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5일 세상의 빛이시며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2-05 21:15:40    조회 : 51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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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가해 12월5일 월요일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수도회] 자유와 해방과 참 행복으로 오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35,1-10 † 복음 루카 5,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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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에게 병을 고쳐주시기는커녕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고, 이를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분개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은 죄로 인한 결과라 생각했습니다. 중한 병에 걸린 것은 그만큼 죄가 크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지요. 따라서 병이 나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는 누가 용서해 줍니까? 율법 교사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체도 잘 모르는 예수님께서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시니, 도저히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병자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면 병이 치유된 것은 그 병자가 일어나 걸음으로써 증명이 되지요.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먼저 고쳐 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의 죄까지도 씻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위가 예수님 안에 계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임을 이 세상 곳곳에 널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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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나의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 2016년 가해 12월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5,1-10 복음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26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9일까지 갑곶성지를 떠납니다. 아니 한국을 떠납니다. 멀리 캐나다 밴쿠버에서 대림특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17시간의 시차로 새벽 묵상 글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조금 고민이 됩니다. 그곳의 상황을 잘 몰라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묵상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0일 새벽에 다시 뵐 것을 약속드리면서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언젠가 어느 병원의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들이지요. 아직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눈도 뜨지 못하는 아기들입니다. 그런데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아기들 중에서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아기들도 덩달아 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뒤에 얼마 뒤에 자기 울음소리를 틀어주었습니다.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에 같이 울었던 것처럼, 자기 울음소리를 듣고서도 울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를 ‘신생아성 반응울음’이라고 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려는 마음이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타인의 고통보다는 나의 고통에 더 집중하는 것은 왜 일까요? 남의 아픔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아픔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타인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본능이 사라진 것일까요?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기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만을 위한 욕심과 이기심이 다른 이들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처럼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아닌 내 이웃과 함께하는 하느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중풍 병자를 친구들이 지붕을 뜯고 주님 앞으로 내려 보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많은 군중들로 가려져 있어서 주님 앞에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기 위해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라고 설명을 해줍니다. 병을 고쳐주는 병자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즉, 앞서 ‘신생아성 반응울음’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나의 이웃을 주님께 데리고 갈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재자의 모습을 갖춘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목적에 부합되게 사는 것이며, 여기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믿음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웃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나만의 신앙 또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신앙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익을 생각하는 본능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커다란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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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이다. 헌신으로 사랑은 자란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20161205_01.jpg 갓난아기 때의 제 조카입니다. 지금은 어른이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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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구 네덜란드의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요하네스 에른스트 딩거 (Johannes Ernst Dinger) 박사는 친구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친구는 세 종류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 준다.” 친구가 모두 내게 도움만을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피해를 주는 친구도 얼마나 많습니까? 딩거의 말처럼 사랑도 또 미움도 또 무관심을 주는 것이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주는 친구만 친구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미움을 주고 또 무관심한 사람 역시 친구이며, 이들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만 주는 친구만을 원하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활하면 내 친구의 2/3를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친구와의 만남도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모든 이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세상이 더욱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20161205_02.jpg 시종직 받을 때의 사진이랍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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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자유와 해방과 참 행복으로 오시는 주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5일 월요일 대림 1주 월, 루카 5,17-26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루카 5,24) 자유와 해방과 참 행복으로 오시는 주님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오시는 구원의 날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며,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이사 35,4-5.10) 예수님께서는 자유와 해방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소문을 듣고 온 많은 군중들,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가르치시고(루카 5,17),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쳐주고 계셨습니다(5,17ㄴ). 이렇게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자유와 해방과 참 행복의 문은 늘 열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 편에서 보면 거저 주어지는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런 의식도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받으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자유와 해방의 문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있음을 자각하고, 주님께서 사랑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시며 오심을 알아차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려는 준비를 하는데 집중해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시어 활동하시도록 내 이성과 지성의 활동을 멈추고 기다릴 줄 알아야겠지요.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몰두하곤 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능력과 창의성을 낭비하며 사람 냄새 나는 인간관계보다는 사이버 공간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는 때도 많습니다. 대림절은 그런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음미하며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치유 이야기에서도 자유와 참 행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 치유 받게 하려는 이들은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체념하거나 포기해버리는 숙명론자나 운명론자들과는 달리 기와를 벗겨내고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내어 치유 받게 했습니다(5,19). 자유와 참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체념이나 불신이 아닌 진지한 믿음과 사랑의 인내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어떤 인간 권력보다도 깊고 힘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그 믿음을 지녀야겠습니다. 이 믿음을 지닐 때 나날의 순간이 바로 ‘신기한 일’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불신과 자신들의 신념과 고정된 습관,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도들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후안무치, 약자능멸, 금전만능이라는 몰상식의 덫에 걸려 사익을 추구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며 사는 가련한 권력가들과 자본가들을 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고정된 틀과 의식들에서 벗어나 자유와 참 생명을 맞아들이기 위해,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지붕 위’곧 하느님께로 눈과 마음을 향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게 하고 내 영혼을 흐리게 하는 수많은 현실의 걸림돌 저 너머, 저 위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와 선을 품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한가운데로’ 내려와, 참 자유와 해방을 품고 “일어나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야겠습니다.”(5,24)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끝없는 기쁨' 안에 머물기 위하여 온갖 굴레와 족쇄를 벗어던져버리고 참 자유와 행복을 나누고 선포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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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가해 12월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 26) 치유가 필요한 오늘입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 앞으로 나가는 용기의 시간입니다. 용기있는 청원이 용서를 불러일으킵니다. 기와를 벗겨내고 중풍 걸린 사람을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낸 용기있는 믿음에서 사람의 길을 발견합니다. 사람의 길은 아픈 이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길은 믿음으로 두려움을 치유합니다. 믿음은 아파하는 우리의 오늘을 치유해줍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서로 도우려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움직일 수 없는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일어나 걸어가게 합니다. 건강해지는 오늘의 삶은 주님의 간절한 뜻입니다. 우리의 오늘이 건강해지는 믿음의 오늘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오늘은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오늘임을 믿습니다. 무책임했던 어제가 아니라 용서받는 오늘로 돌아가는 은총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병든 부분을 하나씩 하나씩 고쳐 나가시는 주님의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루카 5, 23)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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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대림 제2주간 월요일 2016년 가해 12월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 5,17-26 매주 토요일 전국적으로 ‘촛불’이 켜지고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어린아이, 학생, 젊은이, 어른들이 모여서 함성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지인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가보았습니다. 시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탄핵과 즉각 퇴진’이었습니다. 대통령은 국회가 합의를 하면 물러나겠다고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여당은 4월 퇴진, 6월 대선을 당론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야당은 탄핵을 발의하였고, 9일에 표결을 한다고 합니다. 평화로운 행진을 보았고, 성숙한 시민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과격한 행동이 없었고, 과잉진압도 없었습니다. 광장은 의견을 표현하는 무대가 되었고, 차량이 다니던 광장과 넓은 길은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아픈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웃들은 아픈 사람의 처지를 알았습니다. 들것을 마련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지붕을 들어내고, 아픈 사람을 예수님과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들의 사랑과 연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규정과 절차를 이야기 합니다. 법적인 잣대를 이유로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지금 아픈 이웃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을 사랑하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죄를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규정과 절차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법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었고, 예수님을 믿고 함께 해준 이웃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국회에서 합의를 하면 물러나는 것과, 4월에 퇴진하고 6월에 대선을 치루는 것과 탄핵을 하는 것과 즉각 퇴진을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운 선택일까?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당리당략이라는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다면,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침몰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이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면 좋겠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예수님께서는 착한 이웃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10년 이상 자리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들도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할 때, 중풍병자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중풍병자’인 아내를 위해서 헌신 하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말도 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니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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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좋은 이웃이 되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2월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 5,17-26 좋은 이웃이 되어라.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 주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 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 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주님께서는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 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473번 세상의 빛이시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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