등도 있지요. “어떻게 성당 다니는 사람이 저럴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저렇게 죄를 지으면서도 뻔뻔하게 성당 나가는
모습이 보기 싫다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포기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자신이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 그리고 성당 안에서 계속 죄인을
봐야한다는 것은 분명히 큰 갈등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사이다라는 지명은 ‘어부의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안드레아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입니다.
이 사도들의 고향에 주님을 볼 수 없는 눈먼 이가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을 알아 뵙고 따르는 사도들의 고향이지만,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분명히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 안이지만, 이 안에 꼭 선과 의로움이
가득할까요? 분명히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하면서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장면은 또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얹으셨지만 단번에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인다고 말을 하지요. 그러자 다시 손을 얹으셨고, 이로 인해 그는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치유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점차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사의 은총으로 단번에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까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미사를 보아도 별로 변화가 없는 것 같다고,
고해성사를 봐도 똑같은 죄를 또 짓는다고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변화되면서 점점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와 내 이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을 나의 일생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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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와 남의 다친 영혼을 달래는
것뿐이다(김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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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배설물 구아노
인터넷에서 우연히 구아노라는 비료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페루 여행을 갔을 때 들린 ‘발레스티섬’에서 본
‘구아노’가 생각나더군요. 이 섬은 새들이 배설을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섬 전체가 ‘똥’으로 가득하지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이 섬,
그런데 이 ‘똥’ 때문에 1879년에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가 태평양
전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우선 ‘구아노’는 새들의 배설물이 쌓인 퇴적층이자 세계 최고의 유기농
비료입니다. 이 섬에 수천 만 마리의 새들이 몰려와서 배설을 하는데,
이 배설물은 아무런 첨가물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천연유기농
비료가 된다고 합니다. 이 최고의 비료인 ‘구아노’를 놓고서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배설물 때문에 전쟁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그 누가 ‘똥’이 중요하다고 할까요? 하지만 이 ‘똥’ 때문에 전쟁까지 날
수 있다는 사실...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쓸모없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귀한 존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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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bbadaking.speedgabia.com/img/20170215_02.jpg" width="500" height="375">
페루의 팔레스티섬.</center><ul>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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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눈을 뜨고 빛과 사랑으로 찾아가는 귀향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2월15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마르 8,22-26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마르 8,25)
눈을 뜨고 빛과 사랑으로 찾아가는 귀향길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요르단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하구 동편에 있는 벳사이다로 갑니다. '어부의 집’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이지요(요한 1,44).
어부의 집에서 어부들이 온 세상이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자, 불행을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
(마태 1,20-24).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는 소통과 교감을 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끊어진
채, 영혼의 어둠과 타락 상태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는 주님과 떨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어디에서 주님을 찾아야 할지
모른 채, 자신을 어둠의 동굴 속에 둘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온전히 자신 탓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더불어 행복하기를 갈망하던 애정 넘친 이웃들이, 그
소경을 예수님께 데려와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차례에 걸쳐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마침내 소경은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마르 8,2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변화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펴봅시다.
그분께서는 고쳐달라는 청에 대해, 단 한마디도 토를 달거나 묻지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시려고 움직이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철저히 타자중심으로 움직이며, ‘곧바로’ 응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주십니다. 영혼의 어둔밤 속에서 헤매는 그 눈먼 이의 어둠을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으시며, 사랑으로 함께하며
해방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왜 그런 잘못을 했느냐고 묻거나 훈계하려고
하지 않고,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올바른 사랑의 태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의 고향인 그곳에서 눈먼 이를 고쳐주셨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예수님과 계속 함께 지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고향에, 눈이 먼 상태,
곧 영혼의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도 눈먼 상태에 있을 때가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벳사이다의 유다 백성들에게, 눈을 뜨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어, 그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려가서 고쳐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그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 하십니다(8,26).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인간을
옭죄는 전통과 편견, 차별과 불의의 뿌리가 있는 ‘어둠의 집’이 아니라
‘믿음의 집’, ‘사랑의 집’, 자유와 해방의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의 가치보다 더 중요시하며,
육(肉)의 질서를 따르는 소경이 되지 않도록 빛이신 주님께 내 손을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주님 사랑과 진리에 눈을 떠, 자신과 이 사회의
어둠과 불의를 식별할 수 있도록 회개하여, 주님 사랑의 집으로
되돌아가야겠습니다.
주님, 깨끗한 마음의 눈으로 제 영혼의 어둠을 ‘똑똑히’ 볼 수 있게
해주시며, 당신 사랑의 눈으로 세상의 어둠을 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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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주님
2017년 가해 2월15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주님
복음 : 마르 8,22-26
벳사이다의 눈 먼 사람 치유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운 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한 비참한 인간과 1대 1로 마주하시니
말입니다.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티끌 같은 한 인간과 개별적으로
접촉하시고, 인격 대 인격으로 대해주시니 말입니다.
벳사이다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눈먼 사람에게는 참으로
은혜롭고 눈물이 핑 돌도록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그를 멀리 했으며 인간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는
인간사회로부터 멀리 동떨어져서 홀로 눈물 흘리며 외롭게 살았습니다.
눈떠도 암흑 눈 감아도 암흑, 사는 게 참 ‘거시기’했습니다.
더 괴로운 것은 당시 자신을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당시 사람들은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실상 아무 죄도 없었지만 중죄인처럼
위축되어 숨죽이고 그렇게 하루하루 지옥 같은 인생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적처럼 예수님을 만납니다. 누군가가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 먼 이를
데려온 사람을 생각하며 나도 뭔가 대단한 일이나 엄청난 일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그 누군가를 예수님께로 데려가기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눈 먼 이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오늘따라 특별합니다. 그냥 말
한마디면 치유가 가능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손수 그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
공사다망하신 분이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동구 밖까지 산책을 나가신
것입니다.
눈 먼 이는 정말 오랜만에 인간 대접을 받았습니다. 다들 멀리하고,
다들 서둘러 자신을 떠났는데, 예수님께서 그리도 오랫동안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걸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손을 통해 전해 오는 온기,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눈 먼 이는 예수님과의 그 따뜻한
접촉을 통해 외적인 치유는 물론 내면의 치유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한 고통 받는 인간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그의 남모르는 사연을 들어주셨다는 것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두 눈에 친히 당신 침을 바르시고, 그의 머리에 안수까지 하시며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정말이지 큰 감동을
선사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게 눈물겹도록 은혜롭습니다.
우리가 다가가기 전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유심히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의 상황을 파악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고민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관찰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또 얼마나 부드럽고
자상하신지 모릅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함께 공감하고 슬퍼하며,
어루만지고 일깨우며 그렇게 미풍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저절로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십니다. 치유는 벌써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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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6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2월15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 8,22-26
우리말에 본다는 표현은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손을 본다.’는
말은 물건을 고치는 경우에 쓰기도하고, 잘못한 사람을 야단치는
경우에도 쓰곤 합니다. ‘맛을 본다.’는 말은 음식의 간이 잘 되었는지
먹어보는 것을 뜻합니다. ‘욕본다.’는 말은 수고한 사람에게 고생했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지켜본다.’는 말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피겠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보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손으로 보기도 하고, 입으로 보기도 하고, 마음으로
보기도 하고, 뜻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은 사물을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눈은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새로운 빛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흐르는 시냇물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됩니다. 시인은
시로 표현 할 것이고, 화가는 그림으로 표현할 것이고, 가수는 노래로
표현할 것이고, 사제는 강론으로 표현할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석양은 길 잃은 양처럼 보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석양은 둥지로 돌아가는 새처럼 보일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치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 말하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고 불편함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복음서에서 소경을
치유하는 것이 많이 나오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기는 하지만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기는
하지만 편견과 선입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보고 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편견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뜻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고정관념의 눈을 깨버렸기 때문에 찾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특별히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 8주기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남겨주신 가르침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마지막 가는 길에 남겨주신 말씀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하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삶이
신앙인의 태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각막기증’을 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있었습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려는 마음을 지녔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겸손함, 온유함,
약자들에 대한 관심은 그분의 삶이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하신 많은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남겨주신 ‘가르침’은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그것들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계속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삶을 우리가 진실로 따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출세하여서 부자로 사는지를 찾고 보려는
세상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세상입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 희망의 눈,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때, 우리는 참된 진리의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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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2월15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마르8,22-26)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한다.
눈 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침은 생명의 힘인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은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손을 얹은
행위는 치유의 능력, 성령의 힘이 전달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 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
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현상을 보는
눈도 중요합니다. 검은 것은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도 필요합니다.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우리는 각자의 직분에 맞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마음을, 제자는 제자로서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마음을,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
(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말씀을 통하여 능력과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 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을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주신 다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르8,26)고 하셨습니다. 저 마을이 무슨 마을일가요?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 만연하는 마을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진 곳입니다.
그 마을로 들어가면 또다시 예전처럼 죄에 물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마을로 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이 하신 일이 마음이
굽은 사람들의 눈에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늘의 뜻에 따라 하였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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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2월15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8,22-26: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시는 기적을
들었다. 좀 특이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신 기적(7,31-37)과 비슷하다. 먼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온다(7,32=8,22).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7,33a=8,23a). 그리고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7,33b=8,23b)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 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옛날 어른들이 하던 일들이 생각난다. 아픈 상처에 침을 발라주는 예가
있었다. 잠침을 발라준다고 하는데, 자고 일어난 후 어머니들이 침을
아픈데 발라주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적사화와 좀 다르다고 하겠다. 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자세와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 즉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를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 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에
있다. 이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 주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 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에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을
가지고 있으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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