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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0월4일 화요일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수도회] 가난의 역설을 통한 사랑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갈라 1,13-24
† 복음 루카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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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모든 종교적 삶의 목표에는 ‘깨달음’이란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명(無明)한 인간이 참된 진리에 눈을 뜨는 ‘회심’의 사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고 회심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바리사이로서 교회를 박해하며 유다교의 전통을
지켰지만, 참된 진리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된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의 계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따로 뽑으셨다는
그의 고백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까지도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도 비슷했습니다. 세속적인
부와 명예에 매달리던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순간, 헛된 욕망을 버리고 완전한 가난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삶에로의 부르심을 깨닫고, 무너져 가던 교회를 청빈의
정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을 집에 모신 마르타의 분주한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있던 마리아가 찾은
참된 기쁨의 몫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평가하려던 마르타의 편견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셨을 뿐입니다. 마르타나 마리아 둘 다
주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본질이고,
이 회심은 ‘멈추어 듣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마리아가 먼저
깨달았을 뿐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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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좋은 몫
2016년 다해 10월4일 화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13-24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8-42
바쁘게 운전할 때가 있습니다. 약속시간이 촉박하거나, 급하게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 초조해지는 마음을 안고 운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호등의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늘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살았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승강기를 탔을 때에는 가려는 층 숫자를 누른 뒤에는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누릅니다. 자판기에서 커피 버튼을 누르고는 커피가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입구에 손을 미리 집어넣고서 뽑을 준비를
합니다. 컴퓨터의 부팅 속도가 느리다면서 투덜거릴 때도
많았습니다. 비행기 탈 때에도 맨 먼저 타려는 것인지 일찍부터
힘들게 줄을 섭니다.
신호등의 시간이 길면 또 얼마나 길까요? 승강기 탔을 때 닫힘
버튼을 눌렀다고 얼마나 이득을 볼까요? 커피 나오는 입구에
손을 넣고 있으면 커피가 더 빨리 나올까요? 컴퓨터 부팅 속도의
차이를 운운하는 사람이 정작 타자를 독수리 타법으로 치고
있다면 어떨까요? 비행기를 가장 빨리 타든, 늦게 타든 상관없이
비행기는 똑같은 시간에 출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서두르는 마음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요? 좀 더 뒤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앞에 있는 시간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늘 이렇게 급하게 매달리다보니 마음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삶이 후회투성이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코앞에 있는 시간에만 매달리는 삶이 아니라, 조금
더 멀리를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내 삶 안의 후회들도 하나씩 줄여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와 그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초대했기에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지요. 이 모습이
밉고 얄미웠나 봅니다. 그래서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의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일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좀더 넓은 안목을 키워서 하느님
나라의 일을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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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재능이 아무리 평범하게 보일지라도. 그의 특성인 재능을
올바로 사용하면 전 인류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다(존 러스킨).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사셨던 아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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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의 글을 통해....
“동시에 자기 마음과 세상의 행복에 대해 신경 쓸 수 없다. 세상의
행복을 원하면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지키고 싶으면 세상의
행복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항상 둘로 쪼개질 것이며,
둘 중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세상의 어떤 일로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울 때, 언젠가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러면 전에 아주 큰 불행처럼 보이고 너를
불안케 했던 일이 걱정할 가치가 없는 그저 그런 불쾌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가라고 할 수 있는 에픽테토스의
글입니다. 2000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철학가의 글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불행이 늘 함께 했다고 합니다. 평생을 노예로
살았고, 류머티즘으로 인해 큰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 불행을
신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견뎌내면서 일상적
삶의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가르쳤던 것이지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오히려 내 마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십자가.
그래서 예수님과 똑같이 사셨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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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가난의 역설을 통한 사랑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4일 화요일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
마태 11,25-30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가난의 역설을 통한 사랑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감사드리며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1,25-26)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전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무렵 이 기도를 바치신 것입니다.
아빠께서 계시하시고 구원의지를 드러내신 덕분에(11,25ㄴ-26),
극소수 못난 제자들만이라도 당신의 정체와(11,27) 하늘나라의
신비들을(13,11) 이해하고 따라준 데 감격해서 이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의 살을 취하시어 ‘절대
가난’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가난한 처지에 내몰리시어 감사를
드리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역설’이요 사랑의 역설입니다.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강생의 겸손과 주님 수난의 사랑에
매료되어 전 생애에 걸쳐 가난의 역설을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주님의 기도’ 묵상, 5)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낮추고, 비우고,
작아짐으로써’, 가난하게 되셨음을 알아차린 프란치스코는 바로
그 가난을 통해 사랑의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 편지 29).
사랑하는 분을 위해 모든 것을 되돌려드리기 위해 그는 가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난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통로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것이지, 가난해지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걸었던 가난의 길, 사랑의 길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되돌리는 되돌림의 길이었습니다.
성인이 살았던 가난의 역설은 그래서 아래로의 발걸음이요
비움의 길이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심지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도 작아지는 사랑의 순례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형제로서 “서로 간에 어떤 권한이나 지배권도 가져서는 안 되며,
서로 봉사자와 종이 되어야 하며, 영의 사랑으로 자진해서
봉사하라.”(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5,9-14)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 때 기뻐해야 합니다.”(인준받은 수도규칙 9,2) 그는 이렇게
가난의 역설을 통하여 가난하신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었으며, 피조물을 사랑하는
보편적 형제애를 온 몸으로 실행했습니다.
우리도 가난한 자 되어 주님의 편한 멍에를 메고(마태 11,30)
행복한 사랑의 순례를 했던 아씨시의 빈자(貧者)를 본받아,
모두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적 풍요 안에 머물러
'모든 이의 형제'가 될 수 있도록, 낮추고 비우고 작아지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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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4일 화요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 10,42)
오늘은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저를 비롯한 모든 프란치스칸들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축일 맞이하신 모든 이들에게 축하드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가진 몫이 더 좋고 나에게 딱 맞는 것인데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는 착시현상을
참인 양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마르타의 몫이 더 좋아 보이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몫이 더 좋아 보였을까요?
여러분은 마리아의 몫이 마르타의 몫보다
더 좋은 것이라 여기고 있나요?
아니면 마르타의 몫이 더 좋아 보이나요?
마르타의 몫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마리아의 몫도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타가 마리아의 몫을 차지하였다면 과연 행복했을까요?
마리아가 마르타처럼 산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아닐 겁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몫이 나를 위해 가장 좋은 몫이랍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 만년에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형제들이여, 잘 계십시오. 나는 나의 몫을 다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몫을 다하십시오!"
오늘 나의 몫이 가장 귀하고 좋은 것임을 깨닫고
그 몫에 충실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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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0월4일 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필요한 것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가장 좋으신 예수님과 함께하기위해
복음적 가난과 겸손이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육화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위해 우리를 회개로 이끌고 계십니다.
회개의 삶이란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모든 것안에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가 될 때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조화로운 평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참된 평화란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겸손한 기쁨입니다.
작아질수록 서로를 더 존중하고 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희망을 두기에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중심이 될 때 우리들또한 생명 중심으로
공동체 중심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내적 기쁨이란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
주어지는 참된 기쁨입니다.
기쁨안에서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까지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가난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가난하였기에 충만할 수 있었음을 벌거벗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작아지는 성프란치스코를 통해 다시 배우게됩니다.
-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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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2016년 다해 10월4일 화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 10,38-42
며칠 전에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친구들이 가져다 달라는
물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가까지 지니고
다니던 것들이 결국은 필요 없어서 버리는 꿈이었습니다. 보통
꿈은 일어나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꿈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입니다. 꿈을 생각하니, 좀 더 비우고,
겸손하게 살라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는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이끌어
주던 율법과 계명을 버렸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권한도
깨끗하게 포기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후에 비로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프란치스코 성인도 자신이 추구하던
것들에서는 참된 행복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을
모두 놓아버릴 때, 성인은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들에
핀 꽃에서, 가지에 앉은 새에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과 비움에서 참된 자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님께서는 꿈속에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온 몸으로 지탱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프란치스코 성인이었습니다. 교황님은 가난과 비움이
교회의 쇄신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수도회의 규칙을 인준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비움은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습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생각이 바뀐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행동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자캐오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절반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빌린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사람과
가족들은 구원 받았습니다.’ ‘행동’이 바뀐 사람은 이제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도 나와 성격이 다를 수 있고, 직장에서,
이웃에서도 그렇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고, 직장에서도
즐겁게 지내기 어렵습니다. 본당에도 그렇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단체들은 서로 하는 일이 다르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단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배격한다면 공동체는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서로 다른 단체들을 받아들이고, 서로 협조할 때
공동체는 발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택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선택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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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경은 영원나라 계시문학
2016년 다해 10월4일 (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성경은 영원나라 계시문학
바람 잘 날 없는 세상이라서 자연계도 폭풍 지진 전쟁 공해
끝없네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별건가요? 마찬가진데도
‘난 달라!’ 그러네요. 뉴스도 듣다보면 빙빙 도는 쳇바퀴 같고
사람 말 그 말이 그 말이데요.
내가 본 동화를 어린애들이 보며 또 좋아하듯 어린 시절이 맘에
드네요. 옛 동화문학은 초월계 소식 같고 복음은 그처럼 하늘의
계시문학입니다. 동화를 과학으로 따지지 않듯 성경도 따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 봅시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1~42)”
사실 알고 보면 세상사람들 정말 웃겨요. 세상지식으로 제발 묶고
뛴대요. 하늘에 세상학문 디려대지 마시고, 성 프란치스꼬처럼
그냥 다 형제자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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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자기 몫에 기뻐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4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루가10,38-42)
성프란치스코 기념
자기 몫에 기뻐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 아플 것도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가10,40).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가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10,17)'. 말씀을 기초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마르타는 다소 불평어린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 드렸는데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 했으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생색은 왜냅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는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 주어졌든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가12,31).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참으로 좋은
몫을 택하신 분입니다.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모든 세상의
부를 포기할 수 있었고, 세속적 욕망으로 무너져 가던 교회를
청빈의 정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성인은 예수님의 오상을 받았으며 주님을 온전히
차지하셨습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통해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은총 안에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409번 아침 저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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