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3일 아버지의 말을 들은 사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2-13 06:20:35    조회 : 519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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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가해 12월13일 화요일 [(홍)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수도회] 들은 바를 실천하는 행복한 사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스바 3,1-2.9-13 † 복음 마태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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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시키자, 맏아들은 거절하지만 둘째는 쉽게 수락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행동은 정반대이지요. 따라서 오늘 비유는 하느님 말씀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대에는 세리나 창녀들같이 공인된 죄인들은 그 죄에서 벗어나는 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세밀하게 규정된 참회와 보속의 절차에 따라 정화될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번 돈을 참회하는 데 쓸 수 없다고 종교 지도자들이 규정하였기에 중죄인들이 죄를 벗어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지요. 그러기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늘 사랑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과도 같지요.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끌기는커녕 주님에게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끔 하였기에 그들의 죄가 죄인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특권을 누리면서 권력과 재화를 독점하기에 힘없는 이들이 상처를 입지 않습니까? 반면 나눔의 행위는 상대방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벽을 허물고 일치를 가져다주지요. 결국, 이 사회까지도 살리는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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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 2016년 가해 12월13일 화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구세주의 구원이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다.>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2.9-13 복음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8-32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버스를 타고 강원도의 멋진 산으로 떠났습니다. 이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 자연경관이 너무나 멋진 지역, 산세가 아름다운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버스 안에 타고 있었던 등산객들은 이 광경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뜨거운 햇빛에 눈이 부셔서 버스의 커튼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잠들었고, 몇몇 사람들은 누군가를 향해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도착해서 오를 산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이 계속해서 감탄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홀로 앉아서 커튼을 살짝 걷고 창밖의 멋진 광경을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지요. 물론 이 등산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잘 도착해서 등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행이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집에 다시 돌아오는 순간까지가 아닐까요? 따라서 중간에 가는 길에 보게 되는 아름다운 경관 역시 이 등산객들이 느껴야 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버스 안에서 아름다운 경관을 보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커튼이라는 점을 떠올리면서,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커튼을 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음속에 커튼을 치고 있어서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합니다. 대신 쓸데없는 말과 행동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마음의 커튼을 과감하게 걷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면서 자신 역시 겉과 속이 같은 사람,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일반적으로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행하는 것, 반대로 실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행하지 않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낫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정말로 열심히 성당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을 봅니다. 그런데 실제 성당 밖에서의 생활은 성당에서와는 정반대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의 커튼이 쳐져 있는 사람으로,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작은 아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신앙생활을 전혀 하고 있지 않지만,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데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커튼을 걷어내는, 복음에 등장하는 맏아들의 모습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떤 아들의 모습을 더 좋아하실까요? 실제로 많은 은총을 받은 사람은 그에 따른 의무도 많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받은 은총의 숫자에 따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하지 않으면 구원의 길은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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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은 눈먼 것이 아니다. 더 적게 보는 게 아니라 더 많이 본다. 다만 더 많이 보이기 때문에 더 적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랍비 줄리어스 고든).
20161213_01.jpg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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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달음(앤소니 드 멜로, ‘깨침과 사랑’ 중에서) 깨달았다고 알려진 훌륭한 선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물었어요. “스승님, 깨달음에서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선사가 답했습니다. “글쎄, 이렇게 말하겠네. 깨닫기 전에 나는 우울하곤 했지. 깨달은 다음에? 나는 계속 우울했어.” 당혹스럽죠?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다음이나 우울증은 변함없어요. 다만 우울증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선사는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행복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울증이 계속되더라도 여러분은 평온하고 침착할 수 있어요. 우울증과 싸우지 않고 우울증에 낙심하지 않으며, 우울증 때문에 방해받지 않습니다. 우울증과 더불어 평온합니다. 바로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맞습니다. 우울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 자체를 바꾼다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우울증 때문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
20161213_02.jpg 제 동창신부가 있는 수리산성지에 다녀왔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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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들은 바를 실천하는 행복한 사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13일 화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들은 바를 실천하는 행복한 사람 오늘 제1독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스바 3,1-2) 예언자는 하느님에게 반항하고 의무를 망각하여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죄로 봅니다. 힘이 약한 사회계층의 권리를 짓밟고 하느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참회의 준비를 끝내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합당한 응답을 할 수도 있으련만 그들은 끝내 그렇게 하려 들지 않습니다.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같고, 예언자들은 허풍쟁이 사제들은 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습니다.” (3,3-4)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시어 뭇 민족들로 하여금 “모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3,9) 사랑의 용서는 찬미와 섬김을 부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오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동하는 사랑과 정의를 통해 당신께 가까이 오기를 바라십니다. 불손과 거만이 아니라 겸손과 비천이야말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본질입니다(3,11 참조). 따라서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조용히 흙에 묻혀 사는 농부처럼 가난하고 겸손한 자세로 주님께 발걸음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하십니다. 또 율법에 대해 해박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섬길 권한을 받은 수석사제들과 원로들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21,31). 세례를 받은 지 오래되고 성경지식과 신학에 대해 해박하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요. 이성적 지식과 하느님의 살아있는 지혜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로부터 축성되고 일정한 권한과 직무를 받는 성직자, 수도자 자신들이라 해도 그 신분 때문에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아무리 경청한다 하여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한 말씀이라도 온 정성과 힘을 다해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21,28-31 참조). 그러니 늘 깨어 자만에 빠지지 말아야겠지요. 영성생활에서도 나의 신분이나 지식, 재물, 사회적 지위, 재능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들은 바를 사랑으로 실행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꿀 뿐 아니라 행동으로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자비의 증인, 정의의 증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처럼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가난과 비천함 가운데서 맑은 영혼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의탁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는 복된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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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16년 가해 12월13일 화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 21,28-32 저는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지혜로우셨고, 강직하셨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으셨고, 한번 약속한 것은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처럼 생각이 깊으셨고,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저의 서품성구인 시편 126장을 족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작은 형은 술 때문에 실수를 하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가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술을 마시면서 아들에게 술을 끊으라고 말을 할 수 없다. 오늘부터 나는 술을 끊겠다.’ 아버님께서는 즐겨하시던 술을 끊으셨습니다. 하느님 품으로 가실 때까지 40년 이상 술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가능하면 약속을 지키려하지만 욕심 때문에, 나약함 때문에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발효와 부패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결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발효의 과정에도 냄새가 나고, 음식이 상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발효된 음식은 더 오래 저장할 수 있고, 새로운 영양을 제공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으로 변화됩니다. 부패는 그 과정이 발효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부패된 음식은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 식중독에 걸리기도 하고,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오래되어 곰삭은 ‘묵은지, 된장, 간장’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반면에 약속을 자주 번복하는 사람은 부패한 음식처럼 주변을 어지럽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많이 배운 것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율법과 가까이 있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는 일의 직책에 따라서 더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키면 그 신앙은 성장하고, 은은한 영성의 향기가 이웃들을 기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겉이 아무리 깨끗해 보여도, 의식과 마음이 부패하면 하느님께로 나갈 수 없습니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 보여도,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변화되면 주님의 정원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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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아버지의 말을 들은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2월13일 화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 21,28-32 아버지의 말은 들은 사람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21,28) 하였을 때 말을 들은 사람은 포도밭에 가서 일한 사람입니다. 대답은 하고 밭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러므로 언제나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소위 한자리 하는 사람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21,32).고 한 말씀은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하라는 요한의 말을 들었고, 들은 그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내로라하는 사람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참으로 잘나고 똑똑한 사람은 쓴 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부름은 주어졌고,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이들은 받아들였고 똑똑한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끝내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때로는‘아는 게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가 7,29-30).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를 거부하는 이상 하늘 문은 늘 닫혀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며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님의 마음에 꼭 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루치아 성녀는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고 결혼준비로 장만한 재물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루치아를 취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귀족은 이것에 분개하여 그가 가톨릭 신자임을 밀고하여 재판정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는 재판정에 서서 “성스러운 신앙을 지닌 순결한 마음속은 곧 성령의 궁전입니다” 하며 꿋꿋이 믿음을 고백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치아 성녀의 상본은 ‘쟁반에 두 눈이 담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루치아의 이름은 광명, 또는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데 그 빛을 말합니다. 루치아가 신앙의 빛이 되었듯이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맑고 밝은 빛이 되기 위해 먼저 회개의 요청에 응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349번 마침 성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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