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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가해 12월10일 토요일 [(자)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수도회] 눈을 뜨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행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집회 48,1-4.9-11
† 복음 마태 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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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엘리야는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이
이교도들이 믿는 바알 신을 숭배하자, 엘리야가 카르멜 산 정상에서
이교 신을 믿는 850명의 예언자와 대결하여 통쾌하게 승리합니다.
그 결과 아합 왕이 회개하지요.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를
또 다른 메시아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열왕 18장 참조).
또한, 엘리야는 구약에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2열왕 2,9-11 참조). 따라서 엘리야가 메시아로서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800년이 지나, 엘리야의 모습으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기에 엘리야 예언자를 떠오르게 하였지요
(2열왕 1,3-8 참조).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이 요한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 요한이 헤로데에 의해 참수당하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지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건부 신앙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요구 사항만 나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주님께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 이 점을 늘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점을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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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2016년 가해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8,1-4.9-11
복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0-13
드디어 4박 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역시 집이
편하네요. 그래도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지를 떠나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하고 돌아오니 또 다른 활력을 얻게 됩니다. 올해
휴가를 한 번도 가지 못했는데, 특강을 위해 다녀온 여정이라도 이
역시 휴가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짧은 일정 역시 어렵고 힘든 일정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갑곶성지에서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어렸을 적에 저희 집에는 제비 집이 있었습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에 제비 두 마리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물어 오더니만, 어느
순간 작고 예쁜 집이 생기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둥지를 짓는 모습에
제비들이 멍청하다 싶었습니다. 둥지를 짓던 날은 기상 조건이 별로
좋지가 않았거든요. 바람도 불었고 빗방울도 떨어지는 날이었습니다.
맑은 날도 많은데 왜 그런 날을 골라서 고생을 할까 싶었지요. 맑은
날을 따질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힘들게 둥지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책을 보다가 새들이 일부러 비바람이 부는 날에 둥지를
짓는다는 글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새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꽤 많은 새들이 비바람이 부는 날을 일부러 고른다는
것이었지요. 바보 멍청이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어떤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랍니다.
어렸던 저는 악천후에 둥지를 짓는 제비를 향해서 ‘어리석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제 말을 알아들었다면 제비는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싶더군요. 아마 제게 ‘아무것도 모르면 용감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라면서 비웃지 않았을까요? 지금은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 일부러 악천후인 날씨를 고른다는 말에 ‘정말로
지혜롭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엘리야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들이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자신의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언자는 이러할 것이다’, ‘예언자는 이러해야
한다.’라는 기준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다가온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판단은
더 나아가 주님 역시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실제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던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이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일
역시 자신의 기준을 내세워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스스로의 판단들이 얼마나
부족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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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 것. 첫인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그 정확성을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다(이드리스 샤흐).
제비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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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대하는 방법(이기주, ‘언어의 온도’ 중에서)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요즘에 읽은 책에 나오는 글귀였습니다.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이
이런 방법으로 분노를 조절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이든 분노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누이트들처럼 무작정 걸어서 긴 막대기를 꽂아두고 오는 방법도
있겠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노를 대하는
나만의 방법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분노를 대하는 나만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한 번 소개를
해보시죠?
밴쿠버 시내가 보이는 곳에서....-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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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눈을 뜨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행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10일 토요일 대림 2주 토, 마태 17,10-13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태 17,12)
눈을 뜨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행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변모와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면서, 메시아가 오기 전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을 생각하고 그분께 여쭙습니다(17,10).
엘리야는 횃불처럼 타오르는 불이 되어 주님의 영광과 말씀을
전했습니다(집회 48,1. 4). 그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백성들에게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징벌을 예언했고, 왕이라 할지라도 정의롭지
못하고 하느님을 저버릴 때에는 온 나라에 기근과 재앙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서 아합 왕이 숭배하는 바알을
받드는 예언자 850명과 대결하여 이김으로써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1열왕 18,20-39).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산 채로 승천해 있다가(2열왕 2,11)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고 믿었습니다(말라 3,1. 23 참조).
제자들이 이런 율법학자들의 생각에 대해 묻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1-12)고 하십니다. 곧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는데도 주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율법학자들처럼 엘리야의 몫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생각한 엘리야와 메시아를 기대할 때가 있습니다.
눈을 뜨고도 이미 와 계신 메시아를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영혼의 어둠 때문입니다. 현세 이익을 챙기고 셈하는 데는
재빠르지만 주님을 보는 데는 아둔할 때가 적지 않지요.
주님께서는 이 대림절에 영(靈)의 눈을 뜨도록 초대하십니다. 눈을
뜨려면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무엇을 알아보지 못하는지
기도 안에서 성찰해야겠지요. 사실 우리는 눈을 뜨고 보면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자신이 만들어낸
메시아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그 결말은 죽음뿐임을 기억해야겠지요.
우리 모두 현세를 관통하고 세상을 정화하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예민하고 깨끗한 영의 눈을 뜨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만의 사고의 틀과 탐욕적인 시선을 거두고, 신앙을
통해 나만의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웃 사랑과
공동선을 먼저 추구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도 선행도
정의마저도 자기 식대로 하려는 버릇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눈을 뜨고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신념의 허상과 왜곡된
사고의 틀, 속화된 욕망의 흐름에 매여, 구원의 선물을 제멋대로
다루는 불행한 우리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자신을 살피는 거룩한 자기
돌봄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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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께서 우리를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016년 가해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 17,10-13
주님께서 우리를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간과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백성들이 극단적인 곤경에 처했을 때
하느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당신 도움과 위로의
손길을 보내신 흔적을 명백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나 세례자 요한 같은 대 예언자를 보내셔서 “여러분들이
멸망의 길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면 새 삶을 주시라라.”는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백성들을 따뜻이 보살피고
어루만져줄 착한 목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오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그런 분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으로 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의 구원자로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도 희망을 지녀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시련
중에 있는 우리 민족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풍전등화,
백척간두 위에 서 있는 우리를 나몰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힘겨워하는 우리를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할 지도자,
그래서 이 범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능력을 지닌 좋은 지도자를
보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최근 진행된 청문회, 그리고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난 몇몇 강단 있고
소신 있는 인물들을 바라보며 저는 어둠 속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신물 나는 정치인들처럼 구린 구석이 조금도
없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기에 그리도
당당한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공은 우리 국민들에게 다시 던져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이제부터라도 나라 일을 강 건너 남의
일이려니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소위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주인이기에 우리가 먼저 우리나라의
파수꾼으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 기본적인 인성이나 영성,
양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파렴치한 이들을 우리의 지도자로
뽑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생각도 없고 비전도 없으며, 연구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는 머리가 텅 빈 사람들, 그래서 공개석상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댑다 내지르는 바보들을 우리의 지도자로 뽑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그들의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 일말의 양심도 없는
사람들을 이 성스런 역사의 현장에서 하루 빨리 추방시키기 위해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정치가 완전히 밑바닥을 기는 이 시대 마태오 복음사가는 참으로
특별한 한 인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명쾌했던지 모든 유다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
설교를 듣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논리정연 했고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웠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가
단식과 기도 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은 자기 주도적 삶을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극단적
청빈 생활을 통해 부자들과 권세가들과 거리를 확실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부패한 부자나 기업가들로부터 검은 돈,
냄새나는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어디가나 당당했습니다. 설교 때도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거침없이 유다 고위층들의 부정부패와 타락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상대가 헤로데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직언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처럼 청렴결백한 지도자, 그저 우리 국민들의
선익과 복지, 기쁨과 행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할 좋은
지도자를 보내주시길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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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림 제2주간 토요일
2016년 가해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 17,10-13
지난 수요일에는 수학능력 시험 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신학교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성적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아이들의 성적을 알 수 있 있습니다.
공부 머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공부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영어는 책을 외우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책을 외우면
어느 정도 시험문제를 풀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외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거의 다 외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외울 수 있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습니다.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거의 다 잊어버렸는데 기억나는 영어 문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시는 문장일 것입니다.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입니다. 내용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여러분의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주어만 바꾸면 다양한 내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친구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친구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해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뜻도 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는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성서는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푼 이야기,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이야기, 승천한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물이 맑으면 달이 머물고, 나무를 심으면 새들이 머문다고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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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 17,10-13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반영억 신부
한 해의 끝자락에 정리할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평화를
기원하고 싶다. 촛불민심이 혼란에 빠진 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선한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성경에 보면,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코헬3,1-9)라고 적혀있다. 때와
시기를 맞출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절실하다.
대통령이 피부미용을 하고 머리손질을 하는 것을 누가 탓하겠는가?
세월호가 침몰하는 당일 그 시간이라면 문제이다. 공직자들이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따라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공익이 아니라 사익추구라면, 잘못된 요구라면 그것에 대해
침묵할 때가 아니라 말할 때이다. 시기와 때를 놓친 결과는 너무도
많은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아니,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먼저 자신을
죽일 때이고 마음 안에 있는 그릇된 틀을 부술 때라고 인식한다면
지금은 특검을 해야 할 시기이고, 탄핵을해야 할 때라고, 사임을 해야
한다고 소리치지 않고 껴안을 때이고, 사랑할 때라고 외칠 수
있으련만 그 기회를 놓치고 있어 안타깝다.
정치인들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으로 첫째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것', 둘째는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 셋째는 '소신이
없을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현실을 빗댄 우스갯소리이다. 그러나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임기웅변에 뛰어나다 해도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 없고 참을 이길 수 없다. 진리 안에 자유로운
지도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운 마음이 전혀 없는 뻔뻔함이 더해가는
현실에 촛불은 더욱더 타오를 수밖에 없다. 소신 있고 주관이 뚜렷한
지도자를 원하지만 똥고집만 피우거나 줏대 없이 흔들리는 이들은
그 명이 다한 때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채근담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들은 이야기라고 다할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본 일이라고 해서 본 것을 다 말할 것도 아니다. 사람은 그
자신의 귀와 눈과 입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거칠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궁지에 빠지고 만다. 현명한 사람은 남의 욕설이나 비평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또 남의 단점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 대해 말이 많다. 실망을 넘어 절망스럽고 ‘이게 나라냐?’
라는 말도 나온다. 국정조사 청문회를 보면서 명쾌한 진상 규명에
기뻐하기 보다는 기득권의 속을 보며 상처만 키워간다. 그러나 말이
많은 만큼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할 때이다. 지금은 사랑할 때이고
평화를 위해서 기도할 때임이 분명하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때,
기뻐 뛸 때가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오 에스까 비아또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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