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17일 수요일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수도회] 주님을 분노케 하고 슬프게 하는 완고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17,32-33.37.40-51
† 복음 마르 3,5
***** ***** *****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
한쪽 손을 움켜쥐는지 생각해 봅시다. 화가 났을 때, 뭔가 앙심을 품었을
때,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
우리는 한쪽 손을 움켜쥡니다.
오늘 복음의 병자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는 신체 결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했고, 선뜻 손을 사람들에게 내밀지도 못했고, 제대로
노동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오그라든 한쪽 손은 분노와 좌절,
절망과 앙심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회중 가운데 서게 하십니다.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 가운데 세우시어 백성 가운데 소외되지 않은 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병자의 치유보다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을 노기를 띠고
둘러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신체 결함보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을 더 슬픈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병자를 치유하기 위한 말씀만이
아닙니다. 편견과 아집으로 완고해진 이들에게,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게 손을 뻗으며
용서와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미움의 상처 때문에 외면하는 이들에게
회심을 요청하십니다. 손을 뻗어 이제 사람들과 공감하고, 그들을
도우며,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외침입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손을 움켜쥐고 살고 있습니까? 내 손을 뻗어 펼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하루를 살아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 *****
◈ [인천] “신부님, 힘 빼세요.”
2018년 나해 1월17일 수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필리스티아 사람을 눌렀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32-33.37.40-51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
몇 년 전에 어깨가 아파서 한동안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 어깨의
통증은 점점 심해져서 목까지 건너가더군요. 그래서 생활하는데 많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 어떤 분이
지압하시는 분을 소개해주셔서 가게 되었습니다. 지압을 받기위해
그분께 제 몸을 맡기자마자 저는 곧바로 몸을 벌떡 일으킬 뻔했습니다.
너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힘 빼세요.”
“힘준다고 덜 아픈 것이 아닙니다. 힘을 빼야 아프지 않아요.”
아파서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제 몸을 툭툭 치면서 힘 빼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고, 바로 그때 아프기만 하던 지압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지더군요. 이 상태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압을 해주시던 형제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지압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힘을 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꽉 주고 있어서 얼마나 많이 부딪치고
있습니까? 그러다보니 힘들다고 괴롭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힘을 빼면
처음에는 불편할 수 있어도 잠시 지나면 가장 기분 좋은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얼마나 많은 힘을
주고 있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더 강한 힘을 내보이면서
싸우려고만 합니다. 그 순간 모두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판단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또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게 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 그리고 직접 보여주신 행적들은
모두가 감동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는 하느님을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뻣뻣하게 힘을 주면서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고발해서
처벌받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도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힘을 주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내
입장을 내세우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그분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 ~~~~~ ~~~~~
어리석은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본성에 더욱 신경을 쓴다(그라시안).
~~~~~ ~~~~~ ~~~~~
척박한 땅(‘따뜻한 하루’ 중에서)
오래전 어느 척박한 땅을 개간하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땅은
돌멩이와 잡초가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사람이 그 돌을 일일이 곡괭이와
손으로 골라내야 하는 정말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농부에게 걱정이 되어 말했습니다.
“그 돌밭을 언제 개간하려고? 설령 개간 한다고 해도 그 땅은 토질이
안 좋아서 농사짓기도 정말 힘들어.”
하지만 농부는 언제나 똑같은 말로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에게는 아주 특별한 비료가 있습니다. 그 비료를
쓰면 여기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묵묵히 돌밭을 개간하는 농부를 걱정하면서도, 도대체 어떤
특별한 비료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농부가 척박한 그 땅의 개간을 마치고, 그 밭에 작물을 키워 엄청난
수확을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농부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이보게, 나에게도 그 특별한 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게나!”
그러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아! 제가 쓴 비료가 뭐냐고요? 별거 아닙니다. '나는 이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이 저의 특별한 비료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참 많아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도 참
많은 세상이기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하나가 할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늘어납니다. 신나지 않나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 *****
◈ [수도회] 주님을 분노케 하고 슬프게 하는 완고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17일 연중 제2주간 수, 마르 3,1-6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마르 3,5)
주님을 분노케 하고 슬프게 하는 완고함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완고해져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3,6) 불구하고 병으로 위축된 삶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율법을 어긴 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하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습니다(3,4).
그들은 율법에 묶여 사람을 살리고 자유와 해방을 불러일으키는
예수님의 처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자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시며 그들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십니다.’(3,5)
그분께서는 단순히 바리사이들을 반박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 자체를
하느님의 선과 생명이 드러나는 날로 바꾸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완고함은 하느님을 슬프게 하고 스스로를 비참에 빠트리게 됩니다.
우리도 진리 앞에 문을 걸어 잠그고 생명과 자유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채 위축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문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리는
완고함입니다. 완고한 사람은 가난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합니다.
자기 의지는 물론 재물과 힘, 다른 사람과 세상을 자기것으로 삼으려
합니다.
완고한 사람은 온유이신 하느님 대신 육의 거칠음을 품고 자기뜻에
묶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거나 허세를
부리며 오만하게 굴기도 하지요. 뿐만 아니라 자기 의지에 매달려
영혼의 마약과 같은 아집과 독선에 젖어 삽니다. 완고함은 치우치고
굳어진 마음과 생각에서 옵니다. 완고함은 하느님의 영과 선은 물론
다른 이들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좁고 폐쇄적인 태도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규범 안에 가두는 완고함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좋은 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이 내가 바라는 때에
내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만 행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겠지요. 모두를 살리시려고 오신 생명의 주님을 내가 만든
꽉막힌 틀에 맞추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완고함에서 나와 더 완강한
완고함의 독소를 뿜어대는 독선, 편견, 아집, 강한 자기주장, 폐쇄적
사고는 영혼의 눈을 멀게 할 뿐입니다.
전쟁범죄국인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뻔뻔스러운 태도, 국민의 삶을
피폐케 하고 권력욕에 눈이 멀어 부패와 불의를 쌓아온 정치인들의
적반하장식 태도와 재벌들의 탐욕과 거짓은 악취나는 완고함의
덩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영의 이끄심에 따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빛과 희망이 되지 못한 채 굳어 있는 교회 또한
근본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오그라든 영혼의 손을 펴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집단적
이기주의와 적폐를 낳는 완고함의 틀을 없애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일어나 가운데로 오라"(3,3)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주님의 심장 가까이 나아갔으면 합니다. 영으로 가난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어 경청하고 받아들이며 함께할 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 *****
◈ [수도회] ”손을 뻗어라.”(마르 3,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 년 나해 1월17일 수.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손을 뻗어라.”(마르 3, 5)
사랑으로 완성되고 용기로 뻗어나가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진리입니다.
움켜잡아 오그라든 우리의 손을 사랑으로
펴주시며 손을 뻗어라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으니 빈손이 됩니다.
빈손이 되어서야 주시는 것을 쉽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말씀하시는 날 오그라든 손이 펴졌고
빠져 있는 곳에서 손을 뻗어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우리자신을 만나는 길은
주님을 믿고 오그라든 손을 뻗는 살아있는 순간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주님을 향해 뻗어 나가야 합니다.
과거가 아닌 새로운 지금 이순간을 사랑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 *****
◈ [수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심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17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 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고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4절)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하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즉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 의미를 말씀하신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
(마태 12,11) 소나 나귀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고 있는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나 자신을 성찰해 보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 *****
◈ [서울] 연중 제2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1월17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남과 북이 만나서 회담을 하였습니다. 걸어서 10분이면 만날 수 있지만
2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합니다. 이번 만남을 통해서
오해는 풀고, 우정은 더욱 돈독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북에서 많은
선수단과 응원단이 온다고 합니다. 평창 올림픽에서 남과 북이 함께
입장을 한다고 합니다. 이번 만남을 통해서 군사적인 긴장이 풀리고,
이산가족들이 만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자주 만나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겉으로 볼 때 다윗은 골리앗과 싸워서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싸움의 경력도 골리앗이 많았습니다.
무기도 골리앗이 더 크고 좋았습니다. 물론 골리앗의 힘은 다윗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저는 승리의 공식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신감입니다. 악마가 제일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나는 안
돼!’라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한계를 정해 놓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안 돼!’라는 병에 걸려서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을
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은 우리 안에 있는 힘을 불러
옵니다. 그러나 ‘나는 안 돼’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지금 있는 힘까지도
발휘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은 언제나 제게 힘을
주었고, 제가 하는 일들이 잘 풀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믿는 것은 이미 신앙의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연습입니다. 군대에서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훈련에 흘린 땀
한 방울은 전쟁에서 피 한 방울과 같다.’ 훈련을 많이 한 군인들은
전쟁에서 그만큼 잘 싸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광의 얼굴을 한
사람들은 모두 평소에 지독히 훈련을 하고 연습을 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진실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연습과 훈련은 규칙적인 기도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기도하는 사람보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향입니다. 공동선을 위하고, 평화와 화합을 위하며,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지향이 있어야 합니다. 탐욕과 이기주의를
지향한다면 아무리 연습을 하고, 자신감을 가졌어도 진정한 승리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세력도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악의 세력이 언제나 실패하는 것은 ‘지향’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지향이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빠른
기차를 탔어도 방향이 다른 기차를 타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지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우리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매일 꾸준히
노력할 때, 그리고 우리 삶의 목표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강한 악의 세력이 다가와도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 *****
◈ [청주] 마음이 오그라든 병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17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마르 3,1-6)
마음이 오그라든 병
얼음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킵니까?"(프란치스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야말로 틀림없는 장애인이 아니냐.
가까운 형제를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좀스러운 정서장애.
작은 애착 하나도 끊지 못해 온몸이 쑤셔 오는 지체장애.
항상 남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각장애.
충고의 말을 듣기 거북해하는 청각장애.
칭찬과 격려의 말에 아주 서툰 언어장애 등등”
(장애인들과 동고동락했던 수녀님).
육신은 멀쩡해도 내적으로는 한두 가지의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갑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