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2일 유비 무환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1-22 07:24:46    조회 : 479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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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1월22일 화요일 [(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수도회] 생의 밑바닥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14,14-19 † 복음 루카 2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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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성전을 보고 감탄하는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성전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징이고, 우리 구원의 상징이지만, 외관만을 갖추고 내면이 비어 있다면, 그 성전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운명은 결국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전쟁과 기근과 자연재해가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붕괴되고 전통과 관습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종말은 늘 우리에게 먼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에 늘 새로운 세상의 방향을 알려 주는 예언자들과 시대의 징표들이 있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롭게 알게 된 종말은 새로운 출발이며, 동시에 멸망이 아닌 완성입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희망이 되며, 그리스도인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직접 살아가게 만듭니다. 세상 안에 있는 많은 존재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껍질로만 살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기다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가 참나를 찾고, 진정한 자아를 충만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완성인 종말도, 그리스도인의 목표인 하느님의 나라도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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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 2016년 다해 11월22일 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4,14-19 복음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5-11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웃음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 글쎄 어린아이는 하루에 평균 400~500회를 웃는데 반해 어른이 되면 그 웃음이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하루에 15~20회로 급격하게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웃음이 감소하게 될까요? 웃으면 실없는 사람처럼 보여서일까요? 가장 큰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커지면서 웃음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대해 저도 크게 공감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하다보면 그런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미사는 참 재미있습니다. 별 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아이들은 정말로 신나게 웃고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물론 아이들의 시끄러움이 도를 넘어설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 미사를 하게 되면 반응이 참 뜨겁습니다. 하지만 중고등부 미사로 넘어가면 너무나 힘듭니다. 잘 웃지도 않고 도대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걱정이 많아지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성인의 경우는 어떨까요? 성인들도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면서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많이 웃으시고 미사 중에도 적극적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어떤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절대 웃지 않으십니다. 미사 중에도 그냥 가만히만 계십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커지는 사람일수록 분명히 웃음이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그 불안과 염려를 없애면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어떤 책에서 우리 인간이 하고 있는 걱정의 96%가 일어나지 않을 일, 바꿀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즉,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걱정이란 단지 4%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 96%를 집어 던지고 웃음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성전의 파괴가 언제 일어날 지를,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질 때의 표징을 묻습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더군다나 이제까지 놀라운 기적과 힘 있는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인지라, 그분의 말씀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어서 언제 일어나고 또 어떤 표징이 벌어질 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에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어떤 소문에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분명히 올 일이고 반드시 거처야 할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걱정으로 지금 내 자신이 할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하다면, 마지막 날이 와도 기쁘게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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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다.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월 로저스).
20161122_01.jpg 인천교구 성서주간 말씀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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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쓸데없는 걱정(노먼 빈센트 필)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걱정 중에서...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으로 22%.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이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불필요한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배우이자 칼럼리스트인 윌 로저스의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다.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20161122_02.jpg 1300명 정도 모인 말씀의 잔치에서 영광스럽게 제가 특강을 했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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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생의 밑바닥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22일 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 루카 21,5-11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6) 생의 밑바닥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기원전 19년 헤로데 대왕에 의해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의 증개축은 서기 46년에 완공됩니다. 이 성전은 서원 이행의 표시로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성전에 바쳐진 ‘예물’(2마카2,13)과 “아름다운 돌” (21,5)로 건축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경탄하자(21,5),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하시며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전 건물의 파괴뿐 아니라 유다인의 희생제사가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70년 8월 29일 로마군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고 일부 벽만 남긴 채 불타버렸습니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69-79년)는 남은 벽마저 허물어버립니다. 또한 포위 공격에 의해 110만 명이 죽었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은 완전 폐허가 되었습니다(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신앙의 본거지이자 존재의 구심점이었기에 그 파멸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인 80년경에 복음서를 집필하였기에 이 충격적인 사건은 종말의 전조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으로 봅니다(21,20-24). 우리는 주님의 성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 또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주님의 거룩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파괴는 역사의 비극이요 인간과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단절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성전이 파괴되듯 우리의 영혼도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사회도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자초하는 이런 파멸 상황에서도 다시 주님께 얼굴을 돌리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제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실 것이니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당신의 거처로 삼아주십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 그 어느 구석에도 사랑과 정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더라도 함께 해주시는 주님께 믿음을 두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위협과 멸망을 본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도 사실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요, 죄에 넘어지고 시련을 겪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는 순간마다 거기에는 주님의 생명과 의미가 담겨있음을 보도록 힘써야겠지요. 행복을 바라거든 살아가며 다가오고 겪게 되는 모든 것을 희망 가운데 받아들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세상에 불의와 불평등과 부조리와 부패가 넘친다 하여도, 불안과 혼란에 빠뜨리는 자연 현상이나 전쟁과 기근, 생각을 뒤흔드는 거짓 사상에 휘말려 비극을 자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거짓과 부패로 얼룩진 뻔뻔스런 최고 권력자를 포함한 정치가들과 탐욕스런 자본가들의 모든 것을 다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지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물질을 따라가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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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22일 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6) 옛날 바벨탑부터 시작해서 인간은 늘 하늘 높은 데까지 다다르고 싶은 욕망을 건축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능력자가 된다해도 하느님을 대적할 수야 없겠지요. 아무리 높고 웅장한 랜드마크도 어이 없게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와우 아파트 붕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를 보았고, 미국에서는 911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의 대지진과 쓰나미도 보았고 최근에 경주에서 발생한 중급 지진에 가슴을 쓰러내리기도 했답니다. 해운대의 고층빌딩 집값이 폭락할 조짐까지 보일 정도로 자연의 힘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봅니다. 그 막강한 권력도 비선 실세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요즘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견고한 바위도 똑똑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에 구멍이 뚤리고 아무리 높은 빌딩도 지진 한방에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잘 나간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권력이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돈 좀 있다고 갑질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좀 안다고 떠들어서도 안됩니다. 그저 매사에 신중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무너질 때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시국에 너무 감정적으로만 흔들리지 말고 신중하게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나 또한 작은 일을 무시하다가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음을 배우며 겸손하게 묵묵히 살아갑시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런 일들을 많이 보게 될 겁니다. 높이 쌓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기초를 더 넓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함을 몸으로 배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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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다 허물어 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6)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1월22알 화.성녀 체실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다 허물어 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6) 낡아가고 허물어 지는 것은 엄연한 자연의 순리입니다. 허물어지는 거기에서 생명은 새로이 시작됩니다. 허물어지는 우리를 위해 서로 기도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아름다움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우리의 모습에 있습니다. 새로워지지 않는 내면은 더는 아름다워질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의 생명력은 새로워지는 회개에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배제한 아름다움은 또 다른 추함이 될 수 있습니다. 떠나야 할 우리존재를 아는 것에서 삶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달라져야 할 우리의 오늘입니다. 삶이라는 변화는 언제나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작은 것의 가치에 눈 뜰 때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품지 않고서는 새로움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삶이란 십자가처럼 허물어지는 희생을 동반합니다. 사랑이라는 성전은 허물어지고 또 허물어지는 정화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살다가 떠날 우리들입니다. 떠나야하기에 가야할 곳이 어딘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 허물어질 때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될 것이며 허물어지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녀 체실리아처럼 삶이 아름다운 우리들이기를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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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16년 다해 11월22일 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5-11 지난 한 달은 질풍노도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국민들은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견고할 것 같았던 청와대와 대통령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렸고, 국민들은 허탈과 분노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통령의 측근들은 조사를 받고 있고, 대통령과 수십 년을 함께 했던 사람은 국민적인 지탄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변명과 몰염치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리당략에 따라서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민족입니다. 넓고 깊게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눈앞의 일에 너무 들뜨거나, 흥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밀알 하나가 떨어져서 썩으면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저는 1991년 9월 10일에 청량리 바오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9월 5일에 중곡동 성당의 보좌 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5일 만에 입원하였습니다. 열을 재니, 40도였습니다. 바로 중환자실로 갔습니다. 20여 일 병실에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조금 일찍, 삶의 끝자락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저는 그때 이후로 저의 삶은 주님께서 주신 ‘덤’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별로 두려워할 것도 없고, 큰 욕심도 없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큰 가르침이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투병하던 동창신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완쾌되어 스스로 걸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병문안을 온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서 병실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병문안을 온 분들은 사진 밑에 위로와 격려, 쾌유를 바라는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제가 병문안을 갔을 때, 병실의 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사진과 쾌유를 바라는 글들이 있었습니다. 아직은 불편한 몸이지만 고백성사는 언제든지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동창신부, 그래서 성당은 언제든지 지킬 수 있다는 동창신부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행복은 희망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행운은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 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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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유비무환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22일 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5-11 유비무환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 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948년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미리 준비하면 근심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약속한 미래를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하는 만큼 지금에 충실합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평화의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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