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일 실행하는 곳에 열매가 맺어진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2-01 06:25:49    조회 : 49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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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2월1일 목요일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수도회] 사랑 실천으로 찾아가는 참 기쁨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26,1-8 † 복음 마태 7,2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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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를 촉구하십니다. 실행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다름없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실천하는 신앙인이야말로 반석 위에 집을 짓듯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덧붙이신 것입니다. 실천적인 믿음을 지니려면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만 합니다.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자기 자신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바라는 것만 많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신앙적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좌절해 버리곤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려면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을 자주 읽고 묵상도 많이 해야만 하지요. 그렇지만 적지 않은 경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기보다, 먼저 나의 요구 사항만 나열하곤 합니다. 굳건한 토대 위에서 믿음이 자라지 못한다면, 남이 나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는 것은 물론, 나 역시 사소한 일에도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틈나는 대로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이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내 안에서 힘이 나올 것이며, 그 힘으로 나의 믿음은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의 실천적인 믿음을 보고 주변 사람들도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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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 2016년 다해 12월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6,1-6 복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4-27 저는 책을 많이 구비합니다.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책을 구매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책에서 얻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괜히 샀다’ 싶은 책도 있습니다. 하지만 꼼꼼하게 읽다보면 분명히 제게 도움이 되는 구절들을 찾게 되면서 ‘세상에 어떤 책도 필요 없는 책은 없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특별한 취미 활동이 없는 제가 하고 있는 유일한 과소비라고 할 수 있지요. 책을 많이 사기는 했는지, 제가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에서 최고 우수 등급 회원으로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책을 사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 책을 사지 않았을까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일이 있으면 책을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대한 관심이 책에 대한 관심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한때 자전거에 관심이 많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다른 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사라집니다. 대신 자전거 장비를 구입하는데 관심을 갖게 되고, 책을 봐도 자전거에 관련된 책을 구입하게 됩니다. 어디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남들이 보면 과소비처럼 보이는 것도 과소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되지요. 자신이 먹고 입는 것에는 단 한 푼도 아까워하면서 내 가족을 위한 것에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것은 왜 일까요? 바로 내 모든 관심이 가족에 대한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주님께 대한 나의 사랑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주님께 모든 관심을 두고 있어서 주님과 연관된 것이라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희생과 봉사를 하십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사랑의 마음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주님, 주님!’만 외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자신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냥 무조건 도와달라는 의미로 주님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 전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하셨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버지의 뜻인 사랑의 실천에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시지요.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사람이기에 폭풍이 불고 극심한 격변이 닥치고 또한 유혹이 계속되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슬기로운 사람일까요?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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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하다. 그러나 귀로 남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로 남의 행복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 훌륭하다(유일한).
20161201_01.jpg 어제 특강을 했던 군포 용호성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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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의 양심(‘따뜻한 하루’ 중에서) 미국 제28대 대통령인 윌슨 대통령에게 한 비서관이 찾아왔습니다. 그 비서관은 대통령에게 잠시 업무를 접어두고 기분전환을 좀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상관이 허락하지 않으실 걸세." 비서관은 의아해하며 대통령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 상관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윌슨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네. 내 상관은 바로 나의 양심일세. 양심상 임무 수행에 매진할 수밖에 없기에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네.“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양심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어떠한 길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세요. 그러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각종 혼란과 아픔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각자 각자가 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래서 모두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61201_02.jpg 군포 용호성당의 성모상.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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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사랑 실천으로 찾아가는 참 기쁨의 나라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1일 목요일 대림 1주 목, 마태 7,21.24-27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마태 7,21) 사랑 실천으로 찾아가는 참 기쁨의 나라 대림 첫 날 밤 시청 앞 광장에서는 화려한 성탄 축제 무대가 열렸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도를 빠져나오는 순간 들려오는 캐럴 소리를 들으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 나라의 슬픈 현실이 펼쳐지는 마당에 듣는 캐럴이 왜 그다지도 쓰라린 아픔으로 다가오는지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진리를 진정 갈망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이 땅에, 내 안에 주님을 맞이하지도 않은 채 부르는 캐럴이나 성탄 장식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쁨은 밖에서,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쁨 자체이신 하느님으로 오는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실하게 행하는 자비와 정의의 실천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하느님의 뜻은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테살 4,3).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사랑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힘입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내어놓지 않고, 남을 존중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목숨 전부를 내놓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에 대해 이 정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실제로 살아내는 그만큼만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에게는 후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온갖 것을 다 쏟아 부으면서도 남에게 인색하고 냉정하며 무관심하다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상기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이사 26,5-6)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 모두 하느님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처신하는 교만을 버려야겠습니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시편 118)라고 고백하는 시편 작가처럼 내가 주인인양 착각하여 거들먹거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모든 좋은 것을 주시려 오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참 기쁨의 사람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고(1테살 5,18), 인내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2,15). 성탄의 참 기쁨은 영혼 없이 부르는 캐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과 관심사에서 눈길을 돌려 길거리에서 울려퍼지는 신음과 절규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자비와 선을 행하는 바로 거기서 샘솟을 것입니다. 몹시도 혼란스럽고 국민 모두가 자괴감을 느끼는 이즈음에 감정적인 분노나 비이성적인 비난, 언어 폭력 등을 멈추고, 뜨거운 사랑과 냉철한 이성으로 진실을 밝혀 사랑의 질서를 바로 세움으로써, 우리 모두가 주님의 참 기쁨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는 오늘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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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당신께만 신뢰를 두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평화 2016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 독서: 이사야서 26,1-6 당신께만 신뢰를 두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평화 인터넷 ‘송창민 연애컨설턴트’에 양다리 걸치게 된 사연들이 있어 두 개를 옮겨봅니다. ♥사례1. A양(27세)은 지금 양다리 연애를 하고 있다. 10여 년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져 30대에 들어선 언니 때문이다. 연애 경험도 별로 없고, 당연히 결혼하리라 생각했던 남친과 헤어진 언니는 화려한 싱글도, 골드미스도 아닌 그냥 ‘노처녀’, 그것도 남자 만날 기회도 별로 없는 노처녀가 되고 말았다. 언니는 말한다. “한 사람만 사귀지 말고 두루두루 많이 사귀어 봐. 그래야 내 꼴 안 된다.” A양은 언니의 경험을 거울삼아 아슬아슬 양다리 연애를 하고 있다. ♥사례2. B양(29세)은 7년간 사귀어 온 남친과 이별했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제 곧 서른인데 꽃다운 나이 다 보내고 이제 어쩔 거냐고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도 좀 사귀어 놓지.”라는 말까지 듣는다. 하지만 B양은 후회는 없다. 사랑할 만큼 사랑했고 행복할 만큼 행복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함께 만났다면 그만큼 사랑할 수 없었을 거로 생각한다. 연애할 때 양다리 걸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지금 사귀는 사람이 시간이 지난 뒤 더 이상 지금 느낌이 아닐 수 있다는 두려움, 그 사람이 떠날 수 있다는 두려움 등으로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누군가로부터 버려지는 경험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병적으로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여 많은 보험을 들게 되는데 결국 그러다가 ‘바람둥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가 떠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왜 오는 것일까요? 상대가 변하는 것 같아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변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기준대로 상대를 평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신뢰가 부족하니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도 다 그렇게 보여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즘 가장 핫 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손석희’ JTBC 아나운서 겸 보도국 사장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보도한 여러 뉴스들로 여러 번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까지 받고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무언가 믿는 것이 있어서 결코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나라의 곪아가는 어떤 곳을 터뜨렸습니다. 만약 세상 것에 신뢰를 두었다면 끝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변하지 않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외압에 흔들림 없이 객관성 있는 뉴스를 전달하다보면 박해도 받겠지만 결국 그런 삶이 언론인으로서의 가장 행복한 삶임을 믿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두려움으로 이것을 잃으면 그것을 대체해 줄 무언가를 보험으로 들어놓으라고 하지만, 결국 그렇게 미지근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오늘 독서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당신께만 신뢰를 두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두어야하는 대상은 변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밤하늘에 뜬 북극성이 위치를 바꾸지 않아 뱃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별이 되었듯이, 주님께서도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는 반석이십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주님은 반석이시고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이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저도 주님께서 불러주실 때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세상 것에 행복을 두어야 할 것인지, 주님께 온전히 신뢰할 것인지. 그렇지만 사제가 되어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이나 재물, 사람들의 애정 등에 신뢰를 두게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실 수도 있고 빼앗아 가실 수도 있는 분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저는 요즘 탈출기를 묵상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러 갈 때 치포라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모세의 결단을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혼인해서 살던 여자를 집으로 돌려보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을 생각합니다. 주님은 확실히 우리의 신뢰를 당신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두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결국 어떤 일을 했을 때 모든 공로가 당신께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도와주었던 그 사람들에게도 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당신께 의탁할 당신의 종을 필요로 하고 계시고 그렇게 살면 반드시 다른 어떤 선택보다 더 큰 평화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나의 평화와 기쁨을 위해 오직 주님만으로 충분하고 그분의 뜻을 따름만으로 충분함을 굳게 신뢰합시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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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대림 제1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12월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 7,21.24-27 경주에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건물에 금이 가고, 기와가 떨어지고, 피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소중한 유물이 보관되어있는 경주 박물관은 건물도 피해가 없었고, 유물들도 안전하게 보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박물관장의 혜안과 직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관장님은 울산 앞바다에 지진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앞으로 우리나라도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닐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3년 전에 박물관을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건물로 리모델링하였다고 합니다. 관장님의 판단은 이번 지진에 아무런 피해가 없을 만큼 지혜로웠습니다. 관장님은 직원들과 함께 전시된 유물들을 단단하게 묶어두었다고 합니다. 유물들을 낚싯줄로 견고하게 고정을 하였고, 모래주머니로 묶어 두었다고 합니다. 여진이 계속 되었지만 한 점의 유물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장님의 지혜로운 판단과 위험을 무릅쓰고 유물들의 고정 작업을 함께 하였던 직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산중에서 수도원을 세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묵상만을 하신 분도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직접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고, 사회적인 약자의 편에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죄인이라고 여겨졌던 ‘세리, 창녀, 과부, 절름발이, 소경, 나병환자, 중풍병자’들과 함께 하였고, 이방인들과도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이 나눔, 가난한 이와 더불어 사는 모습을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과부와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교육, 복지는 교회의 이런 나눔이 발전하여 병원, 학교, 사회복지시설로 성장한 것입니다. 내 가족, 내 이웃, 우리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잊어버리고 나의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생각도 예수님께서 원하신 방법이 아닙니다. ‘넷째왕의 전설’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출발한 사람은 3명이 아니라 원래는 4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번째 왕은 가난한 이, 장애인, 아픈 사람을 만났습니다. 선물로 준비한 보물을 길에서 만난 사람을 위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결국 넷째왕은 선물이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길에서 도와준 그 사람들이 바로 나였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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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실행하는 곳에 열매가 맺어진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2월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 7,21.24-27 실행 하는 곳에 열매가 맺어진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작심삼일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매사에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께 상의 드리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내 뜻을 관철하려고 주님께 강요합니다. 내 뜻이 이루어져야 가슴이 벅찬 것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일상의 삶이나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계명을 합리화 시키는 데 약삭빠르고 교만과 독선으로 남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가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로마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만 화려하고 행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행동으로써 말합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너 사람의 아들아,...백성이 떼지어 모여들 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그들은 네 말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않는다"(에제33,31-33). 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 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되고 얼마 안가서 무너지고 맙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2,26). 여러분이 실행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7,21).고 하셨으니 실행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깡통 빈 강통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속이 가득 찬 깡통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가 나는 강통은 속에 무엇이 조금 들어 있는 깡통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많이 아는 사람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무엇을 조금 아는 사람이 항상 시끄럽게 말을 한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거룩하시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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