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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가해 12월7일 수요일
[(백)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수도회] 온유와 겸손으로 지는 사랑의 멍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0,25-31
† 복음 마태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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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멍에와 짐은 바로 율법의
멍에와 짐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이 설정한 하느님에 대해 확신에 찬 나머지,
“하느님의 뜻은 이렇다. 하느님을 이렇게 공경해야 한다.”라며 수많은
율법 조항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바쁜 사람들은 그 많은 율법의 세세한 규정을 지키려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유혹과 오류는 스스로 규정한
하느님의 모습과 신앙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만든
틀 안에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느님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다 보니 걸핏하면 하느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 내가
설정한 신앙의 길만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참된 신앙의 길이라고 강조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설정해 놓은 틀에서 상대방이 벗어나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과거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과중하게 지었던 율법의 멍에를
벗겨 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멍에를 만들고,
이를 스스로 짊어지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씌우고
있지나 않은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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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은총이 우리를 떠받친다.
2016년 가해 12월7일 수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25-31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술독에 빠져서 가족을 너무나도 힘들게 하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술을 좀 그만 마셨으면 좋겠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셨고, 취한 상태에서 실수도 많이 하니 가족들이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본당의 신부님께 이
형제님께서 술을 그만 마실 수 있도록 한 말씀을 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형제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 술이 가득 담긴 컵을 가져오십니다. 그리고 이 술에
벌레 한 마리를 집어넣으십니다. 잠시 뒤에 이 벌레는 허우적거리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형제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이
형제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신부님. 벌레가 뱃속에 있더라도 술을 마시면 죽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술이 얼마나 유해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신부님의 의도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오히려 술을 마셔야 되는 이유 한 가지를 더 늘려준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주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문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병원에서 검사 결과 6개월 이상
살기 힘들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앞이 캄캄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서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셨지요.
그리고 열심히 사셨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셨기 때문일까요? 치료를 받으시면서 2년이 지난 지금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시련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커다란 짐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고통과 시련이 행복한
시간도 될 수 있다는 말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해 그럴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평화와 기쁨의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주님께 깊이 빠질 수 있어야 합니다. 깊이 빠지고
빠져서 낮은 데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의 멍에는 적당히 무거워서
그것을 멘 이들에게 오히려 힘을 북돋아 줍니다. 어떤 성인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우리가 은총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떠받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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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밴쿠버 한인 성당 내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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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욕지족(少欲知足)
불교에서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을 따져 보면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은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욕망이라는 것이 점점 커져서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서 자연 안에서 또는 이웃과의 따뜻한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더 큰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이며,
마음의 결단입니다. 그때에 작고 적은 것을 통해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행복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밴쿠버 한인성당의 주보성인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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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온유와 겸손으로 지는 사랑의 멍에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7일 수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
마태 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온유와 겸손으로 지는 사랑의 멍에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40,28)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40,31)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8-2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미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30)고 하셨을까요?
‘멍에’는 종교적 가르침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곤 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법’(예레 2,20; 호세 10,11)과 오경의 계명들
(사도 15,10)이나 거룩한 삶을 위한 하느님의 권고(집회51,26)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613가지로 세분하고 그것을 어김없이 정확히 지키도록 가르쳤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멍에는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율법해석과 그것을 실천하는 태도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지나치게
율법을 세분함으로써 그 본질이요 혼인 사랑을 망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태도에서도 엄격하게 정확하게 지키도록
요구함으로써 자유로운 사랑의 삶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랑의 혼이 실종된 제도나 법과 권력은 큰 짐이 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어진 율법(에제20,13)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지요. 그 뿌리에는 탐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 명예욕의 그 끈질긴 뿌리는
사랑과 무관한 삶을 살도록 충동질 합니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우리네 삶의 현장은 인간은 쓰다만 연장처럼
버려지고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의 경쟁과 지배와 폭력과 차별만이
남게 되지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다워지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 위에 권력과 법과 제도를 두는 태도야말로
우상숭배이며 패망으로 치닫는 지름길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기꺼이 예수님 앞으로 지고가야 할 멍에는 하느님의
법을 사는 태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해석하여 세분화한
율법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어김없이 정확하게’ 지키도록 가르쳤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사랑이신 주님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고유한
자신의 인격과 처지 안에서 하느님을 닮고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니 온유함과 겸손으로 영적
여유를 되찾아 규범과 문자에 얽매여 지나치게 세심해지거나
완벽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11,29) 우리 삶에
필요한 법과 제도에 사랑의 혼을 불어넣고, 주님 사랑의 법을 형식과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편안하고 자유로운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실천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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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가해 12월7일 수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성급한 마음을 먼저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내려놓음이 없는 휴식은 참된 휴식이 아닙니다.
휴식 없는 감동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우리 힘만으로 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생명력을 다시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뜨거워지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뜨거움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분주한 우리들을 지탱케하는 것은 분명 휴식입니다.
참다운 휴식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휴식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초대하십니다.
인생의 참된 교훈은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휴식과 안식에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조화와 균형을 잃어버린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안식을 통해 우리의 생명은 성탄처럼 다시 뜨거워 질 것입니다.
쉬는 법을 다시 배우십시오.
예수님에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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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16년 가해 12월7일 수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 11,28-30
지난 월요일에는 서울교구 군종신부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매년 교구장님께서는 군종신부님들을 초대하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교구청에 있는 신부님들은 함께 배석을 하기에 저도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군종신부님들은 대부분 군대를 2번
가셨습니다. 첫 번째는 사병으로 입대하여서 군 복무를 합니다.
군종신부로 지원한 신부님들은 군사훈련을 받은 후에 장교로
임관하게 됩니다. 오랜 만에 군대 이야기를 들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목하는 신부님들이 고마웠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올 때까지 열심히 살겠다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짠’했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성탄선물과 함께 덕담을 들려주셨습니다. 오늘은
교구장님께서 들려주신 덕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존경입니다. 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존경하면 신부님들도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번의 군대 생활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있으면 사목이 힘들어 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 짜증을 내면 건강에도 좋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존경의 마음을 지니면 상대방도 나를 존경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헌신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섬기로 오셨던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삶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주님께서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도 헌신이지만 작은 일을 함에도 배려가 있다면 그것도
헌신입니다.
세 번째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고 하였습니다.
태산이 높아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는 시가 있습니다.
벼는 뜨거운 여름의 햇빛을 받아야 알곡이 익어갑니다.
인자무적이라는 말도 있지만 성실무적이라는 말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 번째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는
‘겸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뜻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악한 세력은 ‘교만’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래도 된다는 교만한 마음’이
‘국정농단’이라는 혼란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군종신부님들이 군 복무를 잘 마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적어 놓은 글인데,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성소국의 일, 복음화 학교의 일, 신학교 강의, 책을 읽는
것들은 제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좋아 할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의무감으로 하는 일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도 해야 할 일들을 좋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좋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짐과 멍에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십자가도, 부활의 영광도 다 축복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을 넘어서지 않는 부활은 없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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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멍에 지려는 신자
2016년 가해 12월7일 수요일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 11,28-30
주님 멍에 지려는 신자
입만 열었다 하면 돈자랑 힘자랑 명품자랑 얼굴자랑 몸자랑 휴
미쳐요! 그것만도 아닙니다. 인생 능력 세상 본 것 못 본 것까지
정말 미치지요. 그게 쉬는 줄 아니 이게 병 아니고 뭡니까.
과시 병 뻥 병 우쭐 병이죠.
이런 병 파리채로 안 죽어요. 몽둥이찜질로도 총칼도 영 안
없어집니다. 이런 병은 예수님께 안겨 쉬어야 해요. 자랑하며 사느라
고생 많았지요. 우리 멍에 벗고 주님 멍에 지려는 신자라면 높은 차원
대화를 알아듣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
들기보다 내려놓기 갖기보다 주기 먹는 게 중요하면 싸는 건 더
중요해요. 온갖 병 만드는 병에서 치료되어 주님의 안식 받을
나눔멍에 참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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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가톨릭 성가 42번 가장 미소한 자를 대접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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