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2일 소유의식과 뒤바뀐 주인 의식을 버리고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9-22 06:13:08    조회 : 500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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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9월22일 목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수도회] 소유의식과 뒤바뀐 주인 의식을 버리고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코헬렛 1,2-11 † 복음 루카 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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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헤로데는 탐욕스럽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에 젖어 살았기에,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인생무상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는 소문에 집착했습니다. 한때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참수시킨 헤로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영험이 예수라는 자에게서 나오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회개를 요구하였습니다. 불같은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는 거짓 예언자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이 두 인물은 하느님의 진리로 돌아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종종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법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이 비참하고 허무한 인생을 견디어 내면 하늘 나라의 영광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는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헤로데처럼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허무의 심연 속에 빠져들지 맙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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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016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제1독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 1,2-11 복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니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지요. 지금처럼 시간 나면 책 읽는 모습은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공부를 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그중에서도 종이를 접어서 놀았던 기억이 떠올려지네요. 종이를 가지고 참 많은 것을 만든 것 같습니다. 비행기, 배, 딱지……. 당시의 유행이었던 만화인 마징가도 있었고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학을 만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한 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이렇게 종이를 접으며 놀았던 것이 자그마치 40년 전의 일인데 어떻게 접었는지가 기억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았던 제가 기억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시에 정말로 재미있게 놀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당시를 떠올리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만큼 좋은 기억이라는 증거겠지요. 우리들 삶은 분명히 좋은 일과 나쁜 일의 연속입니다. 대체적으로 좋은 일은 좋은 기억으로, 그리고 나쁜 일은 나쁜 기억으로 각인되곤 합니다. 그런데 나쁜 일 역시 기억 속에서 바뀌어서 좋은 기억으로 떠올려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종종 하지 않습니까? ‘그때 정말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그렇다면 나쁜 기억은 어떤 것일까요?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을 때, 그래서 후회를 가져오는 말과 행동이 나쁜 기억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추억할 수 있는 과거의 시간을 좋은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의 행동으로 결정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억을 만들면서 사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는 나쁜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요. 바로 의로운 사람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신의 체면 때문에 베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나쁜 기억은 현재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에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짓고는 못산다는 옛 사람들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로 죄가 나쁜 기억을 만들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기억을 만들면서 살아야 할까요? 죄로 물든 나쁜 기억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행하면서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후회하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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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세네카).
20160922_01.jpg 이 새벽에 잠깐 동안 만들어 본 종이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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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말을 바꿀 것인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식당 앞에 걸인이 조그마한 피캣을 들고 누워있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도와주세요!” 그런데 지나가던 한 남자가 피켓의 내용을 새롭게 써 주었습니다. “배고파 본 적이 있으신가요?” 잠시 후... 많은 사람들이 걸인의 깡통에 돈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던 남자는 마케팅 전문가인 패트릭 랑보아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호주머니를 열지 않습니다. 공감해야만 기꺼이 엽니다. 프랑스 시인인 앙드레 브로통의 이야기도 유사하게 사람의 감정을 잡아끕니다. 그는 길가에 있는 걸인의 푯말을 봅니다. “저는 앞을 못보는 맹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지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이때 보르통이 이렇게 문구를 바꿔주자 많은 사람들이 호주머니를 열어 깡통을 채워줍니다. “봄이 왔지만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말로 상처와 아픔을 주는데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0160922_02.jpg 어제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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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소유의식과 뒤바뀐 주인 의식을 버리고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코헬렛 1,2-11; 루카 9,7-9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9) Herod's Opinion of Jesus 소유의식과 뒤바뀐 주인 의식을 버리고 하느님 안에서의 참 행복을 찾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어둠에도 불구하고 늘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나다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고 내가 따르는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에 대한 전인격을 건 인식과 삶의 고백이 있어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9,7-8).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몹시 당황스러워합니다. 헤로데는 스스로 의인으로 인정한 요한을 죽인 죄책감도 있었지만, 소문으로 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분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9,9). 그는 ‘질서와 안보의 이름으로’ 백성을 짓누르고 수탈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 나라의 의와 하느님의 자비를 삶으로 외치는 예수님의 존재는 큰 장벽으로 여겨졌음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한 것은 단순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세에 걸림돌로 부각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습니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헤로데처럼 살 수도 있고, 요한 세례자나 예수님처럼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고 자신의 권세를 통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야말로 왕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은 자신이었고 세상 권세와 힘에 의존했으며 양심마저 무뎌져 요한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코헬렛은 불의한 사회 구조를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저자는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1,3)라고 합니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태양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며 백성들의 처지를 만천하에 고발하면서 인생의 허무함과 인간사의 무상함, 세상만사의 덧없음을 전합니다. 이런 비판과 경고는 헤로데처럼 사는 가련한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무한 우리 인생에 의미가 되어주시고, 무상한 인간사에 영원성을 부여해주시며, 덧없는 인생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채워주시려고 수난을 겪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가치를 하느님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행동과 진리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며 좇는 어리석은 발걸음을 멈추어야겠습니다. 매순간 우리는 헤로데처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될지, 아니면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는 삶을 살 것인지 결단을 내리도록 요청받습니다. 오늘도 세상을 주인으로 섬기고 현세 재물과 권세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2,17)이요, 결국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킬 뿐임을 상기하며, 하느님으로 인하여 행복한 충만한 삶을 이어가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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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렛 1,2) 우리는 뭔가 더 잘 해보겠다고 또 더 잘 살아보겠다고 참 많이도 애써 보지만 뭐가 좀 되는 것 같아보여도 결국 허사임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수많은 회의와 모임, 피정과 세미나, 토론과 공부, 기도와 애덕실조차도 결국 '말짱도루묵'(?)이 되고맙니다. 좀더 것론적인 담론이라여 글로벌 경제와 국제정치와 군사적 균형 세계 평화와 남북통일 세월호 문제와 위안부 문제 어떻게 살 것이냐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도 결국 옛부터 따져왔던 힛소리일지도 모릅니다. 저의 이 말씀나눔도 이미 교부들 시대 때도 시도했었던 일이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누고 있는 사실 별 것 아니고 보잘 것 없는 신앙의 한 작은 몸짓일 뿐이고 그럴싸 해 보여도 결국 이것으로 하느님 체험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내 이 또한 허무한 일 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수많은 이념들과 사상들 또한 돌아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유행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하늘 아래 새로운 것 하나 없고 영원한 것 하나 없습니다. 영원하고 생명을 주는 것은 하느님 한분 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며 영원을 탐하는 우리가 어리석고 불쌍할 뿐입니다. 오, 하느님 어리석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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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 9) 소문의 실체를 알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우리의 올바른 마음자세입니다. 헤로데같은 우리의 욕망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부질없는 우리들의 힘의 논리속에서 많은 이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된 이웃사랑의 실천은 먼저 떠다니는 소문을 이웃들에게 옮기지 않는 절제입니다. 또한 자기만 옳다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된 나눔을 방해하는 우리의 거짓을 먼저 인정하고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참된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를 방해하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언제나 우리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우리의 잔인함을 먼저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야합니다. 자신의 분노로 시작된 험담과 미움이 끝내 소중한 시간을 서로 죽이는 악순환을 반복하게합니다. 이러한 작은 허용이 요한 세례자를 죽음에 이르게하는 원인이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소문이 아니라 참된 만남이기를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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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 9,7-9 경상도 쪽에서 지진이 발생하였고, 여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학과 능력으로 지진이 발생하는 것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의 시스템입니다.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최대한 빨리 복구할 수 있는 대책의 마련입니다. 놀란 가슴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재해는 늘 있어왔습니다. ‘태풍, 지진, 홍수, 가뭄, 폭염, 빙하기’가 있었습니다. 인류는 손을 내밀어 피해자들을 도왔고, 자연재해를 극복하면서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더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일 지진이 발생한다고 해도, 우리가 함께 하면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욕망, 재물,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쌓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원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념, 민족, 세대, 지역’이라는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있지만, 우리의 폭력과 전쟁 때문에 생겨난 난민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상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부와 권력은 지녔지만 ‘미덕’이 없었던 헤로데입니다. 그는 화려한 궁궐에 살았지만 인생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남을 위한 빵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많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편견을 깨끗하게 부셔버렸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골고타의 언덕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행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기심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세상은 단 10분을 살았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은 그 삶의 길이로 측정할 수 있겠지만, 인생은 그 삶의 가치로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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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자유를 누려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 9,7-9 자유를 누려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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