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4일 나를 포위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1-24 06:18:03    조회 : 526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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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1월24일 목요일 [(홍)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수도회] 나를 포위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18,1-2.21-23; 19,1-3.9ㄱㄴ † 복음 루카 21,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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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연중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는 이때 복음은 우리에게 종말에 대해 묵상하게 합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맞이할까?’가 우리에게는 늘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적에게 쫓기고 포위되어 무서운 징벌의 날이 다가오는 것처럼, 또는 이 땅에 큰 재난이 일어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이는 것처럼 그날이 다가오지나 않을지 무시무시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에게 세상의 마지막 날은 당신이 우리 가운데 오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의 속량이 가까워진”, 그래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올 우리의 구원과 해방의 날인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날이고, 우리의 구원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주님을 얼굴을 맞대고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그분을 마치 친구처럼 찾았다면, 우리는 그분을 기쁨과 신뢰 속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분을, 또는 우리의 형제들을 모른 체하고, 간과하고, 두려워하고, 무시했다면, 마지막 날 주님과의 만남도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구원이냐 단죄냐, 파멸이냐 해방이냐, 행복이냐 절망이냐, 이 선택은 바로 오늘, 이 시기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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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우리는 삶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소홀히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2016년 다해 11월24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8,1-2.21-23; 19,1-3.9ㄱㄴ 복음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8 저는 인천의 주교좌 성당 근처에서 참 오랫동안 살았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살았었고, 고등학교는 이 근방의 학교였습니다. 또한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방학 때마다 교구 행사를 위해서 수시로 드나들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교구청에만 두 번 근무하면서 또 7년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인연을 맺고 살다보니 이곳 지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골목골목까지도 상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근방의 모든 거리가 너무나도 익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성지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구청 주변을 운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은 좁고 차가 많아서 당황스러웠다는 것이었지요. 이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곳을 숱하게 지나다녔지만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거든요. 왜 그럴까요? 이 거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보면서 다녔던 거리였기 때문에 복잡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실 알게 되면 별 것이 아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알려는 노력보다는 그냥 어렵다고 또 힘들다면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수영을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다른 운동과 달리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실력이 늘지 않는 것입니다. 팔과 다리를 아무리 힘차게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물 밑으로만 빠질 뿐이었지요. ‘수영은 나한테 맞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으로 그냥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르쳐주시는 강사님께서 딱 열흘만 열심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힘을 얻어서 계속 수영장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열흘 뒤부터는 수영실력이 느는 제 자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새로운 앎으로 풍요해질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의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이라고 한정을 짓지 말고 현재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전쟁의 폭력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있습니까? 더군다나 자연의 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표징은 우리 삶 안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표징을 통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줍니다.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주님을 맞이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더 열심히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또 실천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계속 나타나는 표징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소홀히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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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생이 곧 인생의 진정한 모습이다. 우리의 마지막 기쁨과 위안은 고생한 추억에 다름이 아니다(알프레도 드뮈세).
20161124_01.jpg 모르면 허탕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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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다는 것 동사 알다(知)는 명사 알(卵)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서 어떻게 알아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즉, ‘아는 행위’는 사물과 현상의 외피뿐만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내부까지 진득하게 헤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저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한된 정보로 어떻게 진면목을 알 수 있을까요? 이는 주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도대체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선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냥 남들 하는 것 따라하면서 흉내 내기 식의 앎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주님을 알도록 노력합시다. 그냥 겉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알도록 말이지요.
20161124_02.jpg 허수아비 부부입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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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나를 포위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24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 나를 포위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의 파괴는 구원과 멸망이 갈리는 전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21,20-21) 서기 70년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무려 110만 명이 죽었으며 9만 7천명이 로마군 총사령관 티투스의 포로가 되어 여러 지방에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혀 굶어 죽어가고 슬프게 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21,24). 성전 파괴는 서기 66-70년 사이에 일어난 로마와의 독립 전쟁에서 인간의 힘에만 의존함으로써 유다인들 스스로 부른 참혹한 결말이었습니다. 그들의 파멸은 외부 적에 의한 포위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교만의 두꺼운 껍데기로 자신들을 철저히 포장해버린 결과였던 것이지요. 우리네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닮아야 하고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심장에 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선한 지향과 말씀의 진리에 따른 행동, 자신을 벗어난 이타적인 몸짓, 온화한 미소, 애정 어린 배려, 관대한 헤아림으로 채워져야겠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콜로 3,2) 오늘 우리를 파멸의 늪으로 내몰려는 구조적인 악과 불의, 물신주의와 쾌락주의의 거센 힘이 끊임없이 도전해옵니다. 잠깐만 한눈팔아도 금세 젖어들어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질 것 같은 현상들이 넘칩니다. 그럼에도 외모와 겉치레, 눈에 보이는 가치들에 포위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지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종말의 조짐과 같은 내 마음의 허울들을 과감히 벗어버려야겠습니다.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내리는 조급한 판단, 성령의 이끄심과 무관한 습관과 창조성을 잃어버린 고정관념, 좁디좁은 경험의 틀에 박혀 되풀이 하는 비합리적 사고, 지극히 인간적인 인연들을 하느님의 뜻보다 더 중요시하는 태도 등을 버려야겠지요. 강력한 육의 경향과 하느님을 거스르는 물질과 세상 권력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루카 21,28)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며” (21,9),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21,28) 지금이 바로 성전을 파괴하기 위해 둘러싼 적군과 같은 거짓과 교만의 탈을 벗어버려야 할 때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육과 영, 선과 악,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주님께 등을 돌리라는 유혹과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의지하며 파멸이 아닌 창조의 길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악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과 말씀에 대한 망각의 잠도 깨워야겠지요. 오늘도 잠에서 깨어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차려, 탐욕과 교만과 무관심으로 가득찬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파멸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갔으면 합니다(21,21 참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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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24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8) 연중시기의 끝이 다가오며 우리는 세상 종말의 징후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곳곳에서 엄청난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전쟁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고 상상치도 못한 혼란이 닥칩니다. 사실 요즈음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면 정말 세상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엄청난 자연재해와 대형 사건사고듣, 무서운 전염병들이 창궐하고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를 두렵게 만둡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위기상황이 모든 국민들을 걱정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저 걱정과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숙이고 절망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위기상황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니 걱정과 실망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새로운 희망에 대한 기쁨으로 허리를 펴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시네요. 신앙인은 늘 희망하는 사람이고 어떤 처지에서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걱정 마시고 오늘 허리를 곧게 펴시고 맑고 드높은 하늘을 한번 쳐다 보세요. 아~~~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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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족함이라는 감정의 감옥 2016년 다해 11월24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 독서: 요한 묵시록 18,1-2.21-23;19,1-3.9ㄱㄴ 션 스티븐슨이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뼈가 부서져 있는 극히 특이한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서 성인임에도 키가 90cm밖에 되지 않습니다. 의사들은 대부분 이 아이가 태어난 지 24시간 안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38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말하던 박사 (의사)들이 모두 죽었고 유일한 박사인 자신만이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강연을 시작할 때 이렇게 웃음을 줍니다. 그리고 절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두려고 한 말에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자신의 힘을 빼는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힘을 줄 수 있는 말에 귀 기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하게 보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불쌍하지 않다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사랑받기에 충분하다고. 그럼에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교도소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빈 남자들을 싫어한 한 예쁜 여자와 결혼하여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잃게 되었음에도 글을 써서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누구에게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여 지금 그 모습만으로도 사랑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마음을 다 하고 모든 힘을 다 해서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장애를 벗어던진 참다운 자유인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요한이 마지막 날 대바빌론이 멸망하는 환시를 보게 됩니다. 대바빌론은 당연히 이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실 때 당신이 대바빌론인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나 세상과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은 그렇게 자신과 대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운명은 그 대바빌론 치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그 바빌론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천사가 마치 맷돌을 바다에 던져 빠뜨리듯 이 세상도 영원한 어둠과 불속으로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도록 이 세상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따라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는 여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작게 본다면 이 바빌론은 바로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바빌론은 먹고 마시고 돈 벌고 즐기는데 사람들이 바쁘게 만들어 자신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가 무언가 부족하게 느끼게 만들어 그것을 채우는 일에 온 정신을 쏟게 만듭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무언가 부족하게 느끼게 해서 금지된 열매에까지 손을 뻗치게 만든 것입니다. 역시 손과 발이 없이 태어나 자살까지 생각했던 닉 부이치치도 그런 자기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왜 살아야하는지도 모르던 그가 그 자신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태생소경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태어나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들어내셨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태어난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장애가 더 이상 부족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고 감사롭게 여겨진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사람을 포옹할 수 있는 팔이 없지만 수없는 사람에게 따듯한 허그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자살하려고 한 순간 “너는 지금 모습 그대로 충분히 사랑스러워!”라고 해 주었던 부모님의 말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해 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자살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해방시키는 방법은 사랑뿐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 자신이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 사랑받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모습 그대로 사랑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참 사랑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의 부족함이란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신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서 탈출하여 모든 상황에서 ‘감사’를 이끌어내셨듯이 이젠 우리가 다른 이들을 감옥에서 끌어내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 감옥 안에 갇혀 바다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바빌론에서 신음하는 모든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사랑을 이웃에게 쏟읍시다. 이것만이 자유이고 이것만이 행복이고 이것만이 이 세상 삶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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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16년 다해 11월24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 21,20-28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부르던 노래 중에는 양희은 씨의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멜로디가 감미롭고, 가사도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은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꽃 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할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풀잎 끝의 이슬방울,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새, 텅 빈 숲에 남은 나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풀잎의 이슬방울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곧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는 풀잎 끝의 이슬방울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 사람들, 이번 수능을 망친 학생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에 놀란 사람들은 어쩌면 텅 빈 숲속의 외로운 나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바람아, 비야 알고 있니,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겸손으로,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버지의 자비로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성, 감성, 오성을 지닌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불안과 긴장을 평화와 일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비록 멀고, 앞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지만 힘과 힘의 충돌만으로는 평화와 일치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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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너/저녁별의 노래 (WWV 70 (Act 3 ) Wolfram's Aria Wie Todesahnung. O du mein holder Abendste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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