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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2월2일 금요일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수도회] 눈을 떠 빛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29,17-24
† 복음 마태 8,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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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이지요.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건한 믿음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회개이지요.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내가 추구하던 삶의 자세를 180도 돌리는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단순하게 나의 생활 습관을 바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회개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님의 표양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지요.
믿음과 회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스스로
새로워지면 반드시 회개하는 사람이 되게 마련이며, 또한 어떤 사람이
회개하면 반드시 믿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며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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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2016년 가해 12월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9,17-24
복음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7-31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북극곰에 대한 영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북극곰을 보다보니 예전에 유행했던 문제 하나가 생각나네요.
그 문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추위에 강한 동물은?’ 이었습니다. 정답은
무엇일까요? 북극에 사는 북극곰이 가장 추위에 강할까요? 아니면
남극에 사는 펭귄이 가장 추위에 강할까요? 예상과 달리, 정답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것도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더군요. 왜 그럴까요?
엄청나게 추운 날에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추워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순간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다른 동물과의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인간의 위대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큰 믿음을 두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는 더욱 더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순간적인 것, 그리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믿음을 둔다면 그 가치는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믿음을 두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영원한 시간과 비교할 때 이 세상의 삶은 단지 순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삶을 지향할 수 있는
우리, 그래서 그 나라를 관장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분명 이 세상 삶 안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과 시련을 거뜬하게 이겨내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
큰 가치인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왔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이 어떻게 주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알았을까요? 또한 그분의 이름을 알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그들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을 온전하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물론 앞을 보는 사람들이 이들에게 말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앞을 잘 보는 사람들도
예수님께 이런 믿음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하느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들이 앞을 보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건강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건강해야지만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질 때에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문제가 많을 때가 바로 믿음을 증거할 때이고, 그때
비로소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가장 큰 가치를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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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길을 놓고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땐 더 많은
모험이 따르는 길을 택하라(윌리엄 슬림).
어제 특강을 했던 서울대교구의 창4동성당입니다.
오늘은 의정부교구 탄현동성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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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모델 왕 더슌(Wang Deshun)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을 어제 텔레비전을 보다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패션모델인 왕더슌(Wang Deshun)입니다. 그의 현재 나이는
80세입니다. 그리고 80세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벗은 몸은 2~30대의
청년 못지않습니다.
젊었을 때, 그는 연극배우를 했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44세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49세에는 마임 극단을
설립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모두 실패했습니다. 50세에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해서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70세가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근육을 키워보겠다고 결심합니다.
현재, 80세의 나이에 패션쇼 런웨이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바지만
입고 말이지요.
그는 말합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전성기랍니다.”
80세 모델 왕 더슌(Wang Deshun).-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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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눈을 떠 빛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삶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2일 금요일 대림 1주 금, 마태 9,27-31
“예수께서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하시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 9,29-30)
눈을 떠 빛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삶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빛이신 주님이십니다. 시편 작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시편 27,1)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27,4)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의 날에 맞을 해방의 기쁨을 전합니다.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29,18-19)
세상 것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의로움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행복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빛이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도 이 근원적인
사실을 자주 잊고 살지요. 오늘 복음의 소경처럼 눈 먼 채 살아가는
소경일 수 있습니다.
세상이 혼탁해지고 살기 어려워지는 것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정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영(靈)이 아닌 육(肉)의 눈으로 바라볼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헌법질서를 파괴하고 국민을 농단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도 모든 것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선의로 했다고
강변하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마비되어버린 소경의 무책임과
뻔뻔스러움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인간다운 세상, 아름다운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깨끗한 마음, 맑은 영혼, 순수한 눈길을
지녀야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도덕적인 정직함만으로는
지닐 수 없습니다. 도덕적 정당성과 자기절제와 정화는 인간 자신의
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앞에 내가 있으며,
빛이신 그분 앞에 있는 나는 ‘어둠’임을 먼저 인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둠을 인정하고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빛이신 주님과
일치할 수 있고, 영으로만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맑아져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는 소경들처럼(9,27-28), 우리도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온갖 세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비와 해방의 기쁨을
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우리의 간절함과
절박함이야말로 의미를 발생시키고 행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애착과 이기심 가득한 눈길은 늘 우리네 삶을 비참함으로 내몰
뿐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따라서 빛을 갈망함으로써 빛이신 주님과
일치하여 다른 이의 처지를 사랑으로 헤아리고, 이해하고 참아내며
관대하게 품어주도록 힘써야겠지요.
오늘도 어둠 중에 있는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눈을 들어 빛이요
자비이신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해방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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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제발 눈을 뜨길
2016년 가해 12월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 9,27-31
제발 눈을 뜨길
시각장애로 평생 고생해왔던 눈먼 이들의 고통을 눈여겨보시고 지체
없이 치유의 손길을 건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제 지난 삶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한때 눈먼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면이나 영혼, 진심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전부인양 속단하고 잣대질하고
평가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진리에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영적인 삶에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작은 것에 있다는 영원불변의
상식에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質)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정이요 사랑이란 것에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때로 재물에 눈이 멀다보니 재물을 하느님 위에 두게 되더군요. 자리에
눈이 멀다보니 여기 굽신 저기 눈치 정말 인간이 치사하게 되더군요.
인기에 눈이 멀게 되다보니 이중인격자가 따로 없었습니다.
눈먼 이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오늘 그분께서 우리를 향해
진정으로 바라시는 치유는 어떤 것이겠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저를 포함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눈이 멀어 있습니다. 올라가면
즉시 내려와야 한 그 자리,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있는 창피
없는 창피 다 당하면서 그리도 악착같이 버티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히 염원합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들도
원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과 영혼을 지닌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부디 권력욕으로부터
눈을 뜨시길 기도합니다. 장차관이며 수석이며 위원장이며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갖은 권모술수를 다 동원해서 박박 긁어모은 산더미 같은 재물, 그거
다 쓰고 가지도 못하고 강제추징 당하고 마치 오물 뒤집어쓰듯 욕이란
욕은 다 얻어 들을 텐데...왜 그리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그래서
더욱 정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멀쩡한 분들 하루빨리 재물에 먼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아직도 많은 것들에 눈이 멀어있습니다.
아직도 정작 봐야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이웃에게 끼치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외쳐야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오 복음 9장 27절)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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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림 제1주간 금요일
2016년 가해 12월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 9,27-31
매년 교구청 마당에서 김장을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교구청 마당에서
김장을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행사입니다. 김장은 혼자 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준비를
합니다. 김장을 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마음속에 있는 앙금을
털어내기도 합니다. 신앙은 이렇게 함께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배추는
소금을 뿌리고, 물에 담가서 절여야 합니다. 숨이 죽은 배추라야 속을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참된 신앙은 겸손함에서 시작합니다. 절여진 김치는
속을 넣어야 합니다. 김치의 속은 여러 가지 양념의 조화입니다.
‘고춧가루, 젓갈, 무, 쪽파, 대파, 갓, 마늘, 양파, 밤, 굴’등 여러 가지
양념과 재료들이 한데 어울려서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 줍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재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서 하나의 맛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도
여러 가지 양념을 넣어야 합니다. ‘사랑, 친절, 겸손, 희생, 나눔’의
양념이 우리의 마음에서 버무려지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김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가가 생각났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 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 것”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산다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담은 잘 볼 수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와에게 떠넘기는 비겁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카인은 잘 볼 수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잘 볼 수 있었기에 바세바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웠습니다. 재물과
권력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남겨 주셨습니다. ‘얼굴 잘 생긴 것 보다는 몸
건강한 것이 더 좋고, 몸 건강한 것 보다는 덕이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보고,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시작됩니다.
기도로서 자라납니다.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집니다. 성체성사로
하나가 됩니다. 사랑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다른 것들 때문에 눈이 멀곤 합니다. 돈에
눈이 멀기도 하고, 출세에 눈이 멀기도 하고, 권력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원망과 미움에 눈이 멀기도 하고, 눈앞의 이익 때문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눈을 뜨고 있지만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역시 오늘 자비를 청한 소경처럼 주님께
참된 신앙의 눈을 뜰 수 있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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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믿음으로 눈이 열렸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r2016년 가해 12월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 9,27-31
믿음으로 눈이 열렸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과에 연연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엇을
갈망한다면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하시며 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의 말씀읽기와 미사참례, 성체조배, 개인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5,15-16).
그러므로 믿음으로 갈망하십시오.“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 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 하고 말하며
다빈치의 훌륭함을 칭찬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 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요.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 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며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보다도 세상 것을 찾고 즐기고 있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눈뜬장님입니다. 육적인 눈 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진짜 봐야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더 잘 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각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481번 요르단 강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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