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1일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1-11 06:25:17    조회 : 508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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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1월11일 금요일 [(백)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수도회] 저 멀리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요한 4-9 † 복음 루카 17,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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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인간에게 죽음은 단순히 생의 마지막 순간의 차원을 넘어,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이 한 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하고, 이 순간을 잘 맞이하려고 평생을 준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평생 동안 죽음을 잘 준비한다고 해도, 죽음은 어차피 한순간에 갑자기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노아의 홍수와 롯 시대의 유황불에 비유하십니다. 모두들 하늘의 징조를 무시하고 세상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가 구원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고, 홍수에, 그리고 유황불에 죽고 맙니다. 이렇듯 우리도 주님 앞에서 심판받을 날 우리 삶의 진면목이 어떠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고, 그날에는 모든 진실이 명백히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소아시아 사람들을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그들에게 계명대로 진리 안에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 줍니다. 그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위대한 일을 바라시는 것도 아니고,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리와 계명을 평상심을 가지고 일상 안에서 늘 실천하라고 하시는 것뿐인데, 단순하지만 그냥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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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사람의 아들의 날은 곧 이루어질 가능한 날입니다. 2016년 다해 11월11일 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제1독서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 요한 2서의 말씀입니다. 4-9 복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6-37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차의 바퀴입니다. 차가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대부분 마차를 이용했었지요. 그런데 이 마차의 바퀴가 원래는 나무였다고 합니다. 나무다보니 너무 쉽게 닳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쇠로 만들었습니다. 쇠로 만드니 그렇게 닳지는 않지만 큰 문제가 발생했지요. 쿠션이 없어서 엉덩이가 너무 아팠던 것이지요. 이러한 아픔을 없애기 위해 쇠바퀴가 굴러가는 길바닥에 고무를 깔았습니다. 그제야 너무 편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큰 문제가 있었지요. 그 넓고 긴 길바닥에 고무를 까는 일에 너무 큰 비용과 노동력이 소모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한 사람이 “길바닥과 바퀴를 서로 바꾸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단한 쇠 바퀴도 마차의 무게를 견디기 힘든데, 가벼운 고무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는다면 곧바로 찢어져서 못쓰게 될 것이라면서 어리석은 생각이라면서 비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연구하다가 고무 속에 바람을 넣은 바퀴를 개발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바퀴의 모습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는 바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원래 처음부터 이런 바퀴를 사용했던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가능이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된 것이지요. 우리들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포기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지만 새롭게 가능한 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날은 우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고 하시지요. 언제일지 모르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 잘 준비하고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 없다는 고정관념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 그 날이 이루어질 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독수리들이 모여든 곳에 시체가 있는 것처럼 분명한 표지가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분명한 표지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맞이한 적이 없다면서 아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사람만이 살아남았고, 소돔을 떠나고 또 뒤를 돌아보지 않은 사람만이 살아남았던 것처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은 불가능한 날이 아니라, 곧 이루어질 가능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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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에는 두 개의 F가 필요합니다. ‘Forget(잊어버려라)’과 ‘Forgive(용서하라)’입니다(채규철).
20161111_01.jpg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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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세상의 왕이다(최천호) 어떤 한 남자의 이력서. 나이는 31세, 경력은 트럭 운전수, 학력은 대학교 중퇴, 학창 시절 왕따. 사람들은 그를 '찌질이 인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력서에는 적혀있지 않은 그의 또 다른 모습... 영화광, 놀라운 상상력, 풍부한 예술적 감각. 이력서에는 적을 수 없는 그의 잠재력, 그런 그가 가지고 있던 꿈, 영화 감독.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던 그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작은 영화 제작소에 취직한다. 일을 하며 그가 틈틈이 완성한 시나리오가 팔린 가격, 단돈 1달러, 그리고 그가 요구한 단 하나의 조건... "내가 이 영화의 감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그렇게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 '터미네이터 감독이 도대체 누구야?' 그에게 주목하기 시작한 사람들, 그리고 이 찌질이가 계속해서 만들어 낸 작품들... 에일리언(Alien), 타이타닉(Titanic), 아바타(Avatar)... 그가 바로 지구 최고의 감독 칭호를 받은 제임스 카메론. 과거 그는 서른이 넘도록 변변한 일자리 하나 갖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이력서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가능성을 단순히 지금 내 이력에서 적을 수 있는 것들로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당신의 이력서가 지금 비어있다고 해서 당신의 미래까지 비어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찌질이라 불렀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훗날 오스카 상 수상대에서 이렇게 외쳤다. "I'm the king of the world" 그렇습니다. 지금 내 이력서의 칸이 비어있다고 해서 나의 미래까지 비어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같은 말을 훗날 자신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세상의 왕이다.” 오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행복한 날을 만들어야겠습니다.
20161111_02.jpg 제임스 카메론 감독.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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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저 멀리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 루카 17,26-37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루카 17,30) 저 멀리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의 예를 들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니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노아와 롯 때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짓고 하며 자기 일에만 몰두하다가 멸망하였지요(17,26-31).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심판의 날은 아무도 미리 알 수 없으나, 눈앞의 것에만 매여 제멋대로 살던 이들은 그날에 심판을 받고 정의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과학기술과 자동화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일자리를 잃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면서 생존의 몸부림 속에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노아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아내처럼 먹고 마시고 즐기며 눈앞의 생존에만 목숨을 거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멋진 인생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며 사는 삶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듯 멋지게 살려면 이 세상의 움직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아 하느님의 뜻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목숨 구하겠다고 세상일에 애착하고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지요. 우리 모두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듯 멋지게 살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지혜를 구했으면 합니다. 애착과 집착과 아집에 사로잡혀 분열된 자아를 버리고,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내 한목숨 살리자고 발버둥치면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어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나만의 생존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오늘이 마지막이듯 과감한 버림과 세상을 거스르는 결단과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 애쓰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며, 지금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라(17,34) 하십니다. 지금 여기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좇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시체가 독수리의 먹이가 되듯 심판과 멸망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17,37).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각자의 처지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관계 중심, 타자 중심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만나는 사람을 선물로 여겨 소중히 대하고, 만나는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얼을 깨닫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눈앞의' 생존이 아니라 '저 멀리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오늘이 마지막이듯 자신을 버리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멋지게 살아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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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11일 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2요한 4,7) 속말로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요? 거짓 투성이요 가짜가 판치는 세상을 빗대어 "세상은 요지경"이라 하지요. 미국의 대선을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국정농단 사건을 봐도 정말 요지경이지요? 이런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허탈감에 분노하며 욕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그런다고 속이 시원해지지도 않으니 온 국민과 대한민국이 멘붕이군요. 요한서의 저자도 거짓이 판치는 세상을 접하며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허망해 하거나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더 몰두하라고... 그렇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서로 더 사랑하며 살아야겠지요. 그분의 가르침은 바로 사랑 안에서 꿋꿋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난국에 여느 때보다 더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서로를 격려합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까요.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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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투르의 성 마르띠노 주교 기념일 2016년 다해 11월11일 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 17,26-37 ‘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던 사람들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우호적으로 기사를 쓰던 언론들도 날카로운 펜으로 엄정수사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왕처럼 모시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人生無常’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생각합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비단 언론에 드러나는 모습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욕망이라는 전차에 올라타면 결국은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맙니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권력, 출세, 성공, 재물’ 이라는 동아줄은 결국은 썩은 줄이 되어서 높이 올라갈수록 더 큰 상처를 만들게 됩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산행을 하던 사람이 미끄러져서 겨우 나무줄기를 잡았습니다. 날은 추워지고, 밤은 깊어서 어두웠습니다. 나무줄기를 잡은 사람은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살려 주세요! 그러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살고 싶은가? 지금 잡고 있는 나무줄기를 놓아라! 순간 나무줄기를 꽉 잡았던 사람은 고민합니다. 겨우 잡고 있는 나무줄기를 놓으면 죽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아래는 안전한 풀밭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이미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과 공간은 정신과 영혼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질 수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체험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물리적인 시간, 경제적인 시간, 정치적인 시간은 분명 시작과 마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시간, 의미의 시간, 희망의 시간은 또 다른 차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악의 뿌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악의 뿌리는 ‘교만, 인색, 음욕, 탐욕, 나태, 분노, 질투’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칠죄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의 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정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정화시켜 주실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생명의 은총으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일곱 가지 도움의 은사를 주시는데, 이를 성령칠은(聖靈七恩) 이라고 합니다. 성령칠은에는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워함 등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은사를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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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11일 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 17,26-37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 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온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십시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최 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F. 쇼팽//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E flat 장조 Op. 22 - 잉골프 분더(p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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