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1일 우리가 기다리는 분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2-11 06:46:56    조회 : 492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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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가해 12월11일 주일 [(자)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수도회] 탐욕과 교만을 버리고 아픔을 함께하는 기다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35,1-6ㄴ.10 ○ 제2독서 야고 5,7-10 † 복음 마태 11,2-11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선 주일이기도 한 오늘,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요한의 권고를 새기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기로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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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아마도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요한은 자신이 기대하던 메시아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요한은 왜 이런 의문을 품은 것입니까? 요한은 광야에서 주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만을 외치다 보니, 하느님을 벌을 내리고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시며 어느 누구와도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죄인들과도 어울리다 보니 이런 비난마저 받으셨지요.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루카 5,33). 이처럼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무서워하거나, 죄를 지은 나머지 스스로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절망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을 되돌려 주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말씀대로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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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2016년 가해 12월11일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5,1-6ㄴ.10 제2독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5,7-10 복음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1 예전에 처음으로 자전거 일주를 했을 때가 떠올려집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전거 여행이 아니라 저 혼자 인천에서 부산까지 가는 여정이었지요. 처음 해보는 것이라 겁도 났지만, 잘 준비한다면 가장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열심히 짐을 꾸렸습니다.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해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꽤 많더군요.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서 코펠과 버너를 준비했고, 매일 미사를 위한 미사가방도 준비했습니다. 혹시 몰라서 자전거 복장이 아닌 일반 평상복도 가방에 실었습니다. 비상약, 지도, 랜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mp3플레이어까지 조금이라도 필요할 것 같은 것은 모두 가방에 넣었습니다. 너무 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전국일주를 했던 분들이 쓴 책을 봐도 이 정도는 반드시 구비해야 한다는 말에 어떻게든 가방에 넣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드디어 준비했던 짐들을 자전거에 달고 또 등에 짊어지고 출발했습니다. 이 상태로 하루를 갔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에 비로소 깨닫습니다. 어떤 물건을 가방에 담느냐보다 무엇을 두고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괜히 쓸데없는 것을 가방에 구겨 넣어서 혹독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음날 거의 모든 짐들을 과감하게 택배로 보냈습니다. 그 뒤로 부산까지 얼마나 편안히 갈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모든 짐들을 다 들고 갔었더라면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과감하게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꼭 행복하고 편안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많은 것을 가지려고만 합니다. 또한 내게 필요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남들이 누리는 것이 싫다고 꼭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과연 행복하고 편안할까요?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바라보면서 필요한 것만을 가지고 있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 역시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의심을 품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 세례까지 베풀 때에 이미 알아봤던 요한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그 역시 들리는 소문에 흔들렸던 것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는 소문에 의심을 갖게 된 것이지요.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죄로 물들어 있는 이 세상을 벌하시는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심판관이 아닌 사랑을 나눠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벌하는 분이 아니라 용서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를 했음에도 의심을 품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과연 오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런데 먼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준비를 하면서 사랑과 평화의 주님임을 기억하면서 기다릴 때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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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상에서 내가 인정한 유일한 독재자는 내 안의 작은 목소리 뿐이다(마하트마 간디).
20161211_01.jpg 세례자 요한이 갇혔다는 마케루스 요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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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승에 간 흥부와 놀부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인데요. 이 글을 보시고 한 번 실컷 웃어보시길 바랍니다. 저승에 간 흥부와 놀부가 하느님 앞에 섰다. “흥부 놀부는 들어라. 너희 앞에 똥통과 꿀통이 보이느냐? 각자 어느 통에 들어가겠는고?” 놀부가 잽싸게 먼저 말했다. “저는 꿀통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럼 놀부는 꿀통에 들어가고, 흥부는 똥통에 들어갔다 나오너라.”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럼 이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상대의 몸을 핥아라.” 그 말에 놀부는 죽을상이 되었다. 잠시 후 흥부아내와 놀부아내가 하느님 앞에 섰다. “흥부아내와 놀부아내는 각자 어느 통에 들어갔다 나오겠느냐?” 놀부아내가 놀부를 슬쩍 쳐다보니 놀부가 똥통으로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놀부아내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말했다. “대왕님 저는 똥통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냐? 그럼 놀부아내는 똥통에 들어가고, 흥부아내는 꿀통에 들어갔다 나오너라.” 두 여인은 하느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다. “자, 지금부터 흥부와 놀부는 각자 자기 아내와 마주 서서 아내의 몸을 깨끗이 핥아라.” 놀부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하느님 앞에서 편법이 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의 논리를 앞세워서 각종 편법으로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려고 할까요? 나중에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큰 코 다치지 않을까요?
20161211_02.jpg 성탄이 가까워졌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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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탐욕과 교만을 버리고 아픔을 함께하는 기다림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11일 주일 가해 대림 제3주일, 마태 11,2-11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탐욕과 교만을 버리고 아픔을 함께하는 기다림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사야서 예언자는 남유다 예루살렘의 기득권 세력의 탐욕과 교만을 날카롭게 고발합니다. 하느님을 상실해버린 결과 땅은 화폐해지고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사라져갑니다. 왕정을 이룬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함으로써 악을 재생산하였습니다. 빈부 격차가 심해져 가난한 이들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탐욕이 죄의 뿌리였고 하느님을 멀리 하고 공유와 연대와 환대의 공동체는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결국 그들은 외세의 속국이 되어 몰락이라는 비구원의 파국적인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어두운 상황에서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이 즐거워하며 꽃을 피우는”(이사 35,1)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인간의 파국적인 상황을 저 뿌리부터 새롭게 변혁하는 계기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손에 맥이 풀리고, 무릎에 힘이 빠져 꺾이고 마음이 불안해질 것입니다.’(35,3) 오늘 복음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마태 11,3).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11,5-6) 오늘 독서와 복음이 말해 주는 것은, 주님의 오심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선물이요, 영원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결정적 변화의 계기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주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먼저 이사야 예언자의 고발을 귀담아 마음에 새겨 우상을 숭배하고 교만과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풍요와 과학문명의 발달, 첨단 정보화 사회의 한편에 눈에 띄지 않는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게로 눈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아닌 세상 것을 기다리고 갈망하며 섬기는 우상숭배야말로 사회적 불의를 부르는 암세포와 같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것을 경고하십니다. 왕궁에서 사치스런 옷을 입고 사는 속화된 사람처럼 사치와 쾌락에 빠지지 말아야겠습니다(11,8). 자기를 드러내려는 사치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쾌락을 추구하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야고 5,7)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의 영을 갈망함으로써 가난한 자 되어야겠습니다. 나아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말고 오시는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굳건한 믿음 안에서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는”(마태 11,5) 자유와 해방을 실천하고 나누도록 자신을 내놓아야겠지요. 오늘도 온갖 우상숭배와 자기중심적인 삶을 청산하고 가난한 자 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눈물과 한숨을 보고 함께하며 주님을 기쁘게 맞이했으면 합니다.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 사회 부조리와 부패를 완전히 뒤엎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나로 숨 쉬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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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대림 제3주일 2016년 가해 12월11일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마태오 11,2-11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정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한몫을 잡으려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노름판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은 패가망신하기 마련입니다. 어른들은 이야기 하셨습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 가을이 오면 겨울을 준비하여라.’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꽃동네를 설립하신 오웅진 신부님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걸인들과 함께 작은 움막을 짓고 나눔을 시작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사제의 꿈은 작은 불씨가 되었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꽃동네는 외로운 이들, 지친 이들, 아픈 이들, 가난한 이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꽃동네를 직접 방문하셨고, 위로와 희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서 복음을 전하던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분의 숭고한 삶과 사랑은 많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다룬 ‘울지마 톤즈’는 한 사람의 희생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발이 뒤틀린 나환자들을 위해서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알려주기 위해서 스스로 악기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된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서 신학교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거리를 밝히는 작은 촛불이 거대한 권력과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작은 촛불들이 모이니, 거대한 파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정권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권을 원하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의 고리를 끊고, 한걸음 더 도약하는 희망의 나라를 원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추기경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복음화 학교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신자들의 삶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앞으로 교회는 복음화 학교와 같은 모임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6년 전에 시작한 복음화 학교는 작은 불빛이었습니다. 교실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때로는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생활이라는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긴다는 말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을 탓하고 심판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난을 참고 이겨낸 사람들의 본보기로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예언자들을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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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성가 302번 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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