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9일 ‘관용, 존경, 인내, 헌신, 사랑’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2-09 06:46:50    조회 : 50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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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가해 12월9일 금요일 [(자)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수도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8,17-19 † 복음 마태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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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의 이중적인 잣대를 탓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는 마치 경건하게 단식하면 자기를 드러내려고 단식한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단식을 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과 같은 이중적인 행위를 묘사하신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기를 촉구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식사마저도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신 것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우리는 같은 현상을 보고도 자신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요. 또한, 어떤 일을 하기 전과, 그 일을 한 뒤의 마음가짐이나 심정 또한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하는 일에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신뢰심과 굳센 믿음을 지니고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 나에게 오심을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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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긍정적인 마음으로 2016년 가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8,17-19 복음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6-19 이제 저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서 돌아갑니다. 비록 짧은 일정이었지만 좋은 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또한 주님의 따뜻한 사랑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새벽님들께서 많은 기도와 염려를 해주신 덕분이 아닐까 싶네요.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밴쿠버에서의 마지막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저는 갑곶성지에서 개 세 마리를 키웁니다. 이 개의 종은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 똑똑하고 너무나도 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처음에 이 개를 키우게 되었을 때 성지 안내견으로 키우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순례 오신 분들이 가봐야 할 곳을 개들이 안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하루 만에 포기했습니다. 풀어만 놓으면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신나게 뛰쳐나가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한정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돼지에게 노래를 가르치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쓸데없는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되지도 않을 일에 힘과 기운을 쏟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종종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입니다. 무조건 틀렸고 자신은 무조건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좋은 의도도 나쁜 의도로 받아들이시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스스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서 공동체에 큰 혼란을 가져오십니다.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도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니 어떤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 ‘돼지에게 노래를 가르치지 마라.’는 말이 생각나면서 포기를 하게 됩니다. 결국 누구에게 손해일까요? 본인 스스로도 손해이며, 공동체 전체에서도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과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메뚜기와 들 꿀만 먹으면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사람들은 광야에서 회개의 삶을 사는 세례자 요한을 향해 마귀가 들렸다고 비판했지요.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라면서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그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어떤 말과 행동도 그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기쁜 소식에 자신의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소극적인 마음이 아닌 적극적으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느낄 수 있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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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리는 쓴 약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셔 우둔함의 병을 고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채 살아간다(코체프).
20161209_01.jpg 밴쿠버의 'Shannon' 폭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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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일어서는 힘(최천호) 사람에게는 두 가지 근육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몸 근육과 마음 근육. 몸 근육을 기르려면 근육이 정상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무게보다 더 많은 부하를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근섬유가 찢어지면서 상처가 나고 회복이 되면서 근육이 성장하게 되죠. 마음 근육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에 치이고, 사랑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끊임없이 상처받고 힘들면서 단련됩니다. 최대한 많이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세요. 마음의 근육이 더욱더 단단해 집니다. 바람에 흔들릴 때도 마음을 단련시키다 보면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자신감은 가지고 자괴감은 버리세요. 자신감은 코끼리도 들게 한다는 말도 있어요. 그만큼 자신감은 노력보다 강합니다. 피아니스트의 실력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자신감이 없다면 절대로 좋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가수가 아무리 노래를 열심히 해도 자신감이 없다면 절대로 좋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입니다. 남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마세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남들은 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벽하지 않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남의 아닌 나의 시선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자신감을 잃지 마세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과 같으니까요. 당당하게 살아가세요. 나 자신을 위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쓸데없는 고집이나 집착은 버려야지요. 또한 부정적인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자신감을 갖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더욱 더 기쁘게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61209_02.jpg 스퀴매쉬입니다. 이곳에서 흰머리 검은 독수리를 봤지요.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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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9일 금요일 대림 2주 금, 마태 11,16-19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마태 11,18-19 참조)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음 오늘 복음은 회개하라고 당부하던 요한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대의 모순과 변덕스러운 태도를 지적합니다. 군중들은 회개와 함께 단식을 요구하던 요한을 미친 자로 취급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잡수신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으로 취급합니다 (11,18-19). 군중들은 요한을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쳐 버렸습니다. 또한 이미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하늘나라의 사정을 자기식대로 거꾸로 알아듣습니다. 한마디로 제 잘난 맛에 제멋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남을 비난함으로써 자기 존재 가치를 찾으려는 어리석음으로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탄식하게 한 군중들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태도였지요. 회개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굳어진 시각과 습관, 행동방식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식대로 생각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자신이요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자기 생각과 판단이 옳고 낫다는 교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히면 다른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간하지 못하고, 잘못을 알고도 인정하려 들지 않게 됩니다. 참으로 자기만족과 자기평가에 도취되어 살면서도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태도의 결과 교만에 빠지게 되면 자기 비교의 함정에 자주 떨어지고 다른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善)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매우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사고와 처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통합과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지요. 늘 그들 안에는 부정적 시각과 열등감이 자리 잡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에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오심을 갈망하고 준비하면서 이런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인 삶을 청산해야겠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깊은 뜻을 깨우치고 실행하도록 힘써야겠지요. 내 중심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고 지혜이신 주님을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자기중심적이며 왜곡되고 비합리적인 사고와 태도를 버리고 하느님께 시선을 두고 그분에 대한 목마름을 지녀야 할 때입니다. 나의 기준과 고정된 사고의 틀과 시각을 내려놓고 사랑이요 지혜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 발걸음을 멈춰야겠지요.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방식, 선입견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을 비추도록 말씀 앞에 자신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품고 있는 거짓 관념과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내 삶의 중심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을 주님께 두는 것이 바로 근원적인 회심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하느님이 내 삶의 궁극적 목표요 존재이유이며, 우리의 계획과 이상보다 훨씬 크신 분임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지요. 오늘도 온갖 거짓 우상과 교만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얼굴을 돌려야겠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거나 변덕을 부리지 말고 ‘주님의 거룩한 영’ 안에서 항구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소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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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공감의 아름다움 2016년 가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오 11,16-19 공감의 아름다움 지난여름 힐링 차 형제들과 함께 낚시를 갔다가 한 가지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갔었지만 역시나 꽝이었습니다. 땡볕에 대어 한 마리 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다해봤지만 전혀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제 옆에 한 어르신께서 낚시를 하고 계셨는데, 현지 분이신 것 같은데도 저랑 똑같이 잔챙이들만 잔뜩 건져 올리고 계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둘이서 너무 더운 날씨 탓을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던 어느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르신 낚싯대가 휘청하면서 낚싯대가 마구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컸던지 낚싯대 끝이 거의 90도 각도로 휘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콧노래까지 부르시며 녀석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는데, 녀석이 얼마나 대물이었던지 발밑에까지 끌어오는 데만 5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녀석의 얼굴이 보이고 이제 뜰채로 끌어올리기만 하면 되는 수확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의 상태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물을 낚으신 어르신께 진심어린 마음으로 축하의 인사를 올렸어야 마땅한데,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강한 시기질투심과 분노가 마구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물고기가 알았던지 정말 근사하게 생긴 녀석이 마지막 순간 필사의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낚시 줄을 끊고 쏜살같이 깊은 바다 속으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어르신께서 얼마나 허망하셨던지 입에서 큰 장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던 저는 부끄럽게도 솔직히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떻게 해서든 꾹 눌러 참아야 했었는데,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께서 저를 확 째려보시는데, 그 눈빛이 정말 섬뜩했습니다. 그 눈빛은 얼마 전 조사받으러 검찰청에 출두했다가 질문하는 여기자를 째려보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 눈빛 저리가라였습니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우리 인간과 공감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 인간의 필요성에 호응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인간과 동고동락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신 모습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인간 옆에서 같이 고통당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 옆에서 같이 슬퍼하셨습니다. 눈물 흘리는 사람 옆에서 같이 눈물 흘리셨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앉아 위로해주셨습니다. 기뻐하는 사람 옆에서 같이 기뻐하셨습니다. 경사스런 일을 맞이한 사람에게 축하해주었습니다. 오랜 만에 걸린 대어를 놓쳐 크게 상심하고 계시는 어르신 옆에서 공감해드리지 못하고 낄낄대고 웃은 제 모습이 공감과 호응의 명수이셨던 예수님과 너무나 크게 대비되어 부끄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공감과 호응의 명수셨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몇 차례 눈물을 흘리신 흔적이 보입니다. 절친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끝끝내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들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의 과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제발 좀 더 공감하라고, 제발 좀 더 호응하라고 이렇게 당부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오 복음 11장 17절) 대림시기 예수님께서는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우리를 회개와 새 출발의 삶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초대에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피리소리와 춤사위에 조금이라도 반응하고 움직이는 대림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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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대림 제2주간 금요일 2016년 가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오 11,16-19 386세대인 저는 ‘과잉진압, 과격한 행동’을 수반하는 데모에 익숙해있었습니다. 사복차림의 ‘백골단’의 모습도 보았고, 중무장한 ‘전투경찰’도 보았습니다. 최루탄과 사과탄도 보았고,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기침과 눈물도 흘려 보았습니다. 언론은 늘 과격한 행동과 폭력시위가 문제라는 보도를 하곤 하였습니다.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고, 국가의 질서를 혼란케 하기 때문에 시위와 행진은 차도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였고, 정해진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987년 6월, 그럼에도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고, 시민들의 힘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냈습니다. 저는 6번의 대통령 선거에 소중한 한 표를 행사 하였고, 그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절차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의 힘으로 국민들이 원하는 국민을 위하는 대통령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난 2016년 저는 새로운 집회와 시위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법원은 집회의 장소와 행진에 대해서 유연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교통 흐름의 방해도, 국가의 질서가 혼란해질 거라는 염려도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앞서지 않는다는 결정이었습니다. 늘 차에게 양보하였던 넓은 거리와 광장은 자유와 민주를 위한 함성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숨 막히는 긴장과 일촉즉발의 삼엄함은 사라졌습니다. 광장은 축제의 자리가 되었고,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교실이 되었습니다. 100만이 넘게 모인 자리도 깨끗하게 정리되는 성숙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대포도, 최루탄도, 강경진압도 없었습니다. 시민들은 질서 있게, 평화롭게 자신들의 주장을 이야기하였고, 한국의 집회 문화는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의 집회와 시위는 직선제 개헌을 넘어서 부정한 권력, 부패한 권력, 무능한 권력이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권력’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요한의 회개와 단식도 하느님께로 향하는 축복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아픈 이와 함께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하느님의 아들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30년 후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휴전선은 세계적인 생태 공원으로 변하였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면 좋겠습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서서 통일된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산에서 타는 기차가 평양을 거쳐서 북경으로, 모스크바로, 유럽으로 달려가면 좋겠습니다. 지역, 이념, 계층, 신분, 학연, 세대라는 낡은 ‘틀’을 벗어버리면 좋겠습니다. ‘관용, 존경, 인내, 헌신, 사랑’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쓰면 좋겠습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 역시도 권력을 쫓는 사람들의 몫이 아니고, 깨어있는 사람들의 외침이 모여야 이루어 질 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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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에스까 비아또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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