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2월17일 금요일 [(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수도회] 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11,1-9
† 복음 마르 8,3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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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바벨탑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혼란’,
‘흩어짐’의 뜻을 지닌 ‘바벨’이란 말 속에는, 에덴 동산의 범죄 이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써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는 인간의 오만함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시고 그들의 말을 섞어 흩어 버리십니다.
인간이 신과 같아지려는 욕망은 신화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제4차 산업 혁명’ 또는 ‘제4의 물결’로 불리는 기술
융합과 인공 지능 개발을 통해 인간이 ‘정신’을 창조하려는 새로운
바벨의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 과학이 발전하고, 로봇이
일상의 많은 영역을 대신해 주는 시대가 오면 인류는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술 혁명의 혜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 자산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돌아가는 특혜가 되기 쉽습니다.
공정한 분배와 올바른 민주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기술 과학의 혜택
역시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첨예화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살아가야 할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 내 목숨을 구하려고 남을 짓밟는 일이
반복되는 한, 인류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만 잘살려고 하면 이 세상은 ‘혼란’, 곧 바벨의 역사를 반복하고
맙니다. 내가 죽기로 작정하고, 내가 숨기고 싶은 나의 약점, 곧
십자가를 짊어질 때 이웃을 용서하고, 공감하며, 공존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벨탑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서로 짊어져
주는 나라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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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과 함께 하면서
2017년 가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1,1-9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4─9,1
공항에 비행기를 타러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공항에 늦게 도착해서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30분이
늦었고, 또 한 명은 5분이 늦어서 비행기를 타지 못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누가 더 화가 났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96퍼센트는 5분 늦게 도착한 사람이 더 화가
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비행기를 놓쳤기 때문에 더
아쉽고 분하고 억울하게 생각하리라는 이유였습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간발 효과’(nearness effect)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모든 이가 그럴까요? 하긴 올림픽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사람과
동메달을 딴 사람의 얼굴 표정을 비교해보니 동메달을 딴 사람이 훨씬
밝다고 하더군요. 은메달을 딴 사람은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금메달을 따는 건데...’라면서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동메달을
딴 사람은 ‘동메달이라도 어디야.’라는 만족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금메달을 향한 ‘상향적 사후 가정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고, 동메달을 딴 사람처럼 ‘하향적
사후 가정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해 한다고 말합니다. 즉,
반대로 일어난 일이 더 나쁘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가정하는
‘하향적 사후 가정사고’를 가졌을 때, 긍정적인 삶을 가지면서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지금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은 어떤 삶을 지향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하면서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후회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면 분명히 행복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주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의 걱정과 육신의
고통을 뜻합니다.
문제는 이 걱정과 육신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이지요.
당연히 우리가 지고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는데, 우리들은 주님을 전혀
생각하지는 않고 자신의 어렵고 힘듦만을 이야기하면서 후회와 원망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자리를
전혀 만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을 버리지도 못하고,
또 자신의 십자가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은 분명 힘겹고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명령하시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는 분이기에, 그분의 명령이 무조건 힘겹고
무겁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서 이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찾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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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믿어 주기 때문이다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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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5대 성인의 반열에 술도 올려야 한다
(김제동, ‘그럴 때 있으시죠?’ 중에서)
세계 5대 성인의 반열에 술도 올려야 합니다. 예수, 석가, 마호메트,
공자, 그리고 술, 즉 주님은 신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첫째,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것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때로는 소주의
모습으로, 때로는 막걸리의 모습으로, 때로는 와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소맥의 모습으로,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현신하셔서 인간의 아픔을
위로하십니다.
둘째, 때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빛을 볼 수
없는 깜깜한 냉장고 안에서 절대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때를
기다리십니다.
셋째, 희생하십니다. 돌려 따고, 우그러뜨려서 따고, 심지어 병목을
쳐도, 다 내어주고 절대 성질을 내지 아니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십니다.
넷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앉은 자를 일어나게 하시고, 잘 못 뛰던 자를
빨리 뛰게 하시고, 평소 노래 한 곡 못하던 여학생을 노래방 탁자 위에
올라가게 하시며, 끽소리도 못하던 부하직원이 직장상사에게 큰소리를
내게 하십니다. 그다음 날 아침엔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모두에게서
전날 밤의 기억을 깨끗이 지우고 그 둘 사이에 화평을 이루게 하십니다.
다섯째, 정결케 하십니다.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은 모든 것들을
본인이 데리고 밖으로 나오십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정화고, 불교로
말하면 정토사회를 만들어나갑니다. 사람의 몸을 깨끗하게 합니다.
많이 들어가면 안 좋은 모든 것을 밖으로 끌고 나옵니다. 그리고
무아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내가 없어지는 경험, 그리고 세상 모두에게
나를 참회하게 만드십니다.
“미안하다. 우웩!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우웩! 내가 잘못했다. 다 내
탓이오.”
여섯째, 낮은 곳으로 임하십니다. 가장 더럽고 낮은 곳으로 자기 몸을
임하시고 내 몸은 깨끗하게 하십니다.
일곱째, 빈병을 들고 슈퍼로 가면 돈으로 부활하십니다.
이렇게 술은 신의 모든 요소를 갖췄습니다. 다만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너무 심취하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줍니다. 그래서 술은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손이 떨릴 정도로 마시면 안 돼요.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넘지 마세요. 한 번이 가장 적당합니다. 교회도 일주일에 한 번
가잖아요.
재미있는 글이라서 이 자리에 옮겨보았습니다. 술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즐겁게 마신다면 약도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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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 8,34-9,1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의 성소는 기쁨입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기쁨을
찾아가는 여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과정입니다.
이 여정이 바로 제자뿐 아니라 군중까지도 행복으로 이끄는 예수님
추종의 길이지요. 오늘의 말씀들은 왜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8,3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데 필요한 조건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포기 이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그나마 자신 좀 더 잘 버리려면, ‘버려야 하는 자신’을 먼저
잘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알지 못하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자신의 어둠과 죄악을 알아차리는
순간, 주님 친히 빛을 비추시어 나를 비워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들 가운데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으로
인식했던 바오로 사도나, ‘가장 보잘것없는 종’이라 했던
성 프란치스코야말로 자신을 알아차려, 온전히 자신을 버린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지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바램, 시기와 질투,
미움과 차별, 탐욕과 거짓 등 이기적 자아를 비워낸 사람입니다. 결국
‘자신을 버리는 것’은 자신이 누군인가를 분명히 깨달아
자기중심에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로 향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환란과 시련은 물론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라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요 복음 자체이신
주님과의 깊은 유대 안에서, 현세의 소유에 기대지 말고 오직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처지와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과 대인관계, 사건들, 현재
겪고 있는 일들, 내 안의 갈등과 욕구 등 모든 것을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놓는 자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내놓기보다는 살리려 애쓰기 십상이지요.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것이 바로 ‘동기’입니다. 버리고 고통을 견디며 삶의 십자가를
질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8,35)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마음이 내켜서,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른다면 위선이요, 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과 행복은 바란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빈그릇을 준비하고 일부가 아니라 ‘전존재’(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의 어둠을 똑바로 알아보게 하시고, 죽음을 호흡하듯 절박하고
진지하게 매 순간 내 생명을 내놓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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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2017년 가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마르 8,34-9,1)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주변을 살펴보면 살아생전 벌써 지옥불의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결과가
이 세상에서의 지옥입니다. 지나친 명예욕, 과도한 승부욕, 해도 해도
너무한 물욕, 웃기는 과시욕...
적당하면 삶이 즉시 편안해질 텐데, 내려놓으면 거기서부터 천국이
시작될 텐데, 끝도 없이 집착하고 내세웁니다.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려고만 하고 모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는 하늘을
찌릅니다. 현상유지를 하려니 상습피로에 시달립니다. 욕심이 많다보니
인간관계도 다 깨져버립니다. 지나친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는 쉬운
진리를 왜 그리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찌 보면 정도를 넘어서는 욕심, 경쟁심, 욕심은 의미 없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시지푸스는 제우스를 속인 죄로 지옥에
떨어져 매일 반복하게 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집채만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한번 올려놓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시 내려온 바위를 또 다시 굴려 올리고...그렇게
똑같은 일을 무한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시지푸스의 신화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무익하고 의미 없는 노동만큼 가혹하고 무서운 형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한 지나침은 어찌 보면 가장 의미
없는 것이고, 결국 그것 자체가 스스로 사서 고생하는 가혹한 형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옥은 누가 보내서 갈수도 있겠지만
우리 스스로 자진해서 가는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런가 하면 살아생전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적당 선에서 포기할 줄도 알고
물러설 줄도 압니다. 중용지덕의 묘미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부족함과 선천적 한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니 삶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자주 내려놓으니 인간관계 편해져, 스트레스
사라져, 입맛도 돌아와 하루하루가 소풍이요 천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여유롭고 풍요로운 하느님 나라를
매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코복음 9장 1절)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늘 깨어있는 사람들, 세상만사
안에서, 동료 인간들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들, 매일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는 사람들, 돈 보스코의 말씀에 따르면 매일 저녁 ‘착한
죽음 연습’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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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6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마르 8,34-9,1)
서품식을 위해서 장소를 구하는 것이 저의 업무 중에 하나입니다. 매년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서품식을 하였기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작년에 체조 경기장이 내부 수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품식을 위해서 다른 장소를 알아보아야 했고, 10,000명 이상이
들어가는 실내 체육시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장충체육관은
수용인원이 작았고, 잠실 체육관은 농구시즌이기에 대관이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척 스카이 돔이 개장하였고 서품식을 위한 장소로
대관할 수 있었습니다. 장소 대관을 위해서 서울시 시설관리 공단
관계자를 만났고, 대관 업무에 따른 서품식에 대한 소개를 함께
하였습니다.
제가 일을 추진하는 방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맥을 통해서 고위
책임자를 만나서 해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고위 책임자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하면 실무자와 일을 하기가 수월했습니다.
실무자들도 상급부서에서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기
때문에 협조를 잘 해 주었습니다. 저는 무슨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1년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논의를 했기 때문에 협조도 잘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욕심이 개입된다면 이런 방식은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 방식이 사용되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고위 책임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부정, 청탁, 비리, 뇌물,
권력’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큰 혼란에 빠지게
한 것도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때문입니다. 각종 부정부패는
권력과 기업의 유착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선진국은 이런 개입이
없도록 제도를 만들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책임은 클지라도, 권력은
한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합니다. 절대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임을
역사도 말해 줍니다.
신학생들과 30일 피정을 할 때 ‘두개의 깃발’이라는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데 일상의
삶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화려하지도 않고, 재물도 적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에는 겸손, 십자가, 나눔, 희생, 양보, 봉사, 가난한 이,
헐벗은 이, 아픈 이들이 가득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기쁨, 감사가 있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이 무척 힘이 듭니다.
반면에 사탄의 깃발은 오늘 제1독서에서 본 것처럼 높이 솟아 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이 있고, 쾌락과 즐거움이 있고, 끊임없이 올라갈 수 있는
욕망의 계단이 있습니다. 권력과 재물을 유지하려는 사람과 그 권력과
재물 때문에 착취당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성공이라는 마차에 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미다스의 손,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욕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욕망은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멀어지게 합니다.
욕망은 결국 커다란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꽃이 아니라도 험난한 세상을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는 거름이
되는 길이 있음을 말해 주십니다. 세상은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살아갈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말씀을 남겨 주신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 톤즈 공동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선종하신
고 이 태석 신부와 같은 분들이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서신 분들입니다.
이른 아침입니다. 나는 어느 깃발 아래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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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십자가를 진다는 것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 8,34-9,1)
십자가를 진다는 것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혹 십자가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승리이기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그들은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하겠습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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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자세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8,34-9,1: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제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된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사람의 배척을 받고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주님으로 모시고 내 입으로 부르는 주님이 진정
나에게는 누구이며, 내가 그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기대하며 그분을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활태도가 바뀔 것이다. 베드로 사도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과 같이 나도 그러한 현세적인 것을 바라며 그분을 따른다면, 어느
사이엔가 그분과는 관계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자연적으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그 제자들이 가야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절)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뜻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참으로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에 힘들지도 무겁지도 않다.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사랑이 그것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가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끊고 죽이라는 것이다.
이 악한 자신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우리가
그분께 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을 따를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갈라 5,24 참조).
이 십자가의 길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당신을 닮게 해 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이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육정을 마음으로부터 끊어 버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살게 된다면,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상을,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이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겸손과 사랑이라는 두 다리로 첫 걸음을 내 디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그분의 뜻을 따르는데 따르는
고통, 즉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피하려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분 앞에 부끄러운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버릴 수 있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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