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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20일 주일 [(백) 그리스도 왕 대축일 (성서 주간)]
[수도회] 내 삶의 중심과 기준인 예수그리스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사무 5,1-3
○ 제2독서 콜로 1,12-20
† 복음 루카 23,35ㄴ-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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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 영도자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보여 주듯이, 그분의 왕권은 십자가 주위에서 펼쳐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 때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는 명패를 주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팻말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예수님의 왕직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즉위식에는 늘 두 명의 증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루카 9,28-36), 예수님의 부활
사화에서는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루카 24,4). 그러나 골고타의 즉위식에는 단지 천박한 강도 둘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시시한 즉위식에 오르실 왕은 끝까지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초라한 즉위식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적들과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푸는 직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권을 통해, 뉘우치는 강도를 아버지의 나라로 받아들이시고,
뉘우치지 않는 완강한 적들도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시며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봉사의 직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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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2016년 다해 11월20일 주일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성서 주간)
제1독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5,1-3
제2독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12-20
복음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35ㄴ-43
각 교구에서 ‘우리농’을 담당하는 신부님들 모임이 성지에 있어서 여러
신부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새벽 일찍 일어나
새벽묵상글을 오랫동안 쓰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는 식으로 묻는 것입니다. 자신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16년째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기도와
묵상을 한 뒤에 글을 쓰고 있는 저를 이해하기 힘들다고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 역시 도저히 따라 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늦은
시간에 잠을 자는 것입니다. 제가 새벽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일찍 잠을 자는 것이거든요. 초저녁에 잠을 자는 저로써는 늦게까지
깨어있는 분을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저 역시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분이 대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누가 더 대단하고 덜 대단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싶습니다. 솔직히 살아가면서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갈등이 생기고, 때로는
미움과 단죄가 행해지기도 합니다. 결국 이 모든 갈등들이 별 것 아닌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약간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다름을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판단과
단죄가 이어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도토리 키 재기’처럼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기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이신 예수님을 왜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자신들과 다른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실천이 먼저라면서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당시의 지도층을 인정하지 않고 ‘위선자’라며 날카로운 일침을
계속해서 던지는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과 다른 예수님을 그들은 틀렸다라고 규정을 했고, 그 결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던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예수님을 향해 모독하며 말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지만 다른 죄수는 마지막 그 순간에 예수님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와 다르다는 것을 틀렸다고 규정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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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변하게 하는 것은 지혜와 경험이 아니다. 시간도 아니다.
오직 사랑이다(파울로 코엘료).
어제 뇌물받았습니다. '뇌물'이라는 '김'을 말이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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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월터스
바버라 월터스(Barbara Walters, 1929 ~ )라는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의 여왕’이라는 별명까지 가질
정도로 뉴스 진행에 탁월했었지요. 그래서 당시에 남자들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뉴스 진행에서 성공한 최초의 여성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방송 분야에서는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그녀였지만 결혼
생활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합니다. 세 차례나 이혼을
했거든요.
그녀는 결혼 생활 역시 성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재혼을 위해 남편 대상을 신중히 물색하면서 컴퓨터에 자기 적성을
비롯한 모든 자료를 넣고서 남편 후보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가장 좋은 남편 후보감을 보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글쎄 그 후보는 바로 전 남편이었던 것이지요.
가장 좋은 남편과 살았으면서 가장 나쁜 남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이혼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과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아니까요?
이 강력한 문구에 웃습니다. 조심할 것 같지만,
사실은 던져도 부서지지 않는 기타줄이거든요.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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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내 삶의 중심과 기준인 예수그리스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20일 다해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루카 23,35ㄴ-43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내 삶의 중심과 기준인 예수그리스도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당시 증가하고 있는 무신론과 세속화에
맞서서, 인간과 제도 위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진작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1970년 이 축일은 그리스도
왕직의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특성을 띠도록 변경되었습니다. 이
축일에 내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여
재판에 붙이고 십자가에 매단 첫 부류는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
왜곡된 감정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합니다. 나아가 부정적인 일면을
과장하고 거기에 머물며 고정된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자신을 왕으로
착각하며 사는 이들이지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받고 계신 예수님께 ‘유다인의 왕’이란 명패를
달아놓고 비웃는 병사들과 유다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이들의
결정이나 판단, 사고방식을 맹목적으로 따라갑니다. 이들은 감정에
이끌려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며 변덕을 부립니다. 그들에게 타인의
고통은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예수님처럼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왼쪽의
사형수를 봅시다. 그는 큰 죄를 지은 자신의 처지에는 아랑곳 않고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죄의식이 없어 자신의 죄나 약점이나 부족함을
결코 보려고 하지 않고, 남의 결점이나 잘못을 찾는데 민첩하고 자신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사고방식이나 말도 부정적이며
냉소적입니다.
한편 예수님 오른쪽의 사형수는 예수님과 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 하고 간청합니다. 그는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고통을
헤아립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한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모습은 모두를 감싸주고
받아들이고 새롭게 해주시는 창조주, 우주의 왕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묵시 15,5)
우리 모두 이 연중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영혼의 거울인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깊이 바라보아야겠습니다. 나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들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이며
가장 먼저 갈망하고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해보아야겠습니다.
참행복을 바라거든 하느님의 모상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고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신(콜로 1,15.18)
예수그리스도를 삶의 궁극적인 가치요 중심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주인인양 착각하여 제멋대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부화뇌동하지 말아야겠지요.
나아가 각자의 삶은 물론 가정과 사회, 교회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그리스도 왕국이 드러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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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20일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루카 23,38)
여러분 가문은 어떤 가문인가요?
조상들 중 유명인사가 있나요? 임금이나 대통령은요?
김씨? 김정은, 김대중, 김영삼, 김수로왕
이씨? 이순신, 이명박, 이성계, 이승만
박씨 성 가지신 분? 박근혜, 박정희, 박혁거세
최씨? 최순실, 최규하
오씨? 오바마, 오드리햅번,
하씨? 하느님? ㅎㅎ
우리 모두는 왕족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들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왕이시니까요.
사실 예수님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성경은 왕족인 다윗 가문 출신이라고 애써 우기고 있지만
우리가 김해 김씨라고, 전주 이씨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십자고상을 바라 보십시오.
가장 윗부분에 INRI라 쓰여진 명패가 붙어 있지요.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이렇게 유대인들로부터
“니가 왕이라고? 웃기고 있네.” 하며 조롱을 받았었지요.
하지만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었고
또 한해를 살아보고나서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당신만이 진정 나의 임금님, 나의 대통령입니다.
트럼프도 아니고 박근혜도 아니고 김정은이는 더더욱 아니더군요.”
오,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만왕의 왕이시여!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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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루카 23,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1월20일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루카 23, 42)
드디어 그리스도와 마주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조용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내려온 우리의 마지막 발걸음또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첫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리스도 왕께서 이끌어주신 한 해의 삶을 통해
저가 배운 것이 있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엄숙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처럼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우리들의 몫인지를 다시 깨닫게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존재이유를 다시 배웁니다.
서로를 짓밟고 짓이기는 욕망이 우리의 존재이유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사랑이 우리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우도처럼 이제는 변명을 멈추고
그리스도 왕께 의탁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그리스도 왕께서는 사랑하는 법을 다시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이 되시어 사람을 섬기셨던
그리스도의 섬김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의 모든 길이 되어주셨던 그리스도 왕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정말로 애 쓰셨습니다.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그리스도 왕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다시금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한 해의
뜻깊은 마무리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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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6년 다해 11월20일 주일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성서 주간)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루카 23,35ㄴ-43
작년 11월 이즈음에 미국에서 한 청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한국에서
사제가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고, 예비
신학생 모임에도 잘 나왔습니다. 신앙심이 깊고, 겸손한 친구입니다.
영어, 불어, 이태리어에 능숙하고, 한국어도 막힘없이 하는 것을 보면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친구입니다. 외국인 전형으로 신학교에
합격을 했습니다. 2017년부터는 신학생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제가 책임을 지고 있는 기숙사에서 지냈지만 이제는 본당을
정해 주어야 합니다.
본당을 정해 주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습니다. 한국에는
연고가 없기 때문에 방학 중에는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본당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동창 신부님이 받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저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 동창 신부님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사실 몇 군데
알아보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외국인인 조나단에게 새로운 본당 공동체는 어쩌면 낙원과 같은 곳일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따뜻한 사랑으로 돌봐 주실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새로운 신학생, 그것도 외국에서 온 신학생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실 것입니다. 조나단은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성당으로
와서 기도했습니다. 코를 심하게 고는 친구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코를 고는
친구와 자면 힘들 것 같았다고 하면서 조나단은 코를 고는 친구와 같은
방을 사용했습니다. 지난여름에는 신학생들을 위해서 한 달 동안
영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조나단을 보면서 중용 23장을 생각하였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뀐다. 온 정성을 다 하여 하나씩
배워간다면 세상은 바뀐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봅니다. 권위는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힘은
있으셨지만 그 힘을 남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셨지만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면서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세리와 창녀들과도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유해주시고,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의 힘은 사랑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은 비록 돈과
조직, 엄청난 배경은 없으셨지만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세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승리하셨고, 그분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명의 죄수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한명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구세주라면 당신도 살리고, 나도 살려보라고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명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과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외로이 떠있는 작은 배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지내면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도 천상의 향기를 갖게 됩니다. 고통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배도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Jag har hort om en stad ovan malnen
Aage Kvalbein / Iver Kleive 나는 구름 위의 도시를 들었네.
아게크 발바인 / 이베르 크라이베(노르웨이)의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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