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7일 끝 사랑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7-12-27 06:51:41    조회 : 432회    댓글: 0

☆ 2017년 가해 12월27일 수요일 [(백)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수도회] 거룩한 교환의 신비를 살아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요한 1,1-4
† 복음 요한 20,2-8

***** ***** *****
◈ 오늘의 묵상

성 요한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큰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사도는 처음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지만, 나중에 예수님의
‘애제자’가 되었습니다.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 품에 기대어 있을
정도로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타보르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하였고,
겟세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인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신 성모 마리아 옆을 떠나지
않았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빈 무덤으로 달려갔으며 그곳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아마포를 보았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하였던 모든 사건을 되새겨 보며
‘말씀’의 신비를 꿰뚫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사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요한 사도는
신성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파트모스섬에 유배된 사도는 하느님의 심판과 영광스러운 승리가
어떻게 올 것인지를 묵시로 보게 됩니다. 사도는 ‘묵시록’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시작과 마침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이 굴복되었으며 사랑의 승리가
선포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구원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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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늘 함께 하는 삶

2017년 나해 12월27일 수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 요한 1서의 시작입니다. 1,1-4

복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8

초등학교 들어가서 처음 보았던 시험은 받아쓰기였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단어나 문장을 말씀하시면 이를 듣고 시험지에 받아쓰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를 내시기 전에 선생님께서는 절대로 남의
시험지를 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책상 가운데에 책가방을
세워놓으라고 했습니다. 그 뒤부터 계속해서 선생님께서는 남의 것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절대로 커닝(cunning)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는데 남의 시험지나
미리 준비한 답을 봐서 좋은 성적을 얻는다면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이런 시험을 초등학교 때부터 쭉 봤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가서
뜻밖의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시험 전에 교수 신부님께서
‘오픈북’이니까 책을 가지고 와서 답안지를 작성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책의 내용을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디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만 알면 답안지를 쉽게
작성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시험을 통해 배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책의 어디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알아야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책을 읽었고, 책을 읽다보니 다른 친구들과 많은 토론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목적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 모습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봤던 글이 하나
생각납니다. 어느 작은 초등학교에 젊은 교사가 부임해서 아이들에게
시험을 나눠주면서 절대로 커닝(cunning)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잠시 뒤에 몇몇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며
호통을 쳤지요. 그러자 한 아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선생님, 어른들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 혼자 해결하지 말고 여럿이
지혜를 모아 해결하라고 했어요. 오늘 시험문제가 어려워서 어른들
말씀대로 한 것뿐인데 잘못된 것인가요?”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피곤하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보다는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가 되면 안 될까요?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다는 제자로 알려져 있는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늘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도 모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도 십자가 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성모님과 함께 하셨으며,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 부활 소식에 베드로와 함께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통해 제자들과도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함께 하는 삶이 요한 서간 한 가운데 ‘사랑’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쟁보다 함께 할 때, 함께 함에서 ‘사랑’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과도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 ~~~~~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켄 블랜차드).

~~~~~ ~~~~~ ~~~~~
오늘 이 말은 꼭 해주세요(‘좋은 글’ 중에서)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힘을 내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힘이 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도록 하세요.
그러면 당신도 힘을 얻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걱정이 사라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들려주세요.
그러면 당신도 걱정이 줄어들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용기를 잃지 마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용기가 생겨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속삭이세요. 그러면 당신도 용기를 얻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조건 없이 "용서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감격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들려주세요.
그러면 당신도 용서를 받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푸근해 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또렷하게
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도 감사를 받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름다워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환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소곤거리세요.
그러면 당신도 아름다워지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사랑해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사랑이 깊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하셔야 해요. 그러면
당신도 사랑을 받게 될 테니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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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거룩한 교환의 신비를 살아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27일 수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 1,1-4; 요한 20,2-8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요한 1,2)

거룩한 교환의 신비를 살아냄

사도 요한은 늘 예수님 곁에 머물며 그분의 구원여정에 끝까지
함께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였습니다(요한 13,23). 그는
산위에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았고,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켜주시는 것을 보았으며(마르 5,37), 겟세마니
동산에서 수난의 고통 중에 있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마태 26,36 이하).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요한은 최후의 만찬때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요한 13,23). 십자가 상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어머니를 맡기셨지요(19,27).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주간 첫날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20,2) 베드로와 함께
무덤을 향해 갔으나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릅니다
(20,4).

그토록 빨리 무덤에 다다르게 한 것은 요한의 발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신 분의 사랑을 충만히 받았기에
서둘러 사랑하는 이에게 달려간 것이지요. 사랑은 그렇게 사랑을
갈망하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도록 이끕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치유하고 세상을 정화하고 희망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동정녀께서 영원하신 분을 세상에 낳으시고, 땅은 가까이할 수 없는
그분께 동굴을 내드립니다. 천사들과 목동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옵니다. 영원한 하느님, 작은 아기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으로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2)
요한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교환의 신비를
알려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비스러운 “생명의 교환”을 위한
선행조건입니다.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시고 우리 삶을 변형시킬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됩니다. 예수
성탄의 신비는 이 ‘기묘한 교환’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오신 주님과의
친교를 나눔으로써 자신의 참 모습을 되찾을 수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한 교환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교환은 사랑의 교환이요 생명의 교환이기에 요한 사도처럼
그분의 사랑 깊숙한 곳으로 젖어들어야 합니다. 사랑을 품을 때
사랑을 나물 수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교환의 신비는 친교의
신비입니다. 그 친교는 우리끼리의 친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나누는 친교입니다(1요한 1,3).

거룩한 교환의 신비를 살아내려면 말구유 안에 태어나신 그 겸손의
극치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우리를 위해 전 존재를 던지신 그 한없는 사랑으로
함께하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향상될 때, 인간다운 삶이
실현되고 세상도 밝아질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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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끝사랑
 
2017년 나해 12월27일 수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 요한 20,2-8

끝사랑

그리 길지도, 그리 짧지도 않은 적당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며 살아오면서, 한 가지 크게
깨우친 바가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다시
또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했으면 저희 사부 돈보스코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교육자들에게 틈만 나면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까지 사랑하십시오.”

인간 존재란 것이 참으로 묘한 존재여서, 이 조건-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충족되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우리 내면의 중심에 자리잡은
사랑의 탱크가 그 누군가로부터의 적절한 충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이나, 사회적 지위 여부를 떠나, 두고 두고 그 결핍을 아쉬워하고
허전해합니다.

어린시절,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내쳐져서 힘겹게 살아온 사람들,
제때 그 소중한 체험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그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큰 고생을 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이렇게 채워도 채워도 충족되지 않는 ‘Love Tank’, 다시 말해서 애정
결핍으로 인해, 평생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한분 계십니다. 바로 사도 성 요한 복음
사가입니다.

사도 성 요한 복음 사가는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타이틀을 하나 붙인다면
사랑의 사도입니다. 나이든 그는 만년에 말하기 조차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외친 단어가 사랑이었습니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듬뿍듬뿍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의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건장한 남성이었던 그가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이 세상안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랑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영원할 것 같던
불같은 사랑도 세월과 더불어 식어갑니다. 마치 산같이 든든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초라하고 구차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끝사랑’이 있으니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랑,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사랑은 주님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 한계가 없는 사랑,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사랑, 오직 주님
사랑 뿐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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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27일 수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복음: 요한 20,2-8: 부활 날 아침 무덤에 간 제자들

오늘은 사도 요한의 축일이다. 본시 전례는 성탄 다음 날을 성
스테파노 축일로 정하였고 그 다음 날을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게
하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은 교회사에서 첫 번 순교자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생명을 바쳐 증거하신 성인을 먼저 지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당신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사랑이심을 증거한 사도
요한을 오늘 기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목숨을 바치면서 까지도 증거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항상 사랑의 삶으로써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사랑 받던 제자, 사랑의 사도”로 묘사되는
분이다. 사도 요한이 늙어서 강론을 하는데 너무나 사랑하라는 말을
많이 하니까, 그 제자들이 좀 싫증이 났다. 그래서 사도 요한에게
이제 사랑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말씀을 좀 하라고 하면서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갔는데 거기에 가서도 역시 사랑하라는 말만 하였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분의 서간을 보면 구체적인 사랑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으뜸 수위권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첫 사람이 된다.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이 수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얼굴에서 수건이 치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 그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바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얼굴은 인간으로서 관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사도 요한은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교는 그 당시
제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사도 요한은 이 모든 친교를 전
교회 공동체가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이미 신앙을 갖고 그분과
진정한 친교 안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이 특권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즉 하느님의 사랑을 살면서 그분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기쁨이 다른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일 것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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