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7일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걷는 일상의 순례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9-27 06:22:47    조회 : 541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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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9월27일 화요일 [(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수도회]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걷는 일상의 순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욥 3,1-3.11-17.20-23 † 복음 루카 9,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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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왕림을 거부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한 번 지나가신 하느님께서 다시 되돌아오지 않으실 것을 두려워하라!”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 중에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오는지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의 태도에 격분하여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구원의 진리는 때가 차면 스스로 올바름을 증명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인간의 잔꾀나 수단으로 전파되지 않습니다. 상황이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앞길이 보이지 않아 죽음을 원할 정도로 괴로운 인간에게도 천상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습니다. 이슬람 해적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렸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삶 속에 주어지는 은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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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우리의 삶이 오직 주님께로 ... 2016년 다해 9월27일 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 욥기의 말씀입니다. 3,1-3.11-17.20-23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56 저는 보통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이런 말을 들으신 분들은 하나같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그렇게 일어나면 피곤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변하지요. “원래부터 하던 거라 괜찮습니다.” 사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벌써 16년째입니다. 원래 하던 일,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또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합니다. 하긴 저 역시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분의 직업이 높은 건물의 외벽에서 유리창을 닦는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분들의 일이 대단하다 싶어서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무섭지 않으세요?”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래부터 하던 일이라 괜찮아요.” 그렇게 살지 않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 삶이 어렵고 힘들어 보이지만, 원래부터 하던 일은 그리 힘들지도 또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신의 일상 삶이 된다면 남들의 시선과는 다르게 편안하게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일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일 역시 나의 평범한 일상 삶의 일부처럼 생활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사랑과 희생을 하면서 사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나 가능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살아보지도 않았고, 살려는 마음도 없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원래부터 하던 건데요. 괜찮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들어가려는 예수님 일행을 맞이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 제자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셨고 또 그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미움과 복수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삶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만, 아직은 미워하고 판단하며 또 복수 등의 단죄를 하려는 마음을 더 많이 간직하며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으로는 사랑의 삶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주님께서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이 오직 주님께로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 어렵지 않게 주님의 일을 하면서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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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연함과 구애됨을 버려야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여유 있고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다(요제프 킬슈너).
20160927_01.jpg 어제 동창모임을 했던 인천의 한 본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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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을 멈춰 세워,(풀턴 쉰 대주교, ‘한 해를 풀턴 쉰과 함께’ 중에서) 자살은, 장기 두는 사람이 자기 앞에 놓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자 아예 장기판을 엎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엎어 버리는 게 장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듯, 자살은 인생 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닙니다. 동물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포자기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불멸성 때문입니다. 자포자기는 자기애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다른 모든 이들에게 등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결국엔 그 자신마저도 넌더리가 나 스스로 없어지려 합니다. 생명의 영역은 바로 하느님의 영역이지요. 우리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어리석음에서 원죄가 나왔고 각종 죄들이 흘러나왔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자기 삶의 모든 문제들이 술술 풀어지는 것 역시 보너스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160927_02.jpg 거의 15년만에 동창신부 전체가 모였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사랑하는 동창신부들입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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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걷는 일상의 순례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27일 화요일 성 빈센트 드 폴 사제 기념 루카 9,51-5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Departure for Jerusalem; Samaritan Inhospitality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걷는 일상의 순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십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들어가려 했으나 거절당하십니다(9,52-53).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합니다. 이후 아시리아의 이주정책으로 사마리아 지역은 혼혈 지역이 되고 혼합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중심의 남쪽 지파 사람들은 그들을 민족의 순수성을 더럽힌 집단으로 여겨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요한 4,9). 그런데 사마리아인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유다인들에 대한 미움이 생길 법도 했지요. 그들은 자기들만의 종교 예절을 가지게 되었고, 더구나 주님을 섬기는 장소도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과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피해 다니던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신 것은 그런 그들의 처지를 헤아리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집단적 이기주의와 배타심으로 예수님을 배척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합니다(9,5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그 어떤 원망과 불평도 없이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십니다(9,54-55).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내려오심, 수난을 겪고 죽음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자기 몫을 챙기려는 장사꾼의 길이 아니라,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애타는 사랑의 발걸음입니다. 그 길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냉혹하게 응징하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헤아리는 길입니다. 마음을 헤아리고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며, 그 사람의 아픔과 영혼의 어둠과 상처를 헤아리는 천국을 향한 길이지요. 예루살렘을 향한 길은 모든 이를 품기 위한 길이며 모두가 행복하기를 희망하는 길입니다. 죄인도 이민족도,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이들도,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까지도, 내 안의 증오와 다른 이들의 분노까지도 품기 위한 길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새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회개하기를 기다려주는 ‘기다림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이 겪어온 역사적 아픔과 유다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이 입었던 상처와 어둠을 헤아리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품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그들 안에 사랑이 뿌리내릴 여백을 남겨두신 채 묵묵히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우리의 나날의 삶이 바로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입니다. 그 길은 안락한 길이 아니라 고난의 연속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고, 세상의 유혹에 맞서야 하며, 밉고 싫고 피하고 싶은 자신과 이웃의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야 하고, 때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짐을 대신 지기도 하는 길이지요. 내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님처럼 나도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 친구, 직장동료, 교회단체 구성원들의 아픔과 상처를 헤아려 본 적이 있나요?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인생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좀 더 너그럽고, 좀 더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족과 다른 이들을 대하도록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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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27일 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루카 9,53)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왜 예수님은 한번 나에게 오시지도 않는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지...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우리를 찾아 오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맞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을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방문하시고자 할 때 내가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때 왜 안 오시느냐고 강짜를 부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방문하겠다 할 때 "예, 어서오십시오!" 하고 반가이 맞이해야 하겠죠. 오늘 그분이 여러분을 방문하시겠답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오늘 바빠서 시간이 안 된다고 할까요? 오늘 다른 선약이 있어 곤란하다 할까요? 담에 오시라고 할까요? 이런 기회는 평생에 한번 올까말까하는 기회인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그분을 뵙지 못할 수도 있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하지 않습니까? 오늘 그분을 잘 맞이 하시어 평생 한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분과 멋진 시간 보내시길 축복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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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 51)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9월27일 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마음을 굳히는 것입니다. 오늘 져야 할 십자가를 우리가 뒤로 미루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굳히는 이에겐 십자가는 분명 선물입니다. 마음을 굳히는 이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길입니다. 마음을 굳힐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언지를 깨닫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를 두려워 하기보다는 십자가를 통해 변화를 시도하십니다. 마음을 굳히는 용기를 통해 우리들또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이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결심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참된 기쁨이란 아예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마음을 굳히는 십자가의 여정으로 사랑의 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또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하는 은총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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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약한 사람이 되십시오! 2016년 다해 9월27일 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루카 9,51-56 약한 사람이 되십시오! 로마에 올 때 마다 빼놓지 않고 꼭 들르는 장소가 있습니다. 로마 떼르미니 역 뒤쪽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입니다. 기원후 325년 당시 리베리우스 교황님 시절, 교황님 꿈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눈이 내리는 자리에 대성전을 지으라는 당부를 하셨는데, 그해 8월 실제로 눈이 내렸다는 전설을 품은 매력적인 대성당입니다. 로마에 도착한 저는 이번에도 홀로 고즈넉하게 한 끼를 때우려고 바에서 파니니 한쪽과 생수 한 병을 사서 대성당 맞은 편 계단에 앉았습니다. 야심차게 막 한 입을 무는 순간,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서 제 좌우로 앉았습니다. 그들 역시 양손에는 아마도 무료급식소에서 배급받은 듯한 빵 한쪽, 음료수 한 병이 들려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앉아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 유명한 난민들이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 끝에 입국했지만 물설고 낯설은 이국땅에서 직면하게 되는 것은 철저한 소외감이요 차별대우였습니다. 하루에도 골백번씩 꿈속에도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참혹한 대 학살극이 벌어지는 고국은 최소한의 기대마저 저버리게 만듭니다.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더욱 고립감은 커져만 갑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난민들, 이주민들, 다문화 가족들이 겪는 고충들이 손에 잡힐 듯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학자들은 이 시대 난민들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국제이주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현제 전 세계적으로 이주자는 약 10억 명에 이른답니다.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 7명 가운데 한명은 이주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주’는 이 시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주민들을 삐딱하거나 특별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부터 바로잡아야겠습니다. 난민을 불쌍한 사람, 우리 사회에 부담만 주는 사람이라는 편견도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더 나은 삶, 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이주의 역사였습니다. 난민들은 생명과 자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은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난민들은 어제의 우리였고, 어쩌면 미래의 우리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이 지니셨던 삶의 태도는 참으로 눈여겨볼만합니다. 그의 인생 여정도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는 어느 순간 인생이 꼬여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노예선에서 탈출한 그는 그 비참했던 시절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후에 사제가 된 그는 길을 걸어가다가도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빈첸시오 신부님이 노예선의 지도 신부로 사목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발목과 팔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정신없이 노를 젓는 죄수들의 모습은 빈첸시오 신부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죄수들의 생활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쇠사슬에 닿은 피부는 벗겨져 항상 피가 흘렀습니다. 그들의 어깨와 등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채찍 자국들이 굵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마에는 죄수임을 표시하는 쇠도장이 찍혀있었습니다. 자신도 직접 몸으로 노예생활을 체험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셨기에 그런 죄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잔인무도한 간수들을 타일러 매질을 못하게 했었고, 죄수들 앞에 무릎을 꿇어 그들의 상처를 일일이 치료해주었습니다. 오늘 하루 온 종일 우리들의 내면에 자비의 목자 빈첸시오 신부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약한 사람들에게 가십시오. 그들과 함께 약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느끼십시오. 그들의 비참함을 서로 나누십시오.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짊어지십시오. 그러면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여러분을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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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아직 바닥을 쳐보지 않았다면 2016년 다해 9월27일 화요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 독서: 욥기 3,1-3.11-17.20-23 ‘밀정’은 독립 운동가들을 참 많이도 잡아들여 지금으로 말하면 5급 공무원까지 올랐던 한 조선인 일본 순사 이정출(송강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실제 독립투쟁단체였던 의열단이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오는데 도움을 주었던 조선인 일본순사 황옥 종부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을 위해서 자국민들을 잡아들였던 한 사람이 의열단과 술 몇 잔을 나누어 마시고 그들을 돕게 된다는 것이 어쩌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이 자주 바뀌는 것 같습니다. 3·1 운동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을 복사하고 있었던 ‘보성사’라고 하는 곳에 조선인 출신 순사가 들이닥쳤습니다. 모두 사색이 되어 같은 조선인으로서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 하며 지금의 가치 1억 5천만 원 정도의 돈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사는 그 돈도 받지 않고 뒤돌아 나옵니다. 물론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 자결을 하게 됩니다. 저는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바로 들어주기 싫다고 하는 사람은 더 설득해보지만 미적미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더 빨리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태도가 분명한 사람은 더 쉽게 바뀌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가장 웃기는 사람은 “절대로”라는 말을 쓰며 장담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절대 그러지 않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나약한 존재라 선악과 옆에 있으면 그것을 따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그 옆에서 참아내지 않고 일부러 그를 멀리합니다. 주님의 기도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 기도하지, “저희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자신했습니다. 이 “결코, 절대로”를 예수님은 깨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 번이나 당신을 배신할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아니었으면 우리는 큰일 날 뻔 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당신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욥의 입에서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라는 한탄을 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왜 나를 태어나게 했느냐며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경우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안타까워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주님께 두어야 한다고 일상적인 멘트를 날립니다. 그러나 이는 가진 자의 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욥처럼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잘 태어났다고 말할 자신이 있을까요? 욥은 하느님이 인정한 동방의 최고 의인입니다. 그렇지만 자녀와 재산, 명예와 건강까지 잃게 되자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립니다. 이는 누구도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며 자만해 할 수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자신의 삶을 저주하였다가 지금은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도 그런 상태까지 나빠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기 전의 욥처럼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욥에게 하신 것처럼 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우리가 세상 것으로부터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가 되어버려 그런 것들을 잃으면 자살을 해버리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삶의 의미라 믿는다고 쉽게 자만하지 맙시다. 우리는 결단코 ‘절대로’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만큼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에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인식할 때 더 죄로부터 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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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2016년 다해 9월27일 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루카 9,51-56 제가 담당하고 있는 ‘복음화 학교’에서 하루 피정을 하였습니다. 주제는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십시오.’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와 ‘영적식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전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우리의 태양은 은하계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영적식별의 이야기도 핵심은 ‘전환’입니다. 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관점은 ‘나’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지역, 같은 학교, 같은 취미,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도 그런 관점에서 사목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신자, 내가 사목하는 지역, 내가 만나는 사람을 중심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내 관심에서 멀어지는 사람과 일들은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여러분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관점은 상대방입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 지금 헐벗은 사람, 지금 병든 사람이 중심입니다. 이제 그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 사제, 율법학자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그 사람들의 직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영적식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영적식별을 잘하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지금 나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나쁜 악습들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두렵고, 거북하겠지만 바로 보아야 합니다. 애연가는 금연을 대면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주가는 금주를 대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술을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죄’를 대면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드러내야 합니다. 악의 세력은 어둡고, 음침한 곳을 좋아합니다. 작은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우리의 나쁜 생각들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빛이 우리를 어둠에서 희망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사랑하는 이웃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들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듯이, 우리는 자주 고백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성찰하고, 뉘우치고, 새롭게 살 것을 결심하면서 성사를 보는 사람은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미사참례를 자주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하느님나라를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불을 내릴 것을 이야기 합니다. 성서에서 불을 내린 다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불꽃을 내려 주십니다. 그것은 성령의 불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위로, 화해, 평화, 사랑을 주는 영입니다. 가난한 이, 장애인, 이방인까지도 함께 하는 일치의 영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배를 저어가는 선원입니다. 직책이 다를 수 있고, 하는 일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용서와 자비’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468번 그리스도는 나의 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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