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6일 얼마나 좋은고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2-06 06:30:48    조회 : 47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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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가해 12월6일 화요일 [(자)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수도회] 험한 세상에서 회상하는 하느님의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0,1-11 † 복음 마태 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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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예화를 드시며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이들까지도 모두 품어 주기를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 중 하나가 이른바 왕따일 것입니다. 비단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알게 모르게 따돌림당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은연중에 그런 행위에 동참할 때가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특정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거나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 없이, 그런 소문을 본의 아니게 퍼뜨리는 경우마저 있지요. 사실 우리 주변에 떠다니는 이야기 중, 진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어느 특정인을 소외시키는 일에 동참할 때가 있습니다. 아울러 그가 옳은 줄 알면서도 나의 편리함이나 집단의 암묵적인 강요에 못 이겨, 그를 소외시키는 일에 동참할 때마저 있지요.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농간으로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흥분하여 소리 지를 때,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 없음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대림 시기는 다시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본의 아니게 무시하거나 소외시킨 이들이 있지나 않은지, 만일 소외시켰다면 나의 마음 안에 있는 어떤 요소가 그런 일을 허용했는지, 이 점에 대해 성찰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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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작은 것을 소중하게 2016년 가해 12월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1-11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2-14 유명한 맛집이라 해서 찾아갔는데, 그 동네는 제가 학창시절에 자주 놀라가던 곳이더군요. 친한 친구가 그곳에 살고 있어서 자주 갔었고 그래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뀌지 않은 것 같은데, 느낌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급속도로 바뀌는 요즘 시대와 달리 이 동네는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옛날에 있었던 집도 그대로고,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던 곳도 그대로인데 느낌이 이렇게 틀릴까요? 그저 단순히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자세히 보니 담장이 없어진 것입니다. 담장 대신에 나무들을 촘촘하게 심어 놓았더군요. 달라진 것은 이 담장 하나뿐이었지요. 하지만 이 동네에서 받은 느낌은 이렇게 완전히 달랐습니다. 생각해보니 조금만 바꿔도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발만 했을 뿐인데 10년은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옷 입은 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또한 작은 말 한 마디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가정 방문을 오셨던 신부님께서는 저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너 커서 신부님 되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한 번도 신부님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지요.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신부님 되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내려줄 거야.”하면서 번쩍 든 상태로 가만히 계셨지요. 그래서 그때 무서워 울면서 신부님 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때의 생각이 성장하면서 왜 계속해서 떠올려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신부님께 말했던 대로 저는 신부님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분위기를 바꾸고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 삶 안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그 작은 것 하나를 바꾸는 데에도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으며, 작은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소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해서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찾아 나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라면 어떨까요? 아흔아홉 마리라도 잘 건사하기 위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그 한 마리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셔도 될까요? 작은 한 가지가 바로 내 자신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큰 이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 line02.jpg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탈무드).
20161206_01.jpg 저는 비행기 타고 밴쿠버로 날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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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의 비밀(앤소니 드 멜로, ‘깨침과 사랑’ 중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왜 저에게 행복의 비밀을 숨기셨습니까?” “너는 새의 노랫소리를 들었느냐?” 제자는 “예”라고 대답했다. 스승이 말했다. “이제 너는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을 믿겠구나.” 제자는 “예”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주님께 행복의 비밀을 왜 숨기셨냐고 따지듯이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고 고통을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내가 접하는 모든 것 안에 행복의 비밀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숨기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단지 내가 보지 않았을 뿐....
20161206_02.jpg 지금 밴쿠버는 눈이 오고 있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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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험한 세상에서 회상하는 하느님의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6일 화요일 대림 제2주간 마태 18,12-14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험한 세상에서 회상하는 하느님의 사랑 이사야의 위로의 책(40-50장)은 기쁨의 메시지로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 이 말씀에는 서둘러 내 백성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다시 숨 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는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이 실제로 해방되리라는 하느님의 위로를 선포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하러 오시어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실 것입니다.”(40,11)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비유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마음을 쓰고 눈여겨보시며 아껴주시는 인격적 사랑입니다. 우리의 하찮고 속 좁은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신분, 나이, 성별, 학식, 지위, 재산 그 어떤 것도 사랑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큰 죄 중에 있는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리는 사랑입니다. 목자는 문제없는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향하고 먼저 선택하는 것이지요. 이 눈길은 ‘모두’가 행복한 사랑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보편적인 사랑이요 어머니다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견뎌내고 죽음을 무릅쓰는 사랑입니다. 양무리를 돌보는 목자는 늘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양들을 돌보지요. 그러나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가 길을 잃어버리는 양들이 생기곤 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런 양을 탓하지 않고 사랑으로 험한 지형과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찾아 나섭니다.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돌아오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능동적인 사랑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입으로만 설명하는 관념의 놀이가 아니라 직접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대화와 친교를 나누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함께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랑을 위한 수평적 이동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품고 사랑 안에 하나 되기 위하여 길거리로 나서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함께 하기 위하여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위해 ‘하느님의 수직적 하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저 높은 곳에 초월적인 분으로만 머물지 않으시고 ‘살을 취하시어’ 내려오신 것이지요. 이것이 인간을 위하는 하느님의 포기요 희생인 셈입니다. 오늘 혼탁하고 험한 세상 한복판에도 분에 넘친 하느님의 사랑은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 주님의 사랑에 행동으로 응답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야겠지요(이사 40,3). 몰상식의 일상화, 부정부패, 거짓과 탐욕, 불신, 소외와 차별, 인권 침해, 생명과 환경의 파괴, 돈의 우상화와 자본의 권력화의 결과 드러나는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심화 등의 중심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나서야 할 때입니다. 정의로운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불의와 차별보다 더 뜨거운 사랑 실천뿐임을 기억하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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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가해 12월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 13) 오직 하나 회개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회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한 존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애타게 찾으시는 숨가뿐 숨결에서 만나게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또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합니다. 무엇보다도 회개는 존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비로소 주님 사랑을 알게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길 잃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회개로 이끄시는 주님이십니다. 회개는 주님을 믿는 것에서 구체화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알게됩니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은총의 사람으로 되돌려놓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이기쁨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깨닫게됩니다. 가장 큰 기쁨이 회개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아름다움을 향해 나가는 은총의 대림시기 되십시오. 주님 말씀이 가장 아름다운 회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잊고 있었던 잃어 버렸던 말씀을 다시 찾았습니다.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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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대림 제2주간 화요일 2016년 가해 12월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 18,12-14 학생들이 쓴 리포트를 읽고 있습니다. 리포트를 읽으면서 때로는 저보다 훨씬 더 깊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 때문에 감동합니다. 때로는 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리포트를 쓴 학생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제가 학생 때는 숙제를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적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제야 생각합니다. 숙제는 선생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숙제는 바로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숙제를 열심히 하면 그 지식과 지혜는 결국 숙제를 열심히 한 본인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이치를 진작 알았더라면 좀 더 열심히, 성실하게 숙제를 했을 터인데! 며칠 전입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횡단보도에서 멈추었습니다. 빨간불이었고, 사람들은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노부부가 보였습니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들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부축하시면서 잰 걸음으로 길을 건너고 계셨습니다. 짧은 횡단보도이지만 두 분에게는 마치 마라톤 코스처럼 길게 보였습니다. 파란불은 깜박거리고, 할머니의 손을 잡으시고 길을 건너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파란불은 꺼지고 빨간불이 켜졌지만 노부부는 아직도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길을 건넌 노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더 기뻤습니다. 영원한 삶에 비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쩌면 횡단보도의 파란불을 건너는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이라는 파란불에서 멈추지 않고 걸어오기를 바라실 것 같습니다.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분들이 있습니다. 함께 일을 하는 동료 신부님도 수술을 하였고, 이제 다시금 삶의 파란불을 건너고 있습니다. 시험에 빨간 불이 켜진 분들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 원하는 성적을 얻어야 합니다. 이번에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은 학생들은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을 것입니다. 오해의 빨간불이 켜진 분들이 있습니다. 좋은 뜻에서 한 일인데, 오해를 받으니 마음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욕망의 빨간불이 켜진 분도 있습니다. 주변의 조언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려놓으면 쉽게 건널 수 있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시는 할아버지는 사랑의 파란불이 되셨습니다. 수술을 앞둔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직원들은 믿음의 파란불이 되었습니다. 넘어진 아들을 일으켜 세워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부모님은 희망의 파란불이 되셨습니다. 주변을 보면 파란불이 되어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잘 될 거예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할게요.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우리 함께 해요.’라며 응원하는 분들은 모두 ‘파란불’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대림시기입니다. 우리는 대림시기에 3가지를 묵상합니다. 첫째는 2000년 전에 오셨던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둘째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생각하고 바른 길을 가고자 노력합니다. 셋째는 지존하신 주님께서 "성체"의 모습으로 현존하심을 묵상합니다. 그 거룩하신 분께서 저렇게 작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심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먼 옛날에 오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 아닌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모시기에 우리는 지금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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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주님 품에 되 안기려는 분들 2016년 가해 12월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 18,12-14 주님 품에 되 안기려는 분들 지금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가 인재상태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늘 길과 속세 길 중 자유가 선택한 길이 이런 홍역을 일으켰네요. 미꾸라지 한 마리 흙탕물과 길 잃은 양 한 마리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속세길 찾는 자는 미꾸라지처럼 제 길만 찾으며 흙탕물 인재 일굽니다. 신앙인들은 길 잃은 양처럼 회개로 주님 품에 되 안기려는 분들입니다. 하늘 길 가려면 끝까지 가야지 중도에 속세 쪽 보며 눈짓하진 맙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오 11,14)” 하느님숨결인 대자연의 원리를 따라 산다면 인재도 막을 수 있습니다. 세속욕망 욕심에 눈 돌린다면 인간재해와 자연재해 막을 길 없습니다. 주교 인터넷 예비신자교리 http://3217b.kr.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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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누구나 소중한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2월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 18,12-14 누구나 소중한 사람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다 못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 사랑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깊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마음을 키워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야 하겠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셈법은 우리의 셈법과 다릅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 졸이고 속을 태웁니까.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좌절하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 일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그 사람은 나에게 더 큰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번 더 때리랬다.” 는 옛 말을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의 요구를 일깨웁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84번 얼마나 좋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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