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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23일 수요일 [(녹)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수도회] 희망 속에 인내하는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15,1-4
† 복음 루카 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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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먼저, 세상을
거꾸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성경과 복음서에 그 많은 예들이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예는 바로 박해와 순교입니다.
교회는 어떠한 순간에도 박해나 순교가 무서워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이를 하느님의 선물이요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디서든지 하느님을 증언할 좋은
기회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기에,
때로는 오해를 받거나 비방이나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적인 보호를 기대하거나,
손해를 막아 주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의 모든 고통을
결국은 주님께서 하늘 나라에서 보상해 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이 평소에 생각하고 추구하던 가치가 어떤 것인지 드러나고, 그가
하느님의 사람인지 세상의 사람인지가 드러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박해의 순간에도 세상의 헛된 인연이나, 재물이나 무기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한 말씀이 우리를 지키는 무한한 힘의
원동력입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방패요, 인내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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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배려하고 사랑하는데 최선을
2016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제1독서
<그들은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5,1-4
복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19
언젠가 전철을 이용했을 때의 일 하나가 떠올려집니다.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서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이었지요. 전철 안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고, 저 역시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주 큰
목소리가 들립니다. 조용한 전철 안에서 울려 퍼지는 주위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 소리에 사람들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목소리의
주인공인 중년으로 보이는 자매님을 쳐다 볼 뿐이었습니다. 이분께서
휴대전화에 대고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떻게 그 친구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니?”
‘당신이나 전철 안의 사람들을 배려 좀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배려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은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배려하지 못함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어르신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좀 조용히 갑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님께서는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큰
소리로 통화를 하셨습니다. 어르신은 다시 힘주어서 “조용히 좀
갑시다.”라고 크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러자 이 자매님께서 하시는 말씀.
“제가 언제 시끄럽게 말했다고 그래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라는 속담이 생각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하고, 남의 문제점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러한 모습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
자신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면서
화를 낼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내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준이 되어 사랑으로 나의 이웃을 배려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세상은 훨씬 더 함께 살아가기에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들을 늘 배려해주십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면서 배려하시고, 또한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배려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박해의 위협을 당해도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대신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인내’이지요.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준을 따라서 인내해야 할 것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배려하지 않고 내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손해 보는 것이 싫다면서 사랑하는 것을 멈춰버리는 것 등이 인내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배려하고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이러한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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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일과 삶을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배려가 시작된다.
세상은 배려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발전해왔다(이어령).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신 갑곶성지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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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은 것(최천호)
좋은 음악이란 내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이다. 때론 신이 나고 때론
눈물 나게 순간 그 기분에 따라 다가오는 것이다.
좋은 글이란 온갖 언어 동원하여 포장한 글이 아니라 읽는 순간 가슴
떨리게 공감되는 글이다.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란 나와 잘 맞는 사람이다. 생각도 대화도 마음도 잘 맞는
사람이다. 그걸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지 않는가?
좋은 집이란 대궐 같은 집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이 넘치고 피곤한 몸과
맘 편히 쉬게 편안한 공간이다.
이렇듯 좋은 것이란 내 상황과 기분과 마음에 따라 때론 크게
다가오거나 시시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글을 보면서 예전에 어떤 신부님과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제게 어떤 노래를 들려주면서 “너무 좋지 않니?”
라고 묻습니다. 문제는 저에게 그 노래가 별로라는 것이지요.
시끄럽기만 하고, 도대체 가사 내용도 귀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좋은 노래일까요? 나쁜 노래일까요?
그런 기준 자체가 의미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남의 기분과 상황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성당에서 본 독특한 성모상.-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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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희망 속에 인내하는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12-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희망 속에 인내하는 사랑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박해와 고통을 받게 될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유다인과
이방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총독들에게 끌려 갈 것입니다(21,12). 나아가 미움을 받고 목숨을 잃는
일도 겪을 것입니다(21,16-17).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힘든 길이지요. 제자의 길은 자신을
버리고 가야하는 길이요, 주님의 뜻을 따라 진리와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남보다 더 성공해야 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야
하니 늘 반대에 부딪치고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럼에도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니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8-19) 하고
권고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진리와 사랑과 선에서 멀어져 살아가는
이들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을 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인내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 온갖
어려움과 극도의 슬픔, 병,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일으켜세우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박해와 고통, 온갖 시련과 죽음마저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며, 주님을 증언할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신
분께서 어떤 순간에도 영원히 함께해주신다는 믿음을 지닐 때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인내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지요.
우리는 고통 없는 삶이 없고 더구나 신앙의 진리,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움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가야하는 까닭은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 곧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는 길은 그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임과 동시에 사랑의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매순간 사랑으로 견뎌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인내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내는 하느님을 위하여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는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다른 이들을 위해
함께 버텨주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 사랑으로 참아낼 때 인내의 저
끝자락에 사랑을 만나게 됨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피상적이고 감각적이며 감성적인 것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가는 오늘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견딤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의 견딤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모아야겠지요.
끝까지 견딤으로써 주님의 영 안에 머물고(성 프란치스코 수도규칙
10,9), 구원을 얻는(마태 10,22)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시련에 스며있는 생명과 희망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영의 눈을 뜰
수 있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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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여러분은 인내심이 아주 많나요?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고 하지요?
누구나 임계점이 있겠지만 그 지점이 어디냐 하는 것이지요.
임계점이 낮을수록
그 물건은 쉽게 부서지거나 부실하게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오래 견디는 것일수록 단단하고 내구성이 강한 것이지요?
이처럼 인내심은 때론 미련스러워 보여도
더 큰 힘과 생명력을 지닙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나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살다보면 “주님 더는 못참겠습니다.” 하고싶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바로 임계점입니다.
그 순간을 지나고나면 다른 세상이 열립니다.
99일을 견디고서도 하루를 더 못참아서 사람이 못된
호랑이가 될 것인가, 그 임계점에서 하루를 더 견디어
사람이 된 곰이 될 것인가?
단군신화의 이 설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느냐
아니면 지옥을 맛보느냐와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성질 급한 호랑이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좀 미련스러운 곰이 되시겠습니까?
오늘은 곰 한마리 키워보심이 어떨지요? ㅎㅎ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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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2016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12-19
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시면 다들 지우고 싶은 기억들 한 두 가지 씩
있으시겠죠? 특히 그때 어떻게든 참았어야 했는데, 그 한 순간을 참지
못해 오랫동안 쌓아왔던 점수 다 깎아먹은 기억 말입니다.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그 순간을 넘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못 참아서 나도 그도
큰 상처를 입고, 두고두고 부끄럽고 면목 없는 흑역사(黑歷史)는 수시로
떠올라서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저도 잊어먹고 잘 지내다가도 불현 듯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자다가도 크게 한숨을 푹푹 쉽니다. 괜히 죄 없는 이불을 있는
힘을 다해서 발로 찹니다. 그리고 혼잣말로 외칩니다. “그때 내가 대체
왜 그랬지? 정말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그런데 다행인 것은 우리보다 앞서 살아가신 위대한 대성인들도 이런
면에서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와 똑같이 어처구니없는 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역대급 과오를 범했습니다.
급하고 과격한 성격 자제하지 못해 일을 저지르고서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반성하며 마침내 인내의 최고봉에 올라간 분들이
성인(聖人)들이었습니다.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타고난 결함과
결핍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마침내 자신을 극복하고 벗어나는데
성공한 성인들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권고합니다.
“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조만간 골고타 언덕에서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극한의 인내를 앞둔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복음 21장 19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이 세상 안에서 뭔가 대단한 것들을
꿈꾸지만 현실을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모두
공감하듯이 우리네 인생사 안에서 순풍에 돛단듯한 나날을 불과 며칠도
안 됩니다. 하루하루가 좋아 죽을 것 같은 호시절은 찰나입니다. 내게
호의적인 주변 환경은 드믑니다. 내 마음에 딱 드는 사람들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의 기대치를 대폭 낮추는 것입니다. 자주
인생의 역풍을 만나더라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를 크게 낮추는 것입니다. 주변 상황과 타인이 나를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대신에 나를 그들과 맞추고
나를 보다 넓히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이런 모든 노력의 기초요 첫 출발점은 인내입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주실 구원은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내로써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만이
구원이 가능합니다. 죽어도 양보 못하고, 틈만 나면 내지르고, 여기서
폭발 저기서 폭발, 좌충우돌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은 요원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서부터 벌써 지옥이나 연옥 벌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에 대해 인내할 것인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누구에 대해 인내할 것인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끝도 없이
인내하신 하느님,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마치 바보처럼 인내하신
예수님의 인내 앞에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인내를 비추어 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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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12-19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와 ‘담쟁이’라는 시를 통해서
시련과 아픔을 이겨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꽃들이
저렇게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피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시련과 아픔이 있기 마련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설 수
없어서 담에라도 기대어 자라야 하는 담쟁이의 질긴 생명력을 통해서
우리들 또한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도 건강 때문에, 판단력이 부족해서, 게으름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많은 좌절과 실패가 있었습니다.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서 중환자실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지리산에서 조난을 당할
뻔했습니다. 끝까지 저를 믿어 주었던 학생들이 고마웠습니다.
성실하게 일을 하지 않아서 지휘관에게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저를 이끌어 주셨고, 여기까지 달려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걸림돌’이라는 말보다는 ‘디딤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다가오는 시련과 아픔을 걸림돌로 여기면 원망과 분노가
생기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련과 아픔이라도 그것을 디딤돌로 여기면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남자와 여자, 고용주와 노동자,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무가 살아 있다는 표시이기도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없고, 모든
것이 조용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죽은 사회일수도 있습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그런 다양함이 또한 아름다움입니다.
교구청 마당에 있으면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을 때는 파란 색의 잎으로 생명을 지녔습니다.
햇빛을 받아 나무를 자라게 하고, 나무는 땅 속 깊은 곳에서 양분을
끌어 올려 나뭇잎을 더욱 파랗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떨어진
낙엽은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나무로부터 양분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부는 바람에 흩어져 쓸쓸함을 보여 줄
뿐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무리에서 빠져나온 어린
들소는 배고픈 사자의 표적이 되곤 합니다. 무리와 함께 있을 때는
사자들도 쉽게 공격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리에서 떨어진 들소는
혼자의 힘이 강하다 할지라도 사자의 억센 이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소들은 함께 무리를 지어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문학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조직과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악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나약하고, 작은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니, 강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 분들을 만나면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자녀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부의 불화로 힘들고 어렵게 지내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문제들로 가슴아파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묵시문학은 이야기 합니다.
‘이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리라.’ 결국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밝은 빛을 보리라고 말을 합니다. 이정하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살아가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마치 우리 국민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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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하느님의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12-19
하느님의 사람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 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8장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도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성직자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 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2).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1,12). 이런저런 소리와 압력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SANCTUS_세인트필립스소년합창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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